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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금동원(琴東媛) 2016. 5. 11. 00:21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 헤르만 헤세 지음/ 임홍배 역/ 민음사

 

 

  ○책 소개

  지성과 감성, 종교와 예술로 대립되는 세계에 속한 두 인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나눈 사랑과 우정, 이상과 갈등, 방황과 동경 등 인간의 성장기 체험을 아름답고 순순하게 그려낸 소설로, 『데미안』과 더불어 헤세의 소설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아온 작품이다. 작가 자신의 삶의 체험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젊은 시절 그의 영혼을 뒤흔들던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헤세는 불완전한 인간이자 방황과 방랑, 예술에 대한 동경, 여성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끊임없이 낯선 세계에 부딪히는 청년 골드문트를 통해 자신의 성장기 체험을 한 인간의 운명에 대한 성찰로 승화시키고 있다.

* 이 책은 『지와 사랑』(헤르만 헤세 저)과 동일한 도서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지와 사랑』의 독일어 원제입니다

 

 

  Herman Hesse(1877~1962) 내면의 변화를 주제로 오랜 작품세계를 그려온 작가로 자기 탐구를 거쳐 삶의 근원적 힘을 깨닫게 되고 관조의 세계를 발견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을 순수하게 사랑하고 삶을 보다 깊이 이해해 나가는 모습들을 주로 그리고 있다. 1877년 남독일 뷔르템베르크의 칼프에서 출생하였다. 목사인 아버지와 신학계 집안의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1890년 라틴어 학교에 입학하고, 이듬해에 어려운 주(州) 시험을 돌파하여 마울브론의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천성적인 자연아로 기숙학교의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하였다.

  1904년에 9세 연상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하고, 스위스의 보덴 호반(湖畔)의 마을 가이엔호펜으로 이사를 간다. 여기서 그는 시를 쓰는데 전념했고, 1923년에는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 초기의 낭만적 분위기의 시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인도 여행을 통한 동양에 대한 관심,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전쟁의 야만성에 대한 경험, 그리고 전쟁 중 극단적 애국주의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문학계의 비난과 공격, 아내의 정신병과 자신의 병 등 힘들어져가는 가정 생활 등은 그를 변하게 만든다. 그는 정신분석학에서 출구를 찾으려하는데 융의 영향을 받아서 이후로는 '나'를 찾는 것을 삶의 목표로 내면의 길을 지향하며 현실과 대결하는 영혼의 모습을 그리는 작품을 발표하게 된다.

 

  주요작품으로 현실의 무게는 수레바퀴 밑으로 그들을 밀어 넣지만 결코 짓눌려서도 지쳐서도 안 되는 소중한 청소년기에 청소년들이 겪는 불안한 열정과 미래, 방황과 좌절을 섬세하게 묘사한『수레바퀴 밑에서 Unterm Rad』(1906), 예술가의 내면세계를 그린 소설로 가수 무오토, 작곡가 쿤, 이들 사이에서 고민하는 게르트루트를 그린『게르트루트 Gertrud』(1910), 남성과 여성 속박과 자유 시민성과 예술성이 전편을 통해 끝없는 대립 상태로 이어지면서 결국은 주인공 베리구드가 나름대로의 자유를 얻게 되는 과정이 그려진 『로스할데 Rosshalde』(1914)와, 3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서정적인 『크눌프 Knulp』(1915)등이 있다.


  또한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받아 자기탐구의 길을 개척했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미안 Demian』(1919)은 신앙이 깊고 성결하며 예의바른 부모의 세계와 하녀, 장인들의 입을 통해 듣는 부랑자, 주정뱅이, 강도 등 악의 세계가 자신의 내면에서 대립되고 있어 위태로운 방황을 계속하던 주인공 싱클레어가 데미안이라는 수수께기 소년에 의하여 자기발견의 길로 인도되어 참된 자아를 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당시 에밀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발표되었으나, 비평가의 문체 분석에 의해 작가가 헤세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주인공이 불교적인 절대경지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싯다르타 Siddhartha』(1922) 또한 헤세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진리는 가르칠 수 없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일생에 꼭 한 번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던 시도가 바로 이 작품으로서 불교적 가르침과 사상의 복음서라기보다는 헤세 자신의 세계관이 담겨 있다. 깨달음을 갈망하면서 가장 밑바닥의 자아를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속세의 쾌락과 정신적 오만을 초극하고 완성자가 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943년 헤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주었던 『유리알유희 Das Glasperlenspiel』는 1931년에 시작되어 1943년에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는데, 이 긴 성립시기는 나치시대와 일치한다. 히틀러로 상징되는 문화의 침체와 정신의 품위상실, 야만과 원시의 시대에 작가 헤세는 정신적인 봉사와 문화적인 삶을 추구하는 유토피아적 세계를 유리알 유희속에 세운다. 이 밖에 단편집·시집·우화집·여행기·평론·수상(隨想)·서한집 등 다수의 간행물이 있다.

  1962년 8월 9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기 실현을 위한 노력을 한시도 쉬지 않았던 그는 1946년 노벨문학상과 괴테상을 동시에 수상하기도 하였다.

 

 

  ○책 속으로

 

  다니엘 수도원장은 오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중년의 수도사 둘이 오늘 그를 찾아와서는 까마득한 오래전부터 서로간의 질투심에서 비롯된 하찮은 시비거리를 다시 끄집어내어 격앙된 어조로 서로를 헐뜯으며 말다툼을 벌였던 것이다. 수도원장은 두 사람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다가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자 경고를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엄격하게 두 사람의 직위를 박탈하고 각자에게 상당히 무거운 벌칙을 부과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자신의 조처가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그는 작은 예배당의 기도실로 들어가서 기도를 드렸지만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다시 일어섰다. 그러고는 그윽하게 실려오는 장미 향기에 이끌려 잠시 숨을 돌릴 요량으로 회랑 쪽으로 걸어갔다. 거기서 그는 생도 골드문트가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평소에는 너무나 싱싱하게 아름다운 이 젊은이의 얼굴이 빛을 잃고 초췌해진 모습에 깜짝 놀라며 골드문트를 슬프게 바라보았다.---

 

○출판사 서평

 

노벨문학상과 괴테상을 수상한 20세기 최고의 작가이자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온 헤세가 올해로 탄생 125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하여 독일, 스위스 등지에서 헤세 탄생 125주년 기념행사가 여러 방면에 걸쳐 기획되고 있다. 헤세의 고향 칼브를 비롯하여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브뤼셀, 마울브론, 보덴제, 테신, 몬타뇰라, 부다페스트 등,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마련된 이번 행사는 2월부터 10월까지 계속되며 전시회, 심포지엄, 낭독회, 라디오 및 텔레비전 특별 방송 등의 일정으로 진행되고 있다. 특히 지난 7월 2일은 헤세가 태어난 날로, 티치노에서는 거리 축제가 있었으며 10월에는 뮌헨의 옥토버페스트(보통 9월 중순부터 10월 첫째 주 일요일까지 열린다)와 겹쳐, 관계자들은 2주간 전 지구촌의 헤세 애호가들이 몰려들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민음사는 젊은이의 영원한 고전이자 헤세 문학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세의 작품 중 가장 파격적이고 대담한 작품 {황야의 이리}를 재출간하였다. 이들 작품은 1997년 헤세 선집(민음사)에 수록되었고 민음사는 일찍부터 독일의 주어캄프 사와 계약하여, 헤세의 아름답고 섬세한 문장을 원문에 가장 가깝게, 가장 믿을 만한 번역으로 국내에 소개해 왔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지성과 감성, 종교와 예술로 대립되는 세계에 속한 두 인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나눈 사랑과 우정, 이상과 갈등, 방황과 동경 등 인간의 성장기 체험을 아름답고 순수하게 그려낸 소설로, {데미안}과 더불어 헤세의 소설 중에서 가장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아온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지와 사랑}으로 번역되어 소개된 이 작품을 헤세 자신은 <내 영혼의 자서전>이라 일컬었다. 그만큼 이 작품에는 작가 자신의 삶의 체험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젊은 시절 그의 영혼을 뒤흔들던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작품이 1930년, 그러니까 헤세의 나이, 쉰이 넘어서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보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작가의 회고담으로 읽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와 같은 자전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인간이자 방황과 방랑, 예술에 대한 동경, 여성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끊임없이 낯선 세계에 부딪히는 청년 골드문트를 통해 <자신의 성장기 체험을 한 인간의 운명에 대한 성찰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자서전적 소설이라기보다 성장 소설의 유형에 근접해 있다>. 우리 말 번역에 있어서도 순수하고 아름다운 두 인물의 심리와 기타 묘사를 원문의 느낌 그대로 되살려내어, 가히 헤세 문학의 결정체라 할 만하다.


   {황야의 이리}는 전 세계적으로 질풍같이 퍼져간 헤세 붐을 선도한 작품, <헤세의 작품 중 가장 대담한 작품>(토마스 만), 가장 예외적인 작품 등 화려한 수식어를 동반하는 작품이다. 60년대 초반 미국 서점가를 휩쓸며 불티나게 팔려 68혁명을 주도한 세대들에게 정신적 양식이 된 이 소설은 한편으로는 <히피의 성경>, <마약을 하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통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숨 막힐 정도로 집요한 자아 성찰과 냉철한 문명 비판>, <치열한 작가 의식이 돋보이는 실험소설>로 꼽힌다.

  이 소설은 융의 심층 심리학의 기본사상을 빌려 자신과 세상에 대해 불가능한 이상을 기대하여 심각한 심리적 동요를 겪는 한 이상주의자가 원형적인 상징 인물과의 대결을 통해 새로운 정신적 통일성과 자아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도정을 그리고 있다. <황야의 이리>라 불리는 예술가 하리 할러는 공격적이고 일그러진 이리의 영혼과 지극히 시민적이고 교양 있는 인간의 영혼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하리는 이리와 인간의 영혼 사이에서 갈등하며 간혹 이리의 눈으로 문명화, 기계화된 세상을 비판하며 자신을 자해하기도 하고 또 인간의 영혼으로 정치나 음악, 세상의 어떤 사건에 대해서 교양 있는 시민으로서 생활을 영위하기도 한다. 이런 분열적인 생활 속에서 마침내 하리는 자신 속의 내재된 이리와 인간 사이에서 이리의 영혼에 압도당해 자살을 결심하지만, 또 다른 영혼의 아웃사이더인 헤르미네를 통해서 억눌리고 괴롭힘을 당했던 이리의 영혼을 인간의 영혼으로 융화시켜 간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숙명적인 고독과 마주친다. 헤세는 할러의 입을 통해 결코 순탄하지 못했던 자신의 삶과 수많은 삶의 제약들을 뛰어넘기 위해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던 고독Einsamkeit을 토로하고 있다. 자살을 기도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등 질풍노도의 청년기, 두 번의 이혼과 아들의 잦은 발병으로 인해 맞은 창작의 위기는 헤세에게 <어두움>을 뚫고 밝은 작가로 거듭 태어나게 해준 아픈 상처이다

 

 

[독자리뷰]  삶의 관객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십시요.

오우아 | 2011-10-06/ 원문주소http://blog.yes24.com/document/5234566 

 

  과일의 단물처럼 넘쳐흐르는 삶의 풍요로움, 사랑의 정원과 예술의 땅은 바로 너희들의 것이지. 너희들의 고향이 대지라면 우리네의 고향은 이념이야. 너희들이 감각의 세계에 익사할 위험이 있다면 우리는 진공 상태의 대기에서 질식할 위험에 처해 있지. 너는 예술가고 나는 사상가야. 네가 어머니의 품에 잠들어 있다면 나는 황야에서 깨어 있는 셈이지. 나에겐 태양이 비치지만 너에겐 달과 별이 비치고(…)인간이란 존재는 정말 정해진 규칙대로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것일까? 인간의 시간과 운명이 예배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그렇게 정해져 있는 일일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중에서

 

 

  정신적 인간과 감성적 인간은 어떻게 다를까요? 헤세의『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는 두 명의 특별한 존재가 있습니다. 제목에 그대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입니다. 나르치스가 정신적 인간이라면 골드문트는 감성적 인간입니다. 나르치스의 삶이 모범적이라면 골드문트의 삶은 몽상적입니다. 나르치스가 운명의 종소리를 듣고 수도사의 삶을 성심껏 받아들였다면 골드문트는 세상을 방랑하면서 예술가의 인생을 보냈습니다. 좀 더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품고 안고 있는 애제자와 예수를 배반한 또 다른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골드문트가 예수를 배반할 수 있었던 까닭은 나르치스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수도원의 사제 선생이었던 나르치스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온 골드문트를 보는 순간 어떤 운명을 예감했습니다. 비록 자신의 뜻도 있었겠지만 골드문트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골드문트에게 속죄와 희생을 요구했습니다. 즉 골드문트에게 어머니의 죄를 씻기 위해서는 평생을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믿음을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나르치스는 골드문트가 금욕의 길을 가야 할 운명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잃어버린 어린 시절에 대한 베일을 벗겨내고 본연의 천성을 되돌려 주고 싶었습니다. 골드문트에게 어머니는 금기의 대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의 우정은 위태로웠습니다. 나르치스가 사변가요 분석가였다면 골드문트는 몽상가요 순진한 영혼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들은 마치 해와 달, 바다와 육지처럼 가까워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훌륭한 인격자였습니다. 특히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순진무구한 사랑의 감정에 논리학으로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나르치스에게 사랑은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라 일종의 기적과 같았습니다. 기적은 서로를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세계로 넘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서를 인식하면서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로부터 영혼의 소리를 듣습니다. 골드문트의 문제는 신앙이나 학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보다는 골드문트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골드문트는 사랑을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섬세하고 풍부한 감성을 타고난 그가 정신의 세계를 추구하면서 금욕의 길을 간다는 것은 뭔가 불합리했습니다. 그래서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에게 ‘깨어있는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깨어있는 사람이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기 자신을, 즉 자신의 가장 내면적이고 비합리적인 정열이나 충동 혹은 약점까지도 인식하고 처리할 줄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만약 골드문트가 스스로 자신을 발견한다면 자신보다 더 우월하다고 나르치스는 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골드문트는 깨어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세상을 방랑하게 됩니다. 자신의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어머니를 동경하면서 말입니다. 동경은 어머니에 대한 몽상으로 가득 찼는데 태초의 어머니, 이브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만난 여자들과의 사랑은 빨리 충족되었다가 그토록 빨리 사그라들었습니다. 그가 한 여자를 사랑하고 그 여자에게 자신을 바친다는 것은 남들이 말하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랑에 빠진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골드문트에게 사랑은 삶으로 통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랑의 쾌감은 무상했고 덧없었습니다. 이러한 전율에서 그는 사랑과 욕망을 인생의 어머니라 부를 수 있다면 무덤과 사멸 또한 그렇게 부를 수 있다고 깨달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골드문트는 방랑을 하면서 사랑 못지않게 세상은 온통 죽음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죽음과 함께 산모(産母)의 고통을 보면서 가장 큰 고통은 최고의 쾌감이라는 것을 봤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는 자신의 예술을 만들어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운 ‘마리아상’을 어떤 욕망이나 허영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신성한 작품으로 창조하고자 했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매혹적이라고 해도 영혼이 살아 있지 않으면 그것은 한낱 유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술작품은 신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입니다. 즉 ‘탄생과 죽음, 자비와 공포, 생성과 소멸’을 동시에 포용하는 것입니다.

  자유를 누리고 방황하던 골드문트는 생의 마지막 길목에서 나르치스와 다시 만납니다. 나르치스가 수도원장이 되어 사상가였다면 골드문튼 예술가였습니다. 사상사가와 예술가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사상가는 상상을 하지 않고 사고합니다. 반면에 예술가는 상상이 없이 사고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약 골드문트가 예술가가 아닌 사상가가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나르치스는 골드문트가 불행한 예술가에 지나지 않다고 했습니다. 불행한 예술가란 시를 못 짓는 시인, 붓이 없는 화가였습니다.

 


  아우렐리우스는『명상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 현존의 목표를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세상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면 자신의 운명을 정할 수도 없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나르치스는 사상가든 예술가든 모두 나름대로 자연의 선물로 받은 자신의 재능을 실현하면서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아실현! 이것이 우리들의 인생의 목표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과 같은 ‘완벽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가능성의 존재’입니다. 진정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삶의 관객이 아니라 주인공이어야 합니다.

 


○ [독자 리뷰] 둘이지만 하나

 

드림모노로그 | 2015-08-19 /원문주소: http;// blog.yes24.com/document/8159952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오로지 '둘'만의 경험을 알랭 바디우는 사랑이라 말했다. 둘만이 경험할 수 있는 사랑은 서로에게 사로잡히는 이끌림으로 이루어진다. 라캉은 누군가에게 이끌릴 때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그가 이룬 성취가 아니라 그것때문이라 했다. 그렇다면 '그것'이란 무엇일까? 자신안의 욕망을 대변하는 지시대명사인 '그것' 이란 돈이나 권력, 재산이나 명예등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가리킨다. 누군가에게 이끌린다는 것은 내 안에 깃들어 있는 잠재된 욕망이다. 따라서 사랑은 둘의 경험이지만 엄밀히 말해서는 잠재된 나의 욕망을 사랑하는 일이다. 지성의 결정체 나르치스와 사랑의 결정체 골드문트의 사랑은 둘의 경험이지만 엄밀히 말해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지성과 지혜로 똘똘 뭉쳐져 수도원생들 사이에서도 군계일학이었던 나르치스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외모와 맑은 영혼을 가진 골드문트는 첫 만남에서부터 이끌린다. 철학과 문학, 외국어에도 능통했던 나르치스는 수도원장과 교사들 모두에게 인정받는 최고의 학생이었고 동료생도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것은 단연코 골드문트였다. 타인의 운명을 읽을 수 있었던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운명이 수도사가 아님을 간파했지만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처럼 지적인 수도사가 되고 싶어했다.

 

그는 골드문트의 본성을 환히 꿰뚫고 있었으며, 서로 대립되는 기질에도 불구하고 그 본성을 아주 내밀하게 이해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골드문트의 본성은 바로 그 자신이 잃어버린 또 다른 반쪽이었기 때문이다, -p5

 

  나르치스는 타고난 감각으로 골드문트의 출생에 알 수 없는 무엇이 드리워져 있으며, 골드문트의 기억 속에 지워진 과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데, 그것은 일종의 죄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무희였던 어머니의 속죄양이 되어 수도사가 되길 바라는 아버지의 강압된 요구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골드문트는 어머니와의 기억을 지워왔다. 나르치스의 집요한 탐색과 질문으로 골드문트는 어머니의 기억을 되찾게 되고 망각의 더깨가 사라지면서 어머니를 향한 갈망이 그를 따라다니기 시작한다. 수도원 마실을 나가 어머니를 닮은 리제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이후 골드문트의 정처없는 방황이 시작된다.

  자유분방하고 관습에 얽매이지 않으며 맘껏 사랑하며 사는 삶이 그에게 열렸다. 어린 소녀에서 유부녀까지 ,만나는 모든 여인들이 골드문트를 사랑했다. 노상강도 빅토르를 만나 살인까지 저지르고 레네를 겁탈하려 한 남자의 목을 부러뜨리고 절벽에 버리고, 골드문트의 행보는 거침없다. 흑사병이 창궐하는 도시를 지나며 삶과 죽음의 의미를 떠올리고 백작 부인과 사랑에 빠져 감금 당하고 살해 협박을 받기도 하는데 그의 기행은 성모상에서 만물의 속삭임을 듣게 될때까지 그치지 않는다.

 

 

내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면 그건 자네 덕분일세. 자네만은 사랑할 수 있었으니까. 사람들 가운데오직 자네만을 말일세. 이게 나한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네는 어림도 못할걸세. 그건 사막에서 솟구치는 샘물이요, 황무지에서 꽃을 피우는 나무와 같은 걸세. 나의 마음이 황폐하게 메마르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이 닿을 수 있는 자리 하나가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자네 덕분일세.’

  한평생을 잘 짜여진 질서 속에서 최고의 지성인으로 살아 온 나르치스와 방탕자로 삶을 탕진해 오던 골드문트와의 '사랑'은 오로지 둘의 경험안에서만 존재한다. 나르치스의 기도는 골드문트를 향해 있었고 골드문트의 방황은 나르치스를 향한 것이었다. 지와 사랑, 나르치스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사랑은 골드문트 그 자체였고 골드문트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정신적 고향은 나르치스였다.

  자신의 운명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을 때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에게 돌아와서 평생 꿈꾸던  걸작들을 완성한다. 나르치스의 얼굴을 한 성 요한 상을 조각하며 예술혼을 불태우는 골드문트의 열정은 나르치스를 사랑으로 이끌었던  '그것'의 모습이다. 자신의 소명을 다하고 죽어가는 골드문트에게 너로 인해 하느님의 은총이 닿을 수 있는 자리가 남아있다는 고백은 사랑은 둘이 하는 경험이지만 결국은 자신안에 깃든  잠재 된 또다른 나를 사랑하는 일임을 의미한다. 사랑의 비밀은 거기에 있다. 둘이 경험하지만 원래 하나였다는 듯이 서로의 가슴에 닻을 내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