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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영혼의 자서전/ 니코스 카잔차키스

금동원(琴東媛) 2016. 5. 24. 21:03

 

 

『영혼의 자서전』-(상)(하)

-니코스 카잔차키스 저/ 안정효 역/ 열린책/ Report to Greco

 

  ○책 소개

  카잔차키스가 죽기 1년 전에 완성된 자서전으로 터키 점령하의 크레타에서 보낸 유년 시절과 정신적 충만함을 찾아 이탈리아, 예루살렘, 파리, 빈, 베를린, 러시아를 거쳐 크레타로 돌아오기까지의 영혼의 기록이다. 『영혼의 자서전』에는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는데, 진실이 대부분이고 최소한의 환상이 가미되었다. 날짜가 바뀐 곳도 많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를 할 때는 항상 본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고, 그가 보았거나 들은 그대로이다. 자신의 개인적인 모험에 대한 얘기를 할 때는 약간의 사소한 수식을 보태었다.

  1957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카뮈는 카잔차키스야말로 자신보다 백번은 더 노벨 문학상을 받았어야 했다며 그의 죽음으로 정말 위대한 예술가를 잃었다고 애통해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소비에트 혁명과 공산주의 이념의 확산, 스페인 내전 등 굴곡 많은 20세기를 살아 낸 작가 카잔차키스. 그는 한 곳으로 편향된 시각이 아닌, 신과 인간, 정신과 육체, 삶과 죽음이라는 상반된 요소들을 절충하고 융합하는 영적 자유의 추구를 통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인간상을 구현했다. 이 작품은 이러한 카잔차키스의 작품세계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작가 소개

  Nikos Kazantzakis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20세기 문학의 구도자〉로 불리는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1883년 크레타 이라클리온에서 태어났다. 터키의 지배하에서 기독교인 박해 사건과 독립 전쟁을 겪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이런 경험으로부터 동서양 사이에 위치한 그리스의 역사적 사상적 특이성을 체감하고 이를 자유를 찾으려는 투쟁과 연결시킨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호메로스와 베르그송, 니체를 거쳐 부처, 조르바에 이르기까지 사상적 영향을 고루 받았다. 그리스의 민족 시인 호메로스에 뿌리를 둔 그는 1902년 아테네의 법과대학에 진학한 후 그리스 본토 순례를 떠났다. 이를 통해 그는 동서양 사이에 위치한 그리스의 역사적 업적은 자유를 찾으려는 투쟁임을 깨닫는다.

  1908년 파리로 건너간 카잔차키스는, 경화된 메카니즘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를 창출하려 한 앙리 베르그송과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신의 자리를 대체하고 '초인'으로서 완성될 것을 주장한 니체를 접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투쟁적 인간상"을 부르짖었다. 또한 인식의 주체인 '나'와 인식의 객체인 세계를 하나로 아울러 절대 자유를 누리자는 불교의 사상은 그의 3단계 투쟁 중 마지막 단계를 성립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의 오랜 영혼의 편력과 투쟁은 그리스 정교회와 교황청으로부터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그의 대표작 『미칼레스 대장』,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그리스인 조르바』가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파문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1951년, 56년 두 차례에 걸쳐 노벨 문학상 후보에 지명되는 등 세계적으로 그 문학성을 인정받았다. 다른 작품들로는 『오뒷세이아』,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 『성 프란치스코』, 『영혼의 자서전』, 『동족 상잔』 등이 있다.

 

  ○출판사 리뷰

  열린책들은 2008년 3월 30일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전 30권을 완간했다. 이번에 발간된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은 원고지 매수로 약 50,000매에 달하는 방대한 양으로 무엇보다 그의 전 문학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1974년 박석기와 이인웅에 의해 『희랍인 조르바』가 한국 최초로 번역된 이래, 몇몇 작품 정도는 안정효, 이윤기 등의 번역으로 읽히기도 했으나 그나마 절판되어 더 이상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카잔차키스 사망 50주기를 맞아 출간되는 열린책들의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그리스인 조르바』 외에도 데뷔작 「뱀과 백합」, 카잔차키스 문학의 사상적 토대가 된 「신을 구하는 자」 등 초기 작품을 비롯하여 완숙한 작가적 경력을 보여 주는 『최후의 유혹』 등 후기의 걸작,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현대시라고 일컬어지는 서사시 『오디세이아』, 희곡, 여행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문학 전반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전집이라 할 수 있다.

  왜 니코스 카잔차키스인가?


  1957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카뮈는 카잔차키스야말로 자신보다 백번은 더 노벨 문학상을 받았어야 했다며 그의 죽음으로 정말 위대한 예술가를 잃었다고 애통해 했다.

  슈바이처는 자신에게 깊은 감동을 준 이는 카잔차키스밖에 없었다고 했다.
  콜린 윌슨은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이라는 것은 비극이라고 했다. 이름이 카잔초프스키이고 러시아어로 작품을 썼더라면, 그는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존 스타인벡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하나로 카잔차키스를 꼽았다.
  카잔차키스를 단숨에 읽었다는 마르탱 뒤 가르는 인간적이고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무엇 때문에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소비에트 혁명과 공산주의 이념의 확산, 스페인 내전 등 굴곡 많은 20세기를 살아 낸 작가 카잔차키스. 그는 한 곳으로 편향된 시각이 아닌, 신과 인간, 정신과 육체, 삶과 죽음이라는 상반된 요소들을 절충하고 융합하는 영적 자유의 추구를 통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인간상을 구현했다.

  자유와 영적 구원을 위해 투쟁의 삶을 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문학과 삶

  카잔차키스의 작품 세계와 예술 세계의 경지는 놀랍기도 하지만, 그가 살았던 삶의 다양성과 이를 통해 도달한 정신적 경지는 더욱 놀랍다. 그는 니체와 베르그송과 러시아 문학에 관한 논문을 쓰고, 불교에 심취하고, 호메로스와 단테와 괴테를 현대 그리스어로 번역할 정도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교육 받지 못한 사람들과 평범한 사람들도 알고 사랑해서, 그가 항상 가장 깊은 애정을 드러낸 것은 바로 그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스스로 선택한 방랑 생활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세계의 대부분을 여행했다. 그러나 그의 참된 정신적인 고향은 언제나 그가 태어난 크레타였으며, 그의 소설들에 등장하는 이야기들, 농부들, 어부들, 술집 주인들, 시골 흥행사들을 카잔차키스가 처음 알게 된 곳도 크레타였다. 낙소스 섬으로 피난 간 어린 카잔차키스는 프란체스코 수도자들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배우며 처음 서양 사상을 접했다. 행동에 대한 욕구와 고행자적인 은둔 의식 사이에서 항상 갈등하던 카잔차키스가 지칠 줄 모르고 그의 참된 아버지, 참된 구세주, 그리고 그와 우리가 존재하는 의미를 추구하게 된 데는 이런 유년기의 경험들이 큰 역할을 했다.
  옛 수도원들이 많기도 하고, 여자들뿐 아니라 암소나 암탉 따위 모든 암컷을 배척하기로 이름난 아토스 산에서 청년 카잔차키스는 여섯 달 동안 영혼과 육체의 수련을 통해 구세주와 직접 접촉하려 노력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잠시 니체와의 유대를 새롭게 하려 하다가 불교에 빠졌으며, 다음에는 불교에서 레닌으로, 그러고는 레닌에서 오디세우스로 옮겨 갔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에게로 귀착하게 된다. 과거의 모든 과정이 그리스도 안에 풍요롭게 열매 맺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자유를 명분으로 내세운 격렬한 혁명의 유혹에 직면했고, 행동하는 삶에 대한 욕망에 이끌렸던 그는 행동과 명상 사이의 갈등을 가장 큰 주제로 다룬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불후의 작품을 남긴다.
이리하여 50이라는 나이에 그는 조이스처럼 그의 민족이 지닌, 창조하지 않은 의식을 만들어 내는, 상상력의 사제가 되려는, 스스로 유일한 의무라고 간주했던 사명에다 모든 정력을 바쳤다. 그는 자신의 내면세계에 동양의 단순성과 감정의 짙은 표현력을 그대로 간직하는 한편, 세련된 서양의 사상을 맞아들였다. 이렇게 하여 대서사시 『오디세이욾』가 탄생한다. 얼마 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고, 또 그다음에 발발한 그리스 내전을 겪으며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 때문에 망명 생활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후 프랑스에 정착한 뒤로는 모든 정력을 창작에 바쳤다. 이때 완성한 작품이『수난』, 『최후의 유혹』, 『성자 프란체스코』이다.
  70세가 되었을 때 그는 유럽 전역에 이름이 알려졌고, 그의 소설들은 30개국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1952년에는 한 표 차이로 노벨 문학상을 놓쳤다. 오디세우스와 마찬가지로 카잔차키스는 세상을 경험하려는, 불굴의 열정을 지닌 이 시대의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도스또예프스끼, E. M. 포스터, 프로이트 전집에 이은 또 하나의 프로젝트

 
  1986년 러시아 문학을 소개하기 시작한 이래 세계 문학의 주옥같은 작품들을 국내에 소개해 온 문학 출판의 대표 브랜드 열린책들이 또 한 번 한국 독자들에게 마련한 선물 같은 문학 전집,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이 전집은 2000년 기획된 이래 9년여에 걸친 번역자와 편집자의 땀이 맺혀 있는 프로젝트다.
  우선 그리스어 원전을 번역하느냐 영어판을 중역하느냐를 결정해야 했다. 국내 그리스어 번역가의 층이 두텁지 않다는 현실적 문제도 있었지만, 그보다 영어판 작품의 상당수가 그 정확성과 신뢰도를 인정받은 카잔차키스의 전문가들에 의해 번역되었다는 점에 용기를 얻어 영어 판본의 중역을 선택할 수 있었다(영역자 가운데 『오디세이아』와 「신을 구하는 자」를 번역한 키먼 프라이어는 아예 6개월간 카잔차키스와 함께 작업했으며, 카잔차키스의 작품을 여럿 번역한 A. 덴 둘라르트와 테오도라 바실스, 피터 빈 역시 카잔차키스의 전문가로 명망이 높은 번역가들이다. 책의 말미에는 이들의 해설을 실어 카잔차키스의 심원한 문학세계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도록 했다).


  다음으로는 영역되어 있는 작품 목록을 작성하여 여기저기에 낱권으로 흩어져 있는 책들을 모았다. 이 전집 목록은 영역되지 않은 짧은 희곡 몇 편을 제외한 카잔차키스 문학 전체를 망라하는 것이며, 추가로 카잔차키스의 아내 엘레니 카잔차키가 남편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엮은 『카잔차키스의 편지』를 더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작가로서의 카잔차키스와 인간으로서의 카잔차키스의 모습을 함께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번역자 선정에 있어서도 원작의 가치를 최대한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좋은 번역으로 정평이 나 있었음에도 『그리스인 조르바』를 제외하고는 모두 절판되어 빛을 보지 못했던 이윤기, 안정효 두 번역가의 원고 6종은 다시 한 번 검토를 거친 끝에 새로이 거듭났고, 나머지 15종 역시 국내 최정상의 번역가들의 손에서 카잔차키스의 숨결과 한국어의 맛을 동시에 살려낸 작품들로 태어났다. 이후 이 원고들은 5년에 걸친 꼼꼼한 원서 대조와 교정교열, 번역가와 편집자의 논의를 거쳐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독자리뷰] 영혼의 자유와 열정에 관한 고백

개츠비 | 2013-09-14/ http:// blog24.com/document/17398001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노벨상 작가 알베르 카뮈는 카잔차키스를 추모하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보다 백배는 더 노벨문학상을 받았어야 할 작가라고 말이다.  카뮈의 말은 겸손이기도 하지만 진실이기도 하다.  카잔차키스는 카뮈의 글에 많은 영향을 준 듯 하다. 카잔차키스의 소설과 자서전을 한 편씩 읽었다.  한데,  내가 젊은 시절 좋아했던 카뮈의 흔적을 이 그리스 작가에게서 발견하고는 신기했다. 

  도서출판 <열린책들>에서 펴낸 2권으로 된 700여 장의 자서전을 읽어내는 것엔 꼬박 한달 가까이가 걸렸다.  쉼없이 빈 시간을 이용해 자서전의 문장들을 훑어갔지만 끝은 오지 않았고,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어느 한 문장 빈틈없이 꽉 채운 듯 진지했고, 둔중한 사유는 계속되었다.  눈이 아프고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질주하는 문장들에서 쉽게 내려설 수 없었다.  그의 삶도 그처럼  놀라운 진념과 열정으로 빚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1883년 그리스의 크레타 섬 이라클리온에서 태어났을 당시, 고향 크레타는 터키의 점령하에 있었다.  터키인들은 기독교인과 크레타인을 박해했다. 아버지는 자신을 이웃섬에 피신시키고, 자신은 독립을 위해 싸움을 이어갔다. 아버지는 상인이었지만, 아들 카잔차키스가 크레타를 위해 육체가 아닌 두뇌로써 싸워주길 원했다.  큰 인물이 되어 크레타인으로서 명예을 지키고, 독립에 기여하라고 말이다.  아들은 훗날 아버지의 원대로 그리스 전체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훗날 터키에서도 독립을 쟁취한다.  하지만, 카잔차키스의 싸움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바로 신과 인간, 영혼과 육체, 선과 악, 신앙과 무신론, 삶과 죽음, 종교와 철학의 대척점에서 그는 전사로서 평생을 보냈고, 피를 흘렸다

  카잔차키스가 죽기 2년 전에 탈고한 <영혼의 자서전>은 이 투쟁과 반항, 피흘림의 기록이다.  그는 일생동안 끝없이 여행했고 방랑했다.  유럽의 수도원을 순례했고, 러시아의 혁명 현장을 목격했고, 중국과 아시아의 나라들을 탐색했다.  이 자서전은 그가 일평생 여행한 나라들에서 깨달은 잠언들의 모음집이다.  그는 쉼없이 진리와 신과 스승을 찾아 헤맸다.  누구나 청년기에는 형이상학적 기질을 품는다.  세계에 대한 의문, 인간에 대한 질문은 청년의 영혼에 자연스레 깃들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일흔 두살 이 자서전을 쓰는 순간까지도 그의 영혼은 여전히 청년의 열정과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두번째 아내 엘레니 카잔차키와 함께 스위스 루가노의 별장에서 한달을 보내던 시기 이 자서전을 집필했다.  

  그 전년에 교황청과 그리스 정교회는  카잔차키스의 두 작품 <미할리스 대장>과 <최후의 유혹>이 신성을 모독했다며 작가를 맹비난했다.  결국 교황은 <최후의 유혹>을 카톨릭교회의 금서목록에 추가하고, 조국 그리스에서 이 두 작품의 출간은 미뤄진다.  훗날  카잔차키스는 그리스 정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이런 사족을 남겼다.

 

  "성스러운 사제들이여, 여러분은 나를 저주하나 나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께서는 나만큼 양심이 깨끗하시기를, 그리고 나만큼 도덕적이고 종교적이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말에 비약은 없다.  카잔차키스는 젊은시절 사제가 되고 싶었고, 되는 길을 심각히 고려했다. 그가 유럽의 수도원을 시시때때로 방랑하며 수행자의 삶과 실제를 온몸으로 배우고, 터득하려 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많은 수도자들을 만났고 그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수행자 가운데 신실한 이도 있었지만 가식과 죄악에 물든 영혼을 수도복으로 가린채 살아가는 이도 많았다.  사제들의 본질이 종교적 형식에 있지 아니하고 그들의 본래적 영혼에 있다고 믿었다.   자서전의 1편은 바로 젊은 시절의 삶과 수도원 기행이 주를 이룬다.  그는 수도원을 방랑하며 그리스도교의 엄격한 금욕의 세계관과 고향 크레타의 그리스적 자유분망함 사이에서 고뇌했다.  종교의 가르침은 현세 부정과 내세의 보상이었다.  카잔차키스는 이 편향된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훗날 그 둘 사이의 조화, 즉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나뉠 수 없고 오직 그 둘 모두로 이루어졌음을 인정하며,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에 고뇌한 이유다.

 

  "너는 선하고 평화롭고 참아야 하며,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내주어야 하며, 현세의 삶은 가치가 없으며, 참된 삶은 천국에서 찾아야 한다, 고 성서가 가르쳤다.  너는 강해야 하며, 포도주와 여자와 전쟁을 사랑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자부심을 드높이기 위해 죽이고 죽어야 하며, 이 땅의 삶을 사랑하고, 하데스의 왕이 되느니 살아서 노예가 되라, 고 그리스의 할아버지인 호메로스가 말했다."   p.324  <영혼의 자서전 1>

 

  <영혼의 자서전 2>에서 그는 본격적으로 인생의 스승들을 찾아 헤맨다.  신문사 특파원으로 학생으로 여행자로, 그는 세계를 여행하고 여러 도시들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길 위의 스승으로 자신의 영혼에 가장 깊은 자취를 남긴 이들을 밝힌적이 있었다.  그들은 호메로스와 붓다와 니체와 베르그송과 조르바였다.   호메로스에 대해 그는 기운을 불러오는 광채로 우주 전체를 비추는 태양처럼 평화롭고 찬란하다고 묘사했다.  조국 그리스의 전설적 작가 호메로스에 대한 경의다.  붓다에게서 그는 세상 사람들이 빠졌다가 구원을 받는 한없이 까만 눈을 발견했다고 적었다.  젊은 시절 철학의 온갖 문제들에 대한 답을 준 이로 철학자 베르그송을 언급했고,  니체의 사유는 고민하는 그를 새로운 고뇌로 살찌게 하며, 불운과 괴로움과 불확실성을 역설적인 자부심으로 되돌려준다.  실존 인물이자 사업의 동반자이기도 했던 무학의동료 조르바로부터 그는 생동하는 삶을 즐길것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배웠다고 고백한다.


  카잔차키스의 자서전은 독특한 서술 방식을 택했다.  그것은 이 자서전이 `영혼의' 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인 가장 중요한 이유다.  자질구레한 생의 구체성에 대해선 되도록 피해간다.  구체적인 인생의 사건들을 회고할 때에도 그는 언제나 시와 잠언같은 문체를 유지한다.  그같은 방식은 700 여 장, 어느 곳을 펴들어도 독자가 고뇌하는 작가의 영혼과 맞대면 하는 느낌을 전해준다.  책 전체가 잠언의 깨달음과 시어의 비유적 언어로 가득하다.   자서전을 곧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일평생 그는 수많은 작품을 썼다. <영혼의 자서전>은 그가 써낸 모든 작품의 태생적 배경과 모태를 확인토록 돕는다.  그는 죽는날까지 인간의 본질과 어떻게 살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다.  그 답을 얻기 위해 여러 스승을 찾고자 했고, 훌륭한 스승들을 결국 만났다.  그들에게 배움으로써 그는 자신의 삶이 교조주의적 부자연스러움에 빠져드는 것을 막아냈다.  그는 자유를 원했고 그 자유속에는 영혼과 더불어 육체의 자유도 포함되었다.  어린 시절 그에게 성경을 가르치던 교사는 성경에 대한 아이들의 질문을 죄악시했다.  신의 섭리에 구체적 질문은 가당치 않다고 말이다.  자유에 대한 카잔차키스의 지칠줄 모르는 열망은 어린시절 금지된 질문들에 얽힌 깊은 트라우마 였을지도 모른다.

 

.  (중략..) 우선 터키인들로부터 찾아야 하는 자유, 그것이 첫 단계였고, 그 다음에는 내면의 터키인인 교만과 악의와 시기로부터, 공포와 게으름으  "내 영혼을 처음으로 뒤흔든 것은 공포나 고통이 아니었고, 쾌감이나 장난도 아니었으며, 자유에 대한 열망이었다로부터, 눈을 멀게 하는 헛된 사상으로부터,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사랑과 흠모를 받는 대상들까지도 포함한 모든 우상들로부터 자유를 찾으려는 새로운 투쟁이 시작되었다."   p.84-85, <영혼의 자서전1>

 

  그가 추구한 자유, 스승으로부터 배운 삶의 지혜, 그 모두를 조화시키는 한 사람은 실존인물 조르바였다.  조르바와 카잔차키스는 탄광 사업을 위해 만난 파트너였지만, 조르바는 카잔치키스에게 놀라운 가르침을 준다.  그것은 조르바가 어떤 종교에도 구애되지 않고, 어떤 이론과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태초의 자유로운 품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가올 천국을 위해서도 봉사하지 않고,  현실을 즐기고 매일 아침 매 순간 삶을 태초의 그것으로 받아들이며, 창조적 단순성과 영혼보다 우월한 힘을 내면에 간직한 채, 분명한 행동력으로 가득한 삶.  그것은 카잔차키스가 일평생 찾기를 갈망한 자유의 참모습이었던 것이다.

 

  결국 카잔차키스는 74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길위에 있었다.  백혈병을 앓고 있었던 그를 아시아 독감이 급습했고  최후의 순간까지 작품과 인생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더 충만한 시간을 구걸하고 싶어했던 노작가는 영면에 든다.  생의 1분 1초를 누리고 오직 현세의 삶 가운데서 구원을 찾고자 했던 성실한 작가는 수많은 작품을 남겨두고 불멸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그의 시신은 크레타로 운구되어 안치되고, 묘비에는 생전에 그가 정해두었던 묘비명이 새겨졌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의 유골은 지금 고향 크레타 섬 이라클리온에 묻혀 있다.  하지만, 그가 창조한 인물속에서 작품안에서 그는 여전히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 숨쉰다.  <영혼의 자서전>을 통해 독자는 여전히 젊고 생동하는 한 청년의 열정과 자유를 보게 될 것이다.  

 

  "인간은 저마다 맞서 싸울 적의 정체를 결정짓는다. 비록 그것이 파멸을 뜻할지언정, 나는 신과 싸우게 되어서 기뻤다. 그는 흙을 빚어 세상을 창조했고, 나는 어휘를 빚는다. 신은 지금처럼 땅 위를 기어다니는 인간을 만들었고, 나는 꿈을 이루는 공기와 상상력으로 시간의 횡포에 항거하는 인간을, 보다 영적인 인간을 빚어내리라. 신의 인간은 죽지만, 내가 창조한 인간은 살리라 ! "  p.194

 

[독자리뷰] 자유로운 영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heroyw1 | 2011-06-27/ http:// blog.yes24.com/document4518331

 

  개인의 본질을 형성케 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성장과 삶의 과정에 있어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것들의 집합이지는 않을까.  한 개인이 자신에 주어진 환경에 아무런 생각없이 안주하지 않는 한, 끊임없는 접촉과 그로 인한 자극, 고민과 깨달음은 한 인간이 지니는 무형의 존재감을 끊임없는 변화속에서 성숙케 한다.  만일 그런 개인에게 성숙된 존재감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유형화된 객체로서 존재하게 될 것이지만 어떤 경우엔 하나의 작품이나 예술로서 승화될 것이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삶을 그렇게 작품으로 승화시킨 인물이었다.

    카잔차키스의 삶이 결국 영혼과 육체의 자유로 귀결되었다는 점에서는 상당한 흥미를 유발한다.  인간의 불안에 대한 두려움으로 종교에 귀의하거나 어떤 사회구조 안으로 안주하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넘어, 결국은 대담성까지 엿보이는 그의 자유는 남다르지만 인간의 본연에 기초하여 당연할 수 밖에 없는 자유로움 그 차제를 느끼게 해 준다.  단순히 자유로움을 넘어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는 삶에 대한 자신감은, 인간의 자유는 어떠한 인위적 저항이나 부정을 넘어 객체 자체로 존중되어 발현되는 그런 온전함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런 그의 자유가 그리스도나 붓다의 사상을 통해 표현되었다는 것은 더더욱 독특해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런 사상의 온전하고 당연한 귀결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여행은 그리스도와 붓다의 사상을 깨닫고 느끼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인간이 만들어놓은 정형화된 종교 교리와 수행과 사상을 벗어남으로서 종교적 사상의 결론은 영혼과 육체의 온전한 자유임을 증명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본연의 사상은 인간의 행위와 사고안에 온전하게 존재하지 않음을 그는 여행을 통한 경험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수도사들의 고행과 베르그송과 니체의 철학적 고민과 레닌의 공산주의를 뛰어넘어 다시 크레타로 돌아오는 그의 모습은 그가 이야기한 중국의 속담 '중대한 시대에 태어나 사는 저주'를 역으로 표현하여 '중대한 시대에 태어나 경험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대표적 상징'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의 자유는 크게 '거짓말을 하거나 남에게 맞고 있지 않는 한 가만 내버려두라'는 부담스러웠던 존재인 아버지와 긴 여행을 마치고 광산산업을 통해 만난 알렉시스 조르바에 의해 완성된 것은 아니었을까.  조르바가 죽기 전 카잔차키스에 보낸 마지막 메세지와 그의 아내였던 엘레나 카잔차키가 이야기하는 카잔차키스의 마지막은 너무도 흡사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부담스럽고 무서운 존재였지만 매서운 침묵으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던 아버지를 마지막에 서술한다.  그의 바탕이 되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이루었던 관계는 그를 완전한 자유의 소유자로 성숙케 하였다.  그런 그가 한편으로 부러운 이유는 여행을 통한 사고의 성숙과 인간관계를 통한 사고의 완성을 이룰 수 있었다는 면에서 사회 시스템의 톱니바퀴로 엮여 살아가고 있는 답답한 나의 현실을 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간 개인의 완벽한 자유의지는 스스로 온전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온전한 개인의 자유의지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사회시스템 안에서 살아가며 형성되는 자유란 정형화된 어떤 요소때문에 온전하다 할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느끼는 자유가 그저 온전하다는 상대적 만족감을 느끼며 살고 있기도 하다.  우리사회가 불합리와 편견과 편차가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역으로 반증하고 있는 모습이다.  카잔차키스가, 그리고 조르바가 삶의 마지막까지 추구하려 했고 표현했던 자유, 그것을 삶을 통하여 진정한 인간미와 온전한 인간성이 존재하는 사회를 추구함으로서 온전한 자유란 무엇인가를 증명하는 수단으로  자의든 타의든 활용했기에 나는 그들의 삶을 하나의 지표로 삼고 싶다.  아직은 소심하고 나약한 사회시스템의 톱니바퀴에 불과하지만, 끊임없는 사고의 성숙을 거치며 만들어지는 삶의 모습은 그들의 자유의지와 그를 통한 온전한 공동체의 지향을 꿈꿀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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