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미소』: 허연 시인과 함께 읽는 세계시인선
- 허연 저/ 민음사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가 한 말이다. 동의한다. 명령이나 계시와는 다른 동네에 시는 존재한다. 시의 미소에 감염된 자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열정으로, 때로는 재능으로, 때로는 자멸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감염된 생을 증거했다. 그들은 세상에 없던 것을 처음으로 보았고, 처음으로 들었으며, 처음으로 이야기했다. 그들은 시인들이었다. 지금 우리는 그들이 남긴 묵시록을 읽는다. 시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한생을 보낸 거인들의 미소에 경의를 표한다. ―시인 허연
거장들의 작품과 부딪히며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지어 온 한 시인의 기록
『시의 미소』는 단순한 시화집이 아니다. 1972년에 시작한 세계시인선 시리즈를 읽으며 성장했던 한 문학 청년의 정신적, 문학적 성장의 일기다. 또한 ‘내 청춘의 주술사’들에게 바치는 시인의 긴 헌사이기도 하다.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집 다락방과 학교 근처 도서관에서 손때 묻은 고전들을 꺼내 읽으며 어른이 됐다. 고전을 만나면서 세상이 두려운 것만은 아니라는 진리를 깨달았고, 지금도 ‘독서는 유일한 세속적 초월’이라는 말을 책상머리에 붙여놓고 있다. 연세대학교에서 「단행본 도서의 베스트셀러 유발 요인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시 창작에서의 영화이미지 수용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게이오대학교 미디어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현재 『매일경제』 문화부 기자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오십 미터』, 산문집 『그 남자의 비블리오필리』『고전탐닉』등이 있다. 한국출판학술상, 시작작품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딜런 토머스, 「밤의 어둠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말라」
선언만을 남기고 떠난 사내
아르튀르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 철」
글씨체로 남은 사랑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별」
권태로부터 탈주한 목신
스테판 말라르메, 「바다의 미풍」
지상에서만 무기력했던 새 한 마리
샤를 보들레르, 「알바트로스」
내 청춘의 주술, 엘뤼아르
폴 엘뤼아르, 「그리고 미소를」
로렐라이에 가려진 독일의 빛과 어둠
하인리히 하이네, 「슐레지엔의 직조공」
미워할 수 없는 그 남자의 문장전선
어니스트 헤밍웨이, 「돌격대」
소멸을 노래한 청춘의 교사
헤르만 헤세, 「눈 속의 나그네」
눈물은 긴말이 필요 없다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 두 편
내성적인 청년과 나눈 최초의 악수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카르페 디엠, 과거에서 온 웅변가
호라티우스, 「묻지 마라, 아는 것이」
향수와 균형의 계관시인
로버트 프로스트, 「자작나무」
신화로 남은 세기의 가객
김소월, 「개여울」
시어(詩語)를 버린 모던전사
김수영, 「헬리콥터」
사라지지 않을 이미지스트 선언문
에즈라 파운드, 「지하철 정거장에서」
칠레에서 온 주술사
파블로 네루다, 「시(詩)」
수줍은 거인이 쓴 현대시의 경전
T. S. 엘리엇, 「천둥이 한 말」
치명적 사랑을 노래한 열 번째 뮤즈
사포, 「어떤 이들은 기병대가」
책 속으로
왜 시가 음악성을 가지고 완성되어야 하는지 딜런 토머스는 몸으로 보여 주었다. 실제로 유튜브 같은 곳을 뒤지면 그의 육성 파일이 돌아다닌다. 시인이 직접 낭송한 「밤의 어둠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말라」를 들으면 소름이 돋을 정도다. 영화 「인터스텔라」에 등장하는 마이클 케인의 멋진 낭송은 각주에 불과하다.
세기말 우울이 유럽을 휩쓸 무렵인 1897년 어느 날 릴케는 루 살로메를 처음 만난다. 사실 만났다기보다는 루 살로메가 강림하셨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릴케는 이때 “우리는 어느 별에서 내려와 이제야 만난 거죠.”라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말라르메는 현존을 떠나고 싶어 했다. 육체는 슬프고 모든 책은 이미 읽어 버렸으니까. 육신의 한계를 알고,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어 버린 자에게 남겨진 건 무엇이었을까? 탈주밖에 없지 않았을까? 인간의 육체로부터 인간이 구현한 대도서관으로부터 탈주하는 것, 그것이 말라르메의 꿈 아니었을까? 「바다의 미풍」은 그래서 선언문이다
생전 단 한 권의 시집을 냈지만 그 시집으로 온갖 야유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보들레르. 생의 마지막을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금치산자로 살아야 했던 보들레르가 피운 꽃이 바로 ‘악의 꽃’이었다. 불행한 천재들이 다들 그랬듯 보들레르는 세상에 좀 일찍 온 인물이었다. 그는 긴 날개를 질질 끌며 우울한 파리를 헤맸다. 현대시는 그렇게 거추장스러운 보들레르의 날개에서 시작됐다.
“어쩌란 말인가 밤이 되었는데 / 어쩌란 말인가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데.” 삼엄한 사회 분위기에 대한 저항시를 쓰면서도 ‘사랑’으로 결말을 내고야 마는 엘뤼아르를 그 시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하이네의 나머지 반 토막을 만났다. 우연히 케테 콜비츠의 암울한 6부작 판화 「빈곤-죽음-회의-행진-폭동-결말」을 보았고, 그것이 1844년에 있었던 슐레지엔의 직조공 폭동을 모티프로 삼은 작품이라는 사실과 그 연결고리에 하이네의 시가 존재했음을 알았다. 그 다음부터 ‘하이네’라는 이름의 음가는 낭만에서 저항으로 장르 전환을 했다. 아름다운 유채꽃밭보다 그 옆 선창가에서 그물을 터는 어부의 힘센 팔뚝이 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진리를 깨닫기 시작했던 스무 살 무렵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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