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瑜璃)의 나날 4
이기철
나는 오래 사색의 흰 길을 걸어왔다
우수가 밟고 온 길은 오히려 화사하고
내 신발은 언제나 진창이었다
고통은 늘 더운 회유를 밀어던지고 내 안에서 살(失)이 되고
작은 일락은 살구꽃처럼 져 내린다
오늘은 항상 위태롭고
수정할 수 없는 어제는 기억 속에서만 따뜻하다
위독한 날들처럼 삶을 긴장시키는 날은 없다
오늘 또 몇 개의 돌에 금이 가고
몇 장의 구름이 내 머리 위에서 흩어지는가
내 옷이 엷을 때 바람은 두텁고
내 기다림이 초라할 때 햇빛은 더욱 부유하다
누가 바람과 햇빛을 제 것이라 하겠는가
아, 어느 가게에서도 황홀한 꾸러밀 살 수 없다
모든 사유들은 시간의 바깥에선 이끼 끼지만
내 껴안고 있는 동안은 순금처럼 번쩍이며 타오른다
육체가 없으면 고통은 없는 것일까
투명한 육체를 지닌 유리는 깨어질 때도 천상의 악기 소리를 낸다
유리에 닿는 길이 나의 종교다
그 수정의 문간에 닿기 위해
나는 오래 사색의 흰 길을 걸어왔다
-『유리의 나날』,( 1998, 문학과 지성사)
->Concerto en re mineur BWV974 - Adagio d'apres Marcello - Piano & Ce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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