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섬』 -그르니에 선집-01
-장 그르니에 저/김화영 역 | 민음사
○책 소개
'섬'은 남프랑스 지중해의 쏟아지는 햇빛 아래 점점이 떠있는 섬과 사람들의 일상을 지극히 담담하고 서정적인 문체로 그리고 있는 책으로 '섬'은 다분히 철학적인 에세이로 채워져 있다.작가이자 철학자인 그르니에는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를 반짝이는 시적 영감에 담아냈다.철학적 사유라 해서 거창한 주제가 아니라 개 한마리의 죽음에서 떠 올린 일상적 추억,튀니지의 작은 해변도시에서 발견한 꽃 핀 테라스,그리고 지중해 해안가의 무덤 같은 것들이 글의 소재다.평범한 소재에서 발견한 삶의 비밀을 섬세하면서도 꿈꾸는듯한 어조로 음악처럼 들려준다.
○작가 소개
장그리니에: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철학자이다. 파리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을 브르타뉴 지방의 변덕스런 자연 속에서 보낸 사람이다. 쥘 르키에를 주제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22년에 철학 교수 자격을 얻었으며, 알제리에서 카뮈를 만나 스승으로서 영향을 주었으며, 나폴리와 알렉산드리아, 카이로 등지에서 철학 교사로 일하면서 지중해의 삶과 인도 사상에 매료되었다. 소르본대학 미학 교수로 재직 및 은퇴했으며, 1968년에는 문학부문 국가 대상을 받기도 했다. 삶에 대한 행복과 절망을 묘사하는 다양하고 독창성 있는 그의 글들은 풍부한 감수성과 호기심을 드러내면서 독자들을 깊은 사색의 세계로 이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섬, 카뮈를 추억하며, 어느 개의 죽음, 일상적인 삶, 지중해의 영감 등이 있으며 30여권의 철학서 및 시적 명상과 풍부한 서정으로 가득 찬 에세이집이 있다.
○역자
김화영: 문학평론가이자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1942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불어불문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프로방스 대학교에서 알베르 카뮈 연구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뛰어난 안목과 유려한 문체로 프랑스의 대표적인 문학 작품을 국내에 소개해 왔으며, 고려대학교 불문학과에서 30여 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개성적인 글쓰기와 유려한 번역, 어느 유파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활동으로 우리 문학계와 지성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했고, 1999년 최고의 불문학 번역가로 선정된 바 있다. 현재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책 속으로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있다. ...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유년기나 청년기 전체에 걸쳐 계속되면서 겉보기에는 더할 수 없이 평범할 뿐인 여러해의 세월을 유별난 광채로 물들이기도 한다.--- p.25
잠 못 이루는 밤이 아니더라도, 목적 없이 읽고 싶은 한 두 페이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수맣은 책들을 꺼내서 쌓기만 하는 고독한 밤을 어떤 사람들은 알 것이다. 지식을 넓히거나 지혜를 얻거나 교훈을 찾는 따위의 목적들마저 잠재워지는 고요한 시간, 우리가 막연히 읽고 싶은 글, 천천히 되풀이하여, 그리고 몽상에 잠기기도 하면서, 다시 읽고 싶은 글 몇 페이지란 어떤 것일까?
겨울 숲속의 나무들처럼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서서 이따금씩만 바람소리를 떠나 보내고 그리고는 다시 고요해지는 단정한 문장들, 그 문장들이 끝나면 문득 어둠이거나, 무.그리고 무에서 또 하나의 겨울 나무 같은 문장이 가만히 일어선다. 그런 글 속에 분명하고 단정하게 찍힌 구두점, 그 뒤에 오는 적막함, 혹은 환청, 돌연한 향기, 그리고는 어둠, 혹은 무, 그 속을 천천히 거닐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 산문집을 번역했다. 그러나 전혀 결이 다른 언어로 씌어진 말만이 아니라 그 말들이 더욱 감동적으로 만드는 침묵을 어떻게 옮기면 좋단 말인가?--- p. 13
사람이 자기의 주위에 있는 것들을 무시해 버리고 어떤 중립적인 영역 속에 담을 쌓고 들어 앉아서 고립되거나 보호받을 수 는 있다. 그것은 즉 자신을 몹시 사랑한다는 뜻이며 이기주의를 통해서 행복해 질 수 있다는 뜻이다. (중략)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삶은 비극적인 것이다. 삶을 살아가노라면 자연히 바로 그 삶으로 부터 자신을 벙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절대로 그런 것 따위는 느끼지 않고 지냈으면 싶었던 감정들 속으로 빠져들기 마련이다.(중략)입을다물고 무시해 버리지는 않고 나는 마음 속에 소용돌이를 계속 불러일으키고 있다.--- p.33
「밤이 다가온다. 밤과 더불어 내게 낯익은 유령들이 깨어 일어난다. 그래서 나는 하루에 세 번 무섭다. 해가 저물 때, 내가 잠들려 할 때, 그리고 잠에서 깰 때. 확실하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 나를 저버리는 세 번……. 허공을 향하여 문이 열리는 저 순간들이 나는 무섭다 ― 짙어가는 어둠이 그대의 목을 조이려 할 때, 한반중에 잠깨어 나는 과연 무슨 가치가 있는 존재일까를 가늠해 볼 때,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생각이 미칠 때. 잠이 그대를 돌처럼 굳어지게 할 때, 대낮은 그대를 속여 위로한다. 그러나 밤은 무대 장치조차 없다」-41~42쪽
물루는 행복하다. 세계가 저 혼자서 끝없이 벌이는 싸움에 끼여들면서도 그는 제 행동의 동기가 한갖 환상일 뿐임을 깨달으려 하지 않는다. 놀이를 하되 놀고 있는 제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볼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그를 바라보는 것은 나다. 조그만 빈틈도 없이 정확하게 몸을 놀려 제가 맡은 역할을 다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황홀해진다. 매순간 그는 제 행동속에 흠뻑 몰두해 있다. 먹고 싶은 것을 보면 그는 부엌에서 나오는 음식 접시에서 눈을 뗄 줄을 모른다. 그의 눈에 가득 찬 욕망은 치열하다 못해 벌써 음식위로 튀어 올라가 앉는 것만 같다. 그가 무릎위에 몸을 옹크릴 때도 제가 가진 모든 애정을 남김없이 쏟아가며 옹크린다. 행동에 빈틈이라곤 찾아보려야 찾아볼 도리가 없다. 그의 행위는 몸놀림과 일치하고 몸놀림은 식욕과 식욕은 그의 이미지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야말로 끝없는 연쇄 조직처럼 일사불란하다. 고양이가 다리를 반쯤 편다면 그것은 다리를 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또 다리를 꼭 반쯤만 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희랍 꽃항아리들의 가장 조화로운 윤곽에도 이토록 철저한 필연성은 없다.--- p.44
때는 사월이나 오월쯤이었다. 내가 그 골목의 직각으로 꺾이는 지점에 이를 때면 강렬한 재스민과 리라꽃 냄새가 내 머리 위로 밀어닥치곤 했다. 꽃들은 담장 너머에 가려져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꽃 내음을 맡기 위하여 오랫동안 발걸음을 멈춘 채 서있었고 나의 밤은 향기로 물들었다. 자기가 사랑하는 그 꽃들을 아깝다는 듯 담장 속에 숨겨두는 그 사람들의 심정을 나는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가 있었다. 하나의 정열은 그 주위에 굳건한 요새의 성벽들을 쌓아 두고자 한다. 그때 나는 하나하나의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밀을 예찬했다. 비밀이 없이는 행복도 없다는 것을.--- pp. 83-84
사람들은 여행이란 왜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언제나 충만한 힘을 갖고 싶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아마도 일상적 생활 속에서 졸고 있는 감정을 일깨우는 데 필요한 활력소일 것이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한 달 동안에, 일 년 동안에 몇 가지의 희귀한 감각들을 체험해 보기 위하여 여행을 한다. 우리들 마음 속의 저 내면적인 노래를 충동질하는 그런 감각들 말이다. 그 감각이 없이는 우리가 느끼는 그 어느 것도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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