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게 잘못함
김남조
시가 안 쓰이는 한 철
벼랑에 세워져 사납게 흔들리는
기이한 공포...... 이런 때
우리는 어떤 예배를 올릴 것인가
어느 날 시가 쓰여진다
혈액처럼, 고여오는,
아니 혈액 자체인 그것을
원고지 위에 공손히 옮긴다
한데 야릇한 가책과 의문이 섞여 치받는다
더 오래 절망에 잠겼어야
옳았지 않을까
여러 세대에 걸치는
소수의 진정한 독자
저들의 가슴을 관통하기엔
참담할 만치 화살이 허약한 게 아닌지
시적 진실성의 함량미달로
친구인 시인들에게
환멸을 끼치지 않겠는지
시인이여
우리는 시에게 잘못하는 일이 많다
하면 오늘밤 각자의 시 앞에
속죄의 등불을 켜고
새벽녘까지
천 년 같은 긴 밤을
시의 참 배필로 있자
- 『김남조 시전집』(국학자료원, 2005,)-근작시(112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