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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원의 우연의 그림 앞에서

책 이야기

황야의 이리/ 헤르만 헤세

금동원(琴東媛) 2017. 3. 25. 18:20

 

 

《황야의 이리》

-헤르만 헤세 지음/김누리 역/ 민음사

 

  전 세계적으로 질풍같이 퍼져간 헤세 붐을 일으킨 작품, 가장 대담한 작품, 가장 예외적인 작품 등 화려한 수식어를 동반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융의 심층 심리학의 기본사상을 빌려 자신과 세상에 대해 불가능한 이상을 기대하여 심각한 심리적 동요를 겪는 한 이상주의자가 원형적인 상징 인물과의 대결을 통해 새로운 정신적 통일성과 자아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도정을 그리고 있다.

 

  ◎책 속으로

 

  축음기는 금욕적인 정신으로 가득 차 있던 내 서재의 공기를 더럽혔고, 낯선 미국풍의 춤곡들은 내 정돈된 음악세계를 교란하면서, 아니 파괴하면서 밀어닥쳤다. 이처럼 모든 것을 해체시키는 두렵고도 새로운 힘이 지금껏 그렇게 정확한 윤곽을 지니고, 그렇게 엄격하게 패쇄되어 있던 내 삶 속으로 밀려들어온 것이다. 인간이 천 개의 영혼을 지닌다는 「황야의 이리론」과 헤르미네의 말은 옳았다. 내 마음속에서는 매일 예전의 모든 영혼 곁에 새로운 영혼들이 나타나 자기 주장을 하며 소란을 피웠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눈앞에 있는 그림을 보듯 지금까지의 나의 개성이라는 것이 하나의 망상에 지나지 않음을 똑똑히 보았다. 나는 우연히 잘할 수 있었던 서너 가지 능력과 수양만을 정당화하면서 하리라고 하는 사내의 상을 그려내어 본래 문학, 음악, 철학에 지극히 빈틈없는 교양을 갖춘 전문가인 그자의 삶을 살아왔던 것이고, 그러면서 내 개성의 나머지 부분, 즉 그 밖의 모든 능력과 충동과 노력의 카오스를 부담스럽게 느껴 라고 불러왔던 것이다.--pp. 182~183

 

  ■자아와 분열에 관한.

    -물방울 | 2015-08-29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는 뭉툭한 단어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너무나 묵직하고 어두운 아이라 그 단어를 요리조리 뜯어보고 살펴보지 않으면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알 수 없을 만큼 단어 하나하나가 빼곡히 박혀 있다. 그의 대표작인 <데미안>을 읽었을 때에도 그 유명한 문장을 읽었을 때도 바로 그 문장이 스며들기 보다는 몇 번을 읽고 또 읽으며 가슴 속에 스며들었던 것처럼 그의 작품이 주는 감동은 오랫동안 가시지 않지만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읽어나가기란 수월하지 않다. 더욱이 <황야의 이리>를 읽었을 때에는 더더욱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책을 먼저 펴먼 편집자 서문이 프롤로그처럼 펼쳐지고 한참 지나서야 이 책의 주인공 하리 할러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수기를 읽었음에도 하리 할러를 통해 작가 자신을 투영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그의 숨막히는 자아 성찰과 냉철한 문명 비판은 그의 문장을 읽음에도 깊이 이해 할 수 없었다. 사실, 편집자 서문을 읽을 때도 숨이 막혔다. 도무지 그의 문장 속에서 읽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만큼 나는 그의 책 속에서 여러번 길을 잃어버렸다. 책을 다 읽었음에도 그의 책을 처음 본 것 마냥 시간이 지나 이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어쩌면 자아성찰과 자아 분열에 대해서 많은 작품을 만났음에도 항상 어려워하는 부분이다. 책에서는 정답을 내어주지 않고 어떠한 결말조차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끝을 맺는다.


  도무지 답이 없는 이 책을 읽다보니 헤세의 매력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궁금증이 생길만큼 나에게는 너무나 어렵고 벽이 높은 소설이었다. 시간이 지나 여러모로 내공이 쌓인 후에 다시 그의 책을 읽어보고 싶다.


  <끔찍스러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그는 말했다.


 「그런 끔찍스러움은 사실은 끔찍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중세인이라면 우리와는 달리 오늘날 우리들의 생활 양식 전체를 끔찍하고 경악스럽고 야만적인 것이라고 혐오할 겁니다. 모든 시대, 모든 문화, 모든 도덕과 전통은 나름의 양식을 가지고 있고, 자기에게 맞는 부드러움과 강고함을 아름다움과 끔찍함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고통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어떤 악은 참고 견디는 법입니다. 인간의 삶이 정말로 고통으로, 지옥으로 변하는 건 두 시대, 두 문화, 두 종교가 교차할 때뿐입니다. 어떤 고대인이 중세에 살았어야 했다면, 그는 그것 때문에 애처로우리만치 숨막혀했을 겁니다. 그건 한 야만인이 우리의 문명 한가운데에서 숨막혀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꼭같은 이치입니다. 지금은 한 세대 전체가 두 시대 사이에, 두 개의 생활 양식 사이에 끼여, 어떠한 자명한 이치도, 도덕도, 어떤한 안정감이나 순수함도 상실해 버린 시대입니다. 물론 너나 할것없이 이것을 똑같은 강도로 느끼는 건 아니겠지요. 가령 니체 같은 사람은 오늘날의 고뇌를 한 세대 이상이나 앞서 체험해야 했지요. 그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 이 고뇌를 고독하게 곱씹어야 했지만, 오늘날엔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체험하고 있는 겁니다.」 - p.35~36


  만족한다는 것, 고통이 없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어떤 고통도 환희도 외쳐대지 않고 모든 것이 그저 속삭이면서 발끝으로 살금살금 움직이는 이런 움츠린 날들은 견딜 만하다. 다만 유감스러운 건 바로 이런 만족이 내게는 좀체 견딜 수가 없고, 시간이 흐르면서 참을 수 업을 정도로 혐오스럽고 구역질이 나서 절망적으로 다른 대기 속으로-가능하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불가피한 경우에는 고통을 겪더라도- 도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 p.39


  쌓아놓은 책더미들 사이로 담배 꽁초와 와인 병이 나뒹굴고, 온갖 것이 무질서하고 제자리를 못 잡고 황폐화 되어 있다. 이 모든 책이며, 원고며, 생각에는 고독한 자의 곤경과 인간 존재의 문제성이, 무의미해져 버린 인간의 삶에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려는 동경이 그려져 있고, 배어 있다. - p.41

 

  내 안의 <황야의 이리>

   -물고기자리 | 2009-07-13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의 마지막 장을 이제 막 덮고 신음처럼 흘러나온 독백은 이 것-놀라워라,

  오십에 이런 치열한 히피스러운, 그러나 히피를 넘어서는 환몽을 보여주다니.작중 중심인물, 하리 할러는 이름부터 어딘지 무정부주의자 혹은 떠도는 영혼같다.그는 자신이 세든 집 계단에서 나는 남양삼나무 냄새로 상징되는 '시민의 세계'에들어가고 싶어하면서도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이유는 자신은 '황야의 이리', 즉시민사회에 길들여지길 거부하는 고독한 야성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황야의 이리'라 일컫는 하리는 자신의 속에 두 가지 상반된 본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 양극은 인간의 본성과 이리의 본성이다. 그리고 또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사람 안에 두 가지 대립된 모습만 있냐고? 노우. 한 사람 안에는 천 개의 대립항이 있는데 넌 스스로 두 가지만 있다고 믿는 것 아니냐?'라고.<데미안>에서?'밝고 질서있는 세계'와 '어둡고 무질서한 세계' 사이에서 힘겹게 나아가는 '소년의 여정'을 보여주었다면 <황야의 이리>에서 헤세는 무수한 대립쌍의 세계들 속에서 진자처럼 방황하는 '오십대의 여정'을 보여준다.

 

  <데미안>에서 소년, 에밀 싱클레어가 이원대립의 세계에서 이원합일의 '아프락사스'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데 조력하는 이는 데미안과 그 어머니, 에바부인이다. 데미안은 소년보다 연상이고 에바부인은 원숙한 중년 여성이다. <황야의 이리>에서 오십대의 하리가 도덕률과 본능의 세계에서 헤매일 때 그로 하여금 두 세계의 괴리를 뛰어넘게 해주는 것은 헤르미네와 마리아라는 어린 창녀들이다. 소년과 중년부인, 중년남자와 소녀들. 자칫하면 상투적일 수 있는 짝짓기는 그러나, 헤세의 관념속에서 아름다운 대위법처럼 조화롭게 느껴진다.소녀들을 통해 입문한 자유분방한 세계에 결국 완전히 동화하지 못한 하리를 향해, '유머'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충고하는 것은 파블로라는 악사와 모차르트와 괴테의 유령이다.
  두 작품을 놓고 볼 때, 헤르만 헤세는 평생을 로고스(원칙)와 파토스(정념)사이에서 고민하며 이 둘을 대립항이 아닌 합일의 세계로 만들려 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어떠한가.

  시민의 사회에 속하기 위해 한평생 공부하고 관습과 도덕을 지키기 위해 긴장하며  살아온 우리는, 인생의 어떤 시기에 습격처럼 찾아드는 정념 혹은 열정에 매혹된적은 없었던가. 그리고 그 불꽃이 사그라든 뒤 남는 식은 빵 같은 허무와 고독을 씹으며 그 일탈에서 조금이나마 다시 시민 사회로 돌아갈 교훈 같은 것을 얻으려애쓰지 않았던가.

  이제는 끓어오를 정념도 거의 없어진 나이가 되어, 마치 한평생 모아온 그림이며 수석같은 수집품을 죄다 고물상에 넘겨버리고 작은 아파트로 들앉아 버린 노인처럼 이제는 어여쁜 것에 대한 탐닉도 바닷가 조가비 껍질 줍는 아이의 한 때의 추억같은 것임을 깨닫는다. 조용한 독백이 내 안에서 피어오른다.

  잘가라, 파토스의 나날들이여.
  하지만, 그렇다고 그대를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진 않겠네.

 

  다만, 이제는 내 안에도 살아있는 '황야의 이리'를 더는 방황하게 내버려두고 싶진않다네. 내겐 할리처럼 <마술극장>에서 온갖 과거의 회한들을 만나 방종의 쾌락을마음껏 즐길 기회가 불행히도 주어지지 않을 걸세. 그래서 나는 아주 짧았던내 파토스의 날들에게 다음 생에서는 내, 좀더 과감한 성격을 지닌, 더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나 그대, 파토스의 불길에 기꺼이 휩싸여 보겠노라고 내세를 기약하겠네.

  책장을 여는 순간부터 나는 직감했다. 내 안에도 '황야의 이리'가 살고 있음을. 나 역시 시민의 세계에 적당히 맞추며 사는 현실의 나를 못마땅해 하는 '자의식'을 가진 사람임을. 그러나 어쩌랴. 삶은 내 안에 울부짖는 '황야의 이리'를 밖으로 풀어주는 순간 혼돈 그 자체가 될 것인데... 책장을 덮으며 나는 또다시 나의 '이리'를 원래의 자리, 내 안 깊숙한 곳에 가두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소년과 같은 질문을 하고 모험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헤세는 어딘지 무라카미 하루키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둘은 버전이 다르지만, 1960년대 미국 청년들, 특히 히피즘을 추앙하던 이들 사이에서 헤세가 교본처럼 숭상된 점에서 본다면, 둘은 어딘지 닮았다. 자신을 영원한 소년으로 인식하는 듯한 작가의 생각에서도 역시 닮은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