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원 시집 해설>
성찰의 힘, 삶의 풍경
-허형만 시인. 목포대 명예교수
금동원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을 읽으면서 "시란 자신의 올곧음에 대한 시인의 의식이다"라는 오시프 만델슈탐의 믿음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만델슈탐은 우리에게 시인과 세계가 맺는 새로운 관계를 보여준 러시아 시인이다. 금동원 시인의 시가 어찌하여 만델슈탐을 떠올린다는 말인가. 그 이유는 시인의 「고백에 대하여」 연작 4편이 시인의 의식과 시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분명하게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이 연작 4편은 각각 부제를 달고 있는데, '시인의 말'과 '시작노트' 그리고 '습작으로 시집을 만든 죄', '시를 위한 연가' 등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시인의 말'은 시집을 출간할 때마다 그 시집 앞에서 시인이 하고 싶어 하는 말, 즉 서문이다. 한편 '시작노트'는 등단하기 전에 쓴 습작노트 또는 작품의 초고에 해당할 것이다. 금동원 시인이 이 '시인의 말'과 '시작노트'에 대하여 '고백'한다는 점에 우리의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지금까지 이 두 가지 면을 깊이 성찰해본 시인은 별로 많지 않을 거란 생각에서다.
첫 시집을 내고 나는 시인의 말에 이렇게 썼다.
"부끄러움이 클수록 용기가 커져야 함을 알기에...
사람에게서 사랑을 배운 것처럼 언어로서 삶을 이야기함에 망설이지
않겠습니다. 고백이라는 단어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렵니다.
시가 나를 이해하고 따뜻하게 받아주었듯이
나 역시 시를 위해 평생을 뜨거워하리라 약속합니다."
두 번째 시집을 내고 나는 염치없이 실없이 흘끔대며 세월만 누리고 살았다.
직무유기와 방기에 해당할 것이다.
세 번째 시집을 내면서 나는 시인의 말을 이렇게 쓸 것이다.
"당신을 오랫동안 말없이 껴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말없이 끄덕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새삼 알아버렸습니다.
까무라치거나 죽기 밖에 더 하겠습니까
다시 시작(詩作)하고 싶습니다."
-「고백에 대하여 ‧ 하나」 전문
금동원 시인은 2011년 9월에 두 번째 시집 『마음에도 살결이 있어』(월간문학 출판부)를 출간한 후 4년 만에 세 번째 시집을 출간하게 되었다. 두 번째 시집에도 물론 '시인의 말'이 있다. 그런데 시인은 이 두 번째 시집을 출간한 이후 "염치없이 실없이 흘끔대며 세월만 누리고 살았다. 직무유기와 방기에 해당할 것이다."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곧 시인으로서의 책무에 대한 자아성찰에 다름 아닐 터이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이번 시집의 '시인의 말'에서는 "까무라치거나 죽기 밖에 더 하겠"느냐면서 "다시 시작(詩作)하고 싶"다고 의지를 다진다.
그러니까 이번 시집은 금동원 시인이 그동안의 "직무유기"와 "방기"를 털어버리고 야심차게 드러내 보이는 시집임을 암시한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왜냐하면 이번 시집이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 "오랫동안 말없이 껴안"고, "아주 오랫동안 끄덕"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새삼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이 "다시 시작(詩作)하고 싶"다는 이러한 각오는 이번 시집에만 해당하는가? 아니다. 금동원 시인이 첫 시집 『여름낙엽』의 '시인의 말'에서도 이미 "고백이라는 단어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렵니다. 시가 나를 이해하고 따뜻하게 받아주었듯이 나 역시 시를 위해 평생을 뜨거워하리라 약속합니다."고 고백한 바 있어, 이번 세 번째 시집은 첫 번째 시집의 의지를 다시 한 번 다짐한 셈이 된다.
스무 살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당연히 시를 쓰는 일이다. 그리고 그때 쓴 시를 지금의 눈으로 다시 읽어보는 것이다. 피눈물에 젖어 분서갱유처럼 불태워버린, 청춘만큼 뜨거웠던 나의 시작노트도 돌려받을 것이다. 피 같은 살 같은 미지의 처녀막 같은 내 시작노트를 다시 되찾을 것이다. 스스로에 의해 저질러진 무모한 충동과 자해적 파괴, 몰래 숨겨놓은 사생아처럼 더럽고 불안하고 불편했던 청춘. 나를 일으켜 세우지 못한 채 시간이란 굴레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흘러가고 결과는 참패, 삶이란 그리 특별할 것도 대단하게 신비로울 것도 없는 흘러가는 강물처럼, 지금 누군가 내게 한 가지 소원을 말하라면 바로 그 젊은 날의 비릿한 풋내와 살구 빛 홍조로 가득했던 연두 빛 시작노트를 태우기 직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간절하게 열망하며 빌고 또 빌며 돌아가 보고 싶은 것이다.
-「고백에 대하여 ‧ 둘」 전문
'시작노트'에 관한 시이다. 이 시는 "스무 살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이라는 전제 하에 전개된다. 금동원 시인은 약력에 의하면 올해 50대 중반이고, 40대 초에 등단했다. 다시 돌아가길 열망하는 "스무 살"이란 시인에게 있어 시를 쓰겠다고 잠 못 이루던 습작 시절인, "피눈물에 젖어 분서갱유처럼 불태워버린, 청춘만큼 뜨거웠던 나의 시작노트"의 나이이리라.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젊은 날"엔 어찌 그리도 문학에 병들고, 시에 매달리고, 꿈이란 꿈은 온통 시뿐이었는지. 그랬기에 "비릿한 풋내와 살구 빛 홍조로 가득했던 연두 빛 시작노트"의 시절, 시인은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돌아가고 싶어 하는 간절함을 보여준다. 그 시절로 돌아가서 무얼 하겠다고? 시인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한다. "당연히 시를 쓰는 일"이라고. 우리는 이 대목에서 시인의 갈망이 무엇인가를 짐작하게 된다. 아마도 그것은 '순수' 바로 그것이지 않을까? 맑고 깨끗한, 온전한 시다운 시를 쓰는 일, 그리하여 "분서갱유처럼" 더 이상 불태우지 않아도 좋을 시 쓰기 말이다. 우리는 시인의 이 두 번째 고백에서 절실한 시정신을 읽을 수 있음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렇다면 금동원 시인은 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시를 쓰면 버려라 어느 시인의 말처럼
자꾸자꾸 버리라는 그 말이
시 쓰는 게 신나야지 왼 종일 벌서듯 힘들면
쓰지 말아야 한다는 그 말이
시는 가슴에서 솟구쳐 뿜어대야지 머리를 쥐어짠다고
써지는 게 아니라는 그 말이
시가 뭔지 알기나 하는지
시, 제대로 쓰고나 있는지
시를 왜 쓰고 있는지
목숨 내놓고 쓴다는 게 뭔지 겁먹어는 봤는지
밑천이 바닥난 장사치처럼
본전도 못 건지고 이미 너덜너덜 거덜 난 것은 아닌지
껄렁하게 목청만 돋우는 건달패처럼
이리오고 저리가고 우르르 와장창 소란스럽기만 하고
인물값 하는 시도 없지만
몸값 하는 시도 없는 것을 보면
평생 번듯한 시 하나 쓰기는 그른 것도 같다
소원이라고 다 이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닌 것이다
-「시(詩)」 전문
불가에서 말하길 언덕을 오르려면 뗏목을 버리라고 했다. '사벌등안(捨筏登岸)'의 법이다. 장자는 고기를 얻었으면 통발을 잊으라고 말한다. '득어망전(得魚忘筌)'을 이름이다. 금동원 시인은 "시를 쓰면 버려라"고 일러준 어느 시인의 말을 시에 대한 명상의 마중물로 삼고 있음을 본다. 우리는 동서고금을 통해 '시'에 관한 수많은 정의와 시론을 진저리날 만큼 많이 들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동원 시인처럼 "시가 뭔지 알기나 하는지/시, 제대로 쓰고나 있는지/시를 왜 쓰고 있는지/목숨 내놓고 쓴다는 게 뭔지 겁먹어는 봤는지" 고민해본 시인은 과연 얼마나 될까. 요즘처럼 문예지의 종류도 많고 다양한 속에서 매년 시인들이 새로이 '등단'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여 '시인'이란 이름을 얻는다.
그리하여 문예지마다 등단한 문인을 중심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껄렁하게 목청만 돋우는 건달패처럼/이리오고 저리가고 우르르 와장창 소란스럽기만"하다. 시인은 오늘의 문단 현실을 예리하게 꿰뚫어 보고, 참 시인의 자세와 정신을 다잡고자 한다.
일찍이 이규보는 <시마문(詩魔文)>에서 시마의 다섯 가지 죄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첫째, 세상에서 알아주지도 않는데 붓만 믿고 찧고 까불게 만드는 죄. 둘째, 천기를 누설하면서도 당돌하여 그칠 줄 모르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세상을 놀라게 하는 죄. 셋째, 삼라만상의 온갖 형상을 닥치는 대로 남김없이 옮겨내서 겸손할 줄 모르는 죄. 넷째, 제멋대로 상 주고 벌 주며, 정치를 평론하고 만물을 조롱하여, 뽐내며 거들먹거리는 죄. 다섯째, 목욕을 싫어하고 머리 빗기를 게을리 하며, 공연히 끙끙대고 인상을 써서 갖은 근심을 불러들이는 죄다. 정민 교수의 『한시미학산책』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에서 시마란 놈은 물론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드는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정민 교수는 말한다. 문제는 오늘날 그토록 많은 문예지에 발표되고 있는 작품들이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상태에서 우러나온 시인가 하는 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금동원 시인은 "시가 뭐 길래, 도대체 시 너 뭐 꼬?"(「고백에 대하여* 셋」)라는 화두를 넘어선 "인물값 하는 시" "몸값 하는 시" 그래서 "번듯한 시"일 거라고 믿는다.
금동원 시인의 시에서 우리가 발견한 핵심 중 또 하나는 '너/나' 그리고 '우리'라는 우주 속에서의 삶에 대한 명상이다. '너'라는 모든 대상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감각적, 정서적 세계를 소유한 생명체이다. 이 생명체를 시인은 새로운 자각으로 '나' 안으로 불러들이거나 '나'와 함께 존재하게 하는 힘을 갖는다. 그 힘이 화합의 장으로 이루어질 때 마침내 '우리'가 될 터인데, 이것은 곧 존재에 대한 탐구를 우선으로 한다.
너는 매미고 나는 시인이다
온전한 목소리로 속삭이기엔
고통이 너무 큰 기다림이었기에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다
아득한 세월을 품어온 너의 핏빛 울음이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나의 노래가
똑같은 이름표를 단 뜨거운 가슴이라는 것
처절하고 간절하게
뜨겁고 눈물겨운 우리들의 노래
깊은 곳에서 갓 퍼 올린 듯
신선하고 맑았으면, 이 노래가
혼절할 듯 온몸을 던져 몰아쉬는 숨소리
텅 빈 껍데기로 쌓여가는 우리들의 8월이 지나간다
노래는 늘 어렵고
시는 언제나 깊은 강 저편에 있다
-「8월의 노래」 전문
참 신비로운 일이다. 매미와 시인의 동일성을 찾아내는 시인의 정신세계는 가히 일품이다. "너는 매미/나는 시인"과 "너의 핏빛 울음/나의 노래"가 "똑 같은 이름표를 단 뜨거운 가슴이라는 거"에 도달하면, 이제 "너/나"는 없어지고 우주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처절하고 간절하게 뜨겁고 눈물겨운 우리들의 노래"가 되는 이 생명성을 무엇으로 설명할까. 매미(너)나 시인(나)의 공통점으로 "혼절할 듯 온몸을 던져 몰아쉬는 숨소리"면 이 생명성이 설명되지 않을까. 시인에게 '너'라는 대상은 한사코 여기의 "매미"뿐인가. 아니다. 좀 더 확장시켜 보자. 또 다른 시 한 편, 즉 「변화의 뜻」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이 시의 "신호등 앞 건널목으로 위태롭게 걸어오는/ 너는 누구냐"에서 "너"는 곧 비둘기이다. 요즘 도회지에서 "보도블록 틈에 떨어진 썩은 먹이를 찾아/풍선처럼 부풀어있는 몸은 이미 과체중"인 비둘기를 인간들은 닭둘기라고 폄훼한다. 이처럼 "자유와 평화라는 퇴락한 상징"이 되어 버린 비둘기"를 보고 있는 "나"는 "내가 누구였는지 궁금해 할 틈이 없다"고 자조한다. 결국 이 시대의 "불길하고 무거운 회색빛 우울" 속에서 비둘기나 인간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말이 된다. 이 얼마나 비참한 현실인가. 그러나 역시 시인은 희망을 염원하는 자이다. 이 시 마지막에서 시인은 그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내가 살 곳은 저 높고 푸른 하늘
의심하지 말자
눈물 흘리지 말자
쪼그리고 앉아 일어 설 줄 모르는
허리를 세우고 어깨를 펴고
두 팔 힘껏 펼쳐 껑충 뛰어 올라
아, 난다, 날고 있다
드디어 유유히 날아오르고 있다
-「변화의 뜻」 5연
마르셀 레몽은 우리에게 묻는다. "시인이란 서로 다른 인간들을 화해시키고 삶에 의미를 주는 사람이므로 나는 시의 뚜렷한 존엄성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가?". 아울러 이렇게 다짐까지 받는다. "인간이 여전히 생명을 부지하고 살며 기쁨을 믿으며 희망에 집착하며 - 마치 "깊은 숲속에서 길을 잃은 사냥꾼의 부르는 소리"처럼 - 충만함을 찾아 헤매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면, 시인은 항상 인간의 옆에서 욕망을 자극하고 또 그 욕망을 다스려주는 맑은 물을 가져오는 자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왜 새삼스레 마르셀 레몽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가. 그것은 금동원 시인의 시, 「변화의 뜻」에서 삶에 대한 '변화'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의 마지막 5연에서 비둘기는 이제 더 이상 "너"가 아니고 "나"라는 동일성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음에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작품에서는 "너/나"는 하나가 아니다. 희망이 아니다. 왜일까? 작품을 먼저 보기로 하자.
나 아닌 것은 모두 너다
조심스레 다가가보지만
비무장지대의 지뢰밭을 딛는 공포의 거리만큼
넘을 수 없는 산
건널 수 없는 강
내가 네가 될 수 없고 네가 내가 될 수 없는 것은
표정 없는 침묵 때문이다
너만의 침상에 누워
밖에서는 절대 열 수 없는 무한철벽(鐵壁)
마음의 퍼즐을 맞추지 못하면 절대 열리지 않는 문
너는 누구냐
눈빛은 눈빛을 응시하지 못하고
시선은 늘 허공, 밖을 향해 언제든지 발포 가능한
가장 날카로운 의심과 의문의 부호들로 위기일발 총알은 장전 완료
페이스 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블로그, 카스토리, 로그인과 친구 수락,
비밀번호와 공인인증서 암호를 해독하는 날
관음(觀陰)의 문은 자동적으로 열리리라
-「타인의 방」 전문
이 섬뜩한 현실 비판을 보라. 이게 현대인의 삶이며, 관계이다. 얼마나 비참한가. "나 아닌 것은 모두 너"라는 명제 앞에 그게 아니라고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내가 너에게 "조심스레 다가가보지만" "비무장지대의 지뢰밭을 딛는 공포의 거리만큼" 느껴졌을 때의 거리감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일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네가 될 수 없고 네가 내가 될 수 없는" 이 뼈아픈 인식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던 "너/나"의 관계와 아주 동떨어진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표정 없는 침묵" 그리고 "밖에서는 절대 열 수 없는 무한철벽(鐵壁)" 때문이다. 이건 상상이 아니다. 현실이다. 그 현실을 시인은 마지막 3연에서 자세하게 증명해 보인다. 현대인에게 없으면 못 산다는 현대문명의 기기들이 '너/나'의 관계를 비정상적으로 유도하고 있는 현실을 시인은 고발한다. "관음(觀陰)의 문"이 상징하는 현대인의 타인의 방을 시인은 적나라하게 고발하면서 결론적으로 "나 아닌 것은 모두 너"가 아니고, "내가 네가 될 수 없고 네가 내가 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해법은 있다는 암시를 던져주고 있다. 이와 같은 경우가 "친구가 쓸쓸하다고 말한다/나도 쓸쓸하다고 말했다/(...)'쓸쓸하다'를 백번만 읊으면/쓸쓸하다는 생각을 잊어버린다"(「쓸쓸하다」)의 경우, 그리고 "너는 너의 길을 가고/나는 나의 길을 가고/(...)너는 너 뜻대로 살고/나는 내 뜻대로 살고/(...)우리가 꿈꾸는 영혼의 자유는/두려움 없는 용기와 지금 이 순간, 여기!"(「내 안의 조르바」)의 경우에도 모두 해당된다. 그러면 이제 '너/나'의 간극을 좁히고 '우리'가 되는 과정을 금동원 시인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란히 걸어가는 숲길은 사려깊다
웃음과 웃음이 섞여 따뜻하고
가슴에 새겨지는 반짝이는 별빛
눈으로 웃고
마음으로 보면
사람 냄새 가득한 재잘거림이 종소리 같고
너와 내가 사라진 공간에는
우리라는 이름의 친구가 생겨
소박하게 터벅터벅 맑고 향기롭게
홀로 걷는다 해도 이 길 외롭지 않다
-「동행1」 전문
제주도 사려니 숲길에서의 명상이다. 아닌 게 아니라 사려니 숲길을 혼자 걸어도 좋지만 동행이 있어 나란히 걸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 "사려깊"은 숲길에서 "웃음과 웃음이 섞여 따뜻"함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응당 "너와 내가 사라"지고 "우리라는 이름의 친구가 생"길 터이다. 그러기에 보라. "너와 내가" 비로소 "우리"라는 "맑고 향기"로운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사실, 강화도에서 "우리는 우주의 한가운데 서 있다"(「되돌이표」)는 사실을 시인은 체험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다른 공간의 다른 시간에서/같은 공간의 같은 시간에서/다른 공간의 같은 시간에서/같은 공간의 다른 시간에서"(「우연의 그림 앞에서」) 느끼는 "우리", 선정(禪定)과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번개와 천둥」)를 갈망하는 "우리"라는 시인의 합일정신은 현대인들의 정신을 깨우치는 중요한 덕목으로 칭찬 받을 만하다. 결론적으로 금동원 시인의 성찰의 힘은 모든 삶의 풍경들을 세상에 내보이되 그것은 곧 따뜻함과 희망이라는 점에서 요즘 우리 시단이 갈망하는 덕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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