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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테레즈 데케루/ 프랑수와 모리아크

금동원(琴東媛) 2017. 12. 19. 22:10

 

『테레즈 데케루』

-프랑수와 모리아크/ 조은경 역/펭귄클래식코리아

 

  진실의 추구에서 빚어지는 불안과 혼란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테레즈 데케루』. 이 책은 가족과 가정에 갇혀 숨 막혀 하던 한 이지적인 여인이 남편을 독살하려 시도했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프랑수아 모리아크가 청년 시절에 법정에서 목격했던 사건을 기초로 쓴 것이다. 결혼, 가정, 사회의 금기들에 반항하는 테레즈라는 인물을 통해 모리아크는 인간의 내적 욕구와 마음속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범죄 본능을 묘사하며 진실의 추구에서 빚어지는 불안과 혼란을 선명히 그려냈다.

  자유를 억압하는 숨 막히는 집안 분위기 속에서 남편의 몰이해와 의사 단절로 인해 고통 받으며 살아가던 테레즈는 남편을 독살하기 위해 그가 상용하는 심장병 약 속의 비소량을 조금씩 늘린다. 하지만 비소의 양이 지나치게 늘어난 처방전을 수상히 여긴 약제사의 제보로 독살은 미수에 그치고 만다. 체포된 테레즈는 체면을 중시하는 집안사람들의 허위 진술 덕분에 공소 기각 판결을 받고 풀려나지만, 평생 동안 의좋은 부부를 연기하며 유폐 생활을 할 것을 강요당한다. 절대 고독 속에서 테레즈의 생명은 서서히 좀먹어 들어가는데…….

 

작가 소개

Francois Mauriac 프랑스 소설가. 1885년생으로, 1909년에 시집 '합장'을 발표하면서 데뷔했다. 보르도 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문학 공부를 하면서부터 세인의 주의를 끌기 시작했으며, 제1차 대전 때 위생병으로 징집되었다가 돌아온 후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전개했다. 『나병 환자에의 키스』를 출간하면서 소설가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1925년에는 『사랑의 사막』으로 아카데미 소설상을 받기도 했다. 1925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3년 후에는 영국의 드 골 수상으로부터 레지온 드 누르 훈장을 받았다.

 

  출판사 리뷰

 

  그의 작품은 영혼을 파고드는 분석과 예술적 강렬함으로 인간의 삶을 해석해 냈다.
  _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

 
   모리아크의 가장 유명한 여주인공의 운명을 그리고 있는 소설 『테레즈 데케루』와 그 속편인 『밤의 종말』이 펭귄클래식에서 출간되었다. 모리아크는 스물한 살 때 보르도 중죄재판소에서 본 독살을 시도한 여인을 통해 작중 인물을 창조해냈고 피고석에 선 여인의 파리한 얼굴에서 영감을 받아 가족과 가정에 갇혀 숨 막혀 하던 한 이지적인 여인이 남편을 독살하려 시도했던 비극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 작품에서 모리아크는 예리한 필치와 시간의 구성을 뒤집는 환상적인 문체로 사랑의 부제와 신을 잃어버린 인간의 고뇌를 그려냈다. 끊임없이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벌어지는 음울하고 준엄한 이 한 편의 심리드라마는 젊은 부인에 의한 남편의 독살 미수가 외형적 줄거리이지만 그 속에는 인간의 외적 행위로 표출되지 않은 내면의 범죄의사에 대한 치밀한 분석이 담겨 있다. 모리악은 이 소설을 통해 예술에 있어서 원숙한 경지에 도달했다는 평가를 얻었다. 눈에 띄지 않는 내적 욕구나 우리의 마음속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본능을 묘사함으로써 진실의 추구에서 빚어지는 불안과 혼란을 그리고 있다.

  평생 모리아크를 떠나지 않았던 여인 테레즈

『테레즈 데케루』를 발표하고 나서도 테레즈는 모리아크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니코틴으로 누렇게 변색된 손톱, 삭은 얼굴을 가진 이 여인은 모리아크의 곁에 머물러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주장했다. 그는 단편 「의사의 집에서의 테레즈」,「호텔에서의 테레즈」를 쓰고 1935년 『밤의 종말』을 써서 자신의 여주인공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부여하길 원했다. 모리아크는 그의 가련하고 슬픈 주인공을 사랑했다. 그는 남편을 독살하려 했던 테레즈 데케루를 사랑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그녀를 사랑하도록 만든다.

  “그녀는 물론 나 자신은 아니다. 나 자신이었다면 플로베르가 ‘보바리 부인은 바로 나다.’라고 말한 의미로 그렇지 않을까. 그녀는 나의 대척점에서 한 걸음 이상 더 멀리 있지만, 그럼에도 내 안에서 내가 극복하고, 돌아가거나 무시해야 하는 모든 것들을 바탕으로 창조되었다.”
_모리아크

  삭막한 자연 환경과 그 안에 유폐된 인간, 정열과 허무 사이의 대비

  비극적인 분위기에서 작중 인물들은 현명하게 구성된 리듬에 따라 각자의 운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모리아크의 소설은 이야기 줄거리의 긴장감이기보다는 감정의 긴장감에 의해 정의된다. 모리아크는 능란한 기법으로 작중 인물들의 내면적 갈등을 깊이 있게 그려주고 있으며 줄거리에서 사건들은 이 내면적 갈등의 기회를 제공하는 기능으로써만 존재한다. 작가는 독자들이 주인공들의 외관상의 이야기보다는 가정과 각 개인의 내부에서 멸시와 증오, 사랑의 내적인 심연의 발견하길 원했고, 주인공들 저마다의 비극, 징벌, 구원을 점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시간의 팽창과 수축 현상이 교차되는 가운데, 줄거리 내부에서의 시간 처리는 속도의 변화를 나타내며, 이야기의 흐름은 속도 변화에 얽매인다. 또한 구성의 능란한 솜씨와 엄격성에 분위기의 강렬함이 결합되어 있다. 모래, 랑드 지방과 가느다란 소나무들의 고독하고 혜택을 받지 못한 배경 위에서 부각된다. 작가는 비극적 배경을 테레즈의 마음속에서 행하여지는 비극에 대유법적으로 접근해 어떻게 한 존재가 어린 시절의 순수성으로부터 범죄에로 미끄러져 들어갔는지 보여주고 있다.

   

  ○[강신주의 편집자팩토리] 중에서

 
  결국 ‘야심’은 타인의 시선에 집착하는 속성으로 귀결되므로 우리말에서 ‘명예욕’과도 연결됩니다. 『테레즈 데케루』를 읽으면서 이 명예욕이 어떻게 소통의 가능성을 차단하는지 보겠습니다. 베르나르와 테레즈의 결혼은 사실 유력 가문이 재산을 지키는 방식이었습니다. “그 고장 사람들은 모두 둘의 재산이 하나 되는 것이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해 두 사람의 결혼을 바랐다. 똑똑한 청년인 베르나르도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직 결혼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테레즈의 심경은 이러했습니다.
 
 
   어쩌면 결혼을 통해 지배욕이나 재산 욕심보다는 피난처를 찾았는지도 모른다. 그녀를 결혼으로 몰아붙인 것은 공포감이 아니었을까? 실리적인 소녀이자 가정적인 딸이었던 그녀는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 최종 자리를 찾는 것을 서둘렀었다. 그녀는 뭔지 모를 위험에 대항해 안정을 찾고자 했다. 약혼 시절만큼 그녀가 이성적으로 보였던 때도 없었다. 그녀는 새로운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뿌리를 박고, ‘자기 자리를 잡았’으며 관습을 따르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구원했다.
 
  ―프랑수아 모리아크, 『테레즈 데케루』에서

 

   테레즈는 극장에서 함께 본 공연이 외설스럽다며 외국인들이 이런 걸 보면 프랑스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고 화를 내는 남편의 가식적인 성격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이렇게나 정숙한 남자가 한 시간도 못 돼서, 어둠 속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이란 행동은 모두 그녀에게 하리라는 사실에 테레즈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들의 결혼생활은 어떻게 될까요? 『감정수업』에 싣지 못한 아까운 글을 이번 기회에 읽어 보겠습니다.  
 
 
  어쩌면 부부 사이의 파탄은 테레즈가 바보처럼 순진해서 벌어진 비극인지도 모른다. 테레즈는 남편 베르나르를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테레즈는 참담한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남편 베르나르는 테레즈라는 한 여성을 좋아해서 결혼한 것이라기보다는, 돈 많고 잘나가는 정치가의 딸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렇지만 테레즈는 이런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일까. 어쩌면 테레즈가 남편 베르나르를 독살하려고 했었던 것은 가문과 가문 사이의 결합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결합을 되찾으려는 절망적인 노력에서 나온 몸짓이리라. 프랑수아 모리아크가 자신의 소설 테레즈 데케루』를 통해 우리에게 묻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일체의 외적인 조건과는 무관한 오직 두 사람만이 기쁨으로 충만한 사랑은 불가능한 것일까?
 
 
   독살이 미수에 그친 뒤, 양가 가문은 모두 사태를 미봉하려고 애쓴다. 상황은 테레즈가 가장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 버린 것이다. 사실 테레즈가 원했던 것은 사랑 없이 영위되는 부부 관계로부터 탈출하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두 가문은 테레즈의 사랑과 행복 따위에는 아랑곳없이 가문의 명예만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러니 애초에 이혼도 불가능한 일이었고, 심지어 남의 눈을 의식해서 별거마저도 힘들었다. 독살 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명예 실추라고 믿고 있던 사람들 틈에서 그녀는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가식적인 삶만 이어지는 지옥 같은 나날 끝에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파리 행 허락을 받아 혼자 살 수 있게 된다. 바로 이때 남편 베르나르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왜 자신을 죽이려고 했느냐고 질문한다. 사실 독살로부터 기적적으로 살아난 남편 베르나르는 아내가 집안의 재산인 소나무 숲을 독차지하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고 오해할 정도로 속물이었던 사람이다. 
 
 
  과연, 명예만을 추구하던 남편이 이제서야 테레즈의 내면과 직면하여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것일까? 불행히도 테레즈가 자신의 속내를 이야기하는 순간, 베르나르는 아내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속물의 눈에는 속물만 보이는 법. 어떻게 베르나르가 테레즈의 순수한 욕망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처음으로 남편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그렇게 덧없는 것으로 판명되는 순간, 테레즈는 이제 정말로 완전히 남편을 포기해 버린다.
 
 
 “나는 솔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요. 내가 당신에게 하는 이야기는 왜 다 거짓처럼 들리는 걸까요?
  “목소리 낮춰요. 우리 앞에 있는 신사가 뒤돌아보잖소.
  베르나르는 이 순간을 끝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 미친 여자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 여자는 사소한 면 하나하나까지 기꺼이 따져 보고자 할 것이었다. 테레즈 역시 이 남자가 한순간 가까워지는 듯하더니 다시 영원히 멀어져 버린 것을 알고 있었다.
 
 
  테레즈의 절망이 안타깝기만 하다. 명예만 눈에 보이는 남편의 눈에 진정한 인간 사이의 유대와 사랑을 꿈꾸는 아내는 ‘미친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하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제 테레즈에게 남편도 ‘미친 남자’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불쌍한 테레즈를 절망하도록 만든 남편 베르나르의 내면세계는 마지막 대화에서도 그 빛을 발하고 있다. “목소리 낮춰요. 우리 앞에 있는 신사가 뒤돌아보잖소.” 이것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을 절망시키는 명예욕이란 감정의 실체다. 지금 베르나르는 아내의 분노보다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더 의식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사랑을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 베르나르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아내의 절망보다는 오히려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의 여부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명예욕이다.
 
 
   명예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제3자의 시선만을 의식하기 마련이다. 결국 베르나르와 같은 사람이 나와 너 사이의 관계, 즉 사랑의 관계에 몰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언젠가 현대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도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은 둘의 관계”라고 말이다. 나와 너를 제외하는 일체 모든 것이 배경으로 물러가지 않는다면,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슬픈 것은 우리도 점점 테레즈가 아니라 베르나르가 되어 가고 있다는 현실 아닐까? 애인을, 부인을, 그리고 남편을, 혹은 아이를 사랑하는 짝의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3자의 시선을 통해서 바라보려고 하니까 말이다. “오늘 옷이 왜 그러니. 너무 눈에 띄잖아.” “좀 조용히 말해요. 옆 사람들이 힐끗거리잖아요.” “성적이 이게 뭐니, 창피하게.” 아,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명예욕에 사로잡히는 순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제2의 테레즈, 3의 테레즈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여자

  유부만두 | 2014-02-18 |blog.yes24.document/7593169

   주인공 마나님 테레즈 데케루의 권태와 범죄 사이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그저 그녀는 "본질적인 테레즈"를 원했고, 무심한 남편 베르나르가 견딜 수 없었으며 강요된 모성이 끔찍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녀의 범죄는 뭔가를 흉내낸 기분이 들었고, 김형경의 담배 피우는 여인 처럼, 테레즈는 손가락이 누렇도록 담배를 피워대다 시트에 구멍을 낼 뿐이다. 이 여인은 아무것도 안한다. 책을 좀 읽었다지만 그녀의 독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플래시 백으로 보여지는 회상 장면은 영화 장면처럼 생생하지만 툭툭 끊어지는 그녀의 기억처럼 테레즈는 별 의욕이 없다. 차라리 안나 카레리나 처럼 연애을 확실하게 하던가, 테레즈 라캥 처럼 바닥을 치던가, 보바리 처럼 상류 사회의 로맨스를 꿈꾸던가.... 이도 저도 아닌 마나님의 한숨은 답답하기만 했다. 언뜻 지나가는 열여덟살 여드름 남자의 이름도 장 아제베도. 전혜린이 애닲게 부른 그 이름 처럼 이 책은 그저 현실이 따분한 여인의 푸념인가 싶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 숲을 떠올리면서 혼자 가고싶은 대로 걷는 테레즈는 사실 아무것도, 아무도 필요하지 않은 여인이다. 모리아크가 쓴 나머지 테레즈 연작은 읽지 않으려한다.  파리에서, 아니면 다시 고향에서, 그녀가 살아있는 숲을 생각하며 혼자 잘 살아낼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