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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릴케 후기 시집

금동원(琴東媛) 2018. 1. 28. 23:52


릴케 후기 시집』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저  | 문예출판사 |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소설가 토마스 만과 더불어 독일 현대문학에서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시인이다. 독일 서정시를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전 세계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문예출판사에서는 이런 릴케의 시를 편의상 전기 작품과 후기 작품으로 나눠 2014년 4월 《릴케 시집》을 출간한 데 이어 후기 작품에 속하는 시 108편을 추려 ‘릴케 후기 시집’이라는 타이틀로 이번에 출간하게 되었다.

  《릴케 후기 시집》에서는 조각품처럼 그 자체가 독립된 하나의 우주를 형성하고 있는 ‘사물 시事物詩’를 그린 《새 시집》, 《두이노의 비가》의 전주곡이자 인간과 사물의 무상함을 느끼고 존재의 의미를 묻는 ‘《새 시집》 이후의 시’, 릴케의 작품들이 형성하는 산줄기에 우뚝 솟은 두 개의 봉우리인 《두이노의 비가》와 《오르페우스에게 보내는 소네트》 그리고 마침내 그가 도달한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밝고 순수한 새로운 경지를 만날 수 있는 ‘후기의 시’들을 통해 릴케의 고뇌와 성장을 엿볼 수 있다.




  ○작가 소개

 

  Rainer Maria Rilke 1875년 프라하에서 미숙아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르네 카를 빌헬름 요한 요제프 마리아 릴케다. 릴케의 어머니는 릴케의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르네Rene라 짓고, 여섯 살까지 딸처럼 키웠다. 열한 살에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지만 적응하지 못한다. 이후 로베르트 무질의 첫 장편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의 배경이 되는 육군고등사관학교로 옮기나 결국 자퇴한다. 1895년 프라하대학에 입학하고서 1896년 뮌헨으로 대학을 옮기는데, 뮌헨에서 릴케는 운명의 여인 루 살로메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평생 시인으로 살겠다고 결심한다.


  살로메의 권유로 르네를 독일식 이름인 라이너로 바꿔 필명으로 사용한다. 1901년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와 만나 결혼한다. 1902년 파리에서 로댕을 만나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삼는다. 클라라와 헤어진 릴케는 로마에 머무르며 《말테의 수기》를 완성하였으며, 이후 1911년에 마리 폰 투른 운트 탁시스-호엔로에 후작 부인의 호의로 두이노 성에서 겨울을 보낸다. 이곳에서 바로 전 세계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될 릴케 만년의 대작이며 10년이 걸려 완성할 《두이노 비가》의 집필을 시작한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릴케는 스위스의 뮈조트 성에 머무는데, 이곳에서 그는 폴 발레리 등과 교유하며 여생을 보낸다. 발레리의 작품을 독어로 번역하고 또 직접 프랑스어로 시를 쓰던 시인은 1926년 백혈병으로 스위스의 발몽 요양소에서 죽는다



  ○역자: 송영택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독문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강사를 역임했다. 시인으로 등단해 활동하고, 문인협회 이사를 역임했다. 지은 작품으로는 시집 《너와 나의 목숨을 위하여》가 있고, 옮긴 작품으로는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릴케 《말테의 수기》, 《어느 시인의 고백》, 《릴케 시집》, 헤세 《데미안》, 《게르트루트》, 《지와 사랑》,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시집》, 힐티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쇼펜하우어 《삶과 죽음의 번뇌》, 레마르크 《개선문》 등이 있다.



  ○목차



  새 시집
  새 시집 이후의 시
  두이노의 비가
  오르페우스에게 보내는 소네트
  후기의 시

  해설 :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세계




  ○책 속으로


  표범
  파리, 식물원에서

  지나가는 격자 때문에 지쳐버린 표범의 눈은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눈에는 수많은 격자가 있는 것 같고,
  그 격자 뒤에는 세계가 사라지고 없는 것 같다.
  더없이 작은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유연하고 늠름한 발로 자늑자늑하게 걷는 걸음새는
  하나의 커다란 의지가 마비되어 서 있는
  하나의 중심을 둘러싼 힘의 무용 같다.
  다만 때때로 눈동자의 장막이 소리 없이 열리면
  그때 하나의 형상이 들어가서
  사지의 긴장된 정적 속을 지나
  심장에서 문득 사라진다.


  거기 한 그루 나무가 솟아올랐다

  거기 한 그루 나무가 솟아올랐다. 아 순수한 상승이여.
  아 오르페우스가 노래하고 있다. 아 귓속의 우뚝 솟은
  나무여.
  그리고 모든 것이 침묵했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도
  새로운 시작, 암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잠잠한 짐승들이 굴과 둥지를 떠나
  밝은 해방된 숲에서 뛰어나왔다.
  그때 알게 되었다, 그들이 그렇게 조용했던 것은
  책략이나 불안해서가 아니라 듣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울부짖음도 외침도 짝을 찾는 소리도
  그들의 마음에는 별것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노래를 맞아들일 오두막도 없던 곳에,

  하나뿐인 출입문의 기둥이 흔들리고 있는
  어두운 욕망에서 생긴 은신처도 없던 곳에?
  당신은 그들을 위하여 귓속에 신전을 세운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릴케 후기 시집》의 내용과 의미

   *사물 시(事物詩), 그리고 릴케 사후에 발견된 시들 


  릴케의 파리 시절, 언어를 재료로 빚어내는 시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물’처럼 만들려는 시도를 담은 것이 《새 시집》이다.
1903년에서 1908년 사이 릴케의 기념비적 산물이며 로댕과 프랑스 상징파 시인들에게서 커다란 영향을 받은 시들이 실려 있다. 이번 《릴케 후기 시집》에서는 〈표범〉, 〈장미의 내부〉 등 릴케의 대표적인 사물 시들을 만날 수 있다.
‘《새 시집》이후의 시’는 릴케가 사망한 지 30년이 지난 1956년 발견된 120편이 넘는 시들에서 25편을 간추린 것이다. 이 시들은 시기상 《두이노의 비가》와 병행해서 쓰였기 때문에 《두이노의 비가》의 포에지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예술에 의한 예술의 극복, 인간존재의 긍정에 다다르다

  릴케는 6년간 집필하던 《말테의 수기》를 완성한 후 극도의 창작 위기에 빠진다. 재능과 창조적 힘에 대한 회의감 속에서 시인의 길을 접고 의사가 되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던 1912년의 어느 날, 릴케는 바람이 몰아치던 두이노 성의 절벽을 내려가던 중 사나운 바람 소리와 물결 소리에서 들었던 목소리를 길 위에서 적어내려 간다. 〈첫 번째 비가〉의 1행 ‘아무리 내가 소리쳐도 천사들의 서열에서 누가 그것을 들으랴’가 그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두이노의 비가》는 10년 후인 1922년, 인고의 노력 끝에 10편의 연작시로 완성된다.
  《두이노의 비가》에서는 삶의 밑바닥에서부터 긍정을 발견해나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긍정에 다다를 때까지 인간은 존재의 불안정성과 무상함을 극복해야 하는데 ‘무상함’이야말로 인간존재의 기본 특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존재의 긍정을 추구하는 예술 정신의 모습은, 보들레르 이래 내면화의 길을 걸어온 서구 시의 정점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릴케는 《오르페우스에게 보내는 소네트》에서 전설 속 인물 오르페우스를 노래하며 《두이노의 비가》에서처럼 인간존재의 불안을 노래한다. 그리고 동시에 지상 사물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변형해 내면화하는 것이 인간 사명이라 주장하는데, 색채와 형체의 아름다움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귀로 들으려 한다는 점에서 《두이노의 비가》와 차별성을 갖고 있다. 

 

   *‘오라, 마지막 고통이여, 나는 너를 받아들인다.’

  ‘오라, 마지막 고통이여, 나는 너를 받아들인다’는 릴케가 쓴 마지막 시詩의 첫 구절이다. 릴케는 고통과 고독 속에서도 시를 위해 치열하게 모든 것을 바쳤고, 자신의 인생 후반부에서는 마침내 삶과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인간이자 시인의 모습으로 우뚝 서게 된다. 이런 릴케의 모습은 《두이노의 비가》와 《오르페우스에게 보내는 소네트》 이후의 ‘후기의 시’들에서 목가적인 형태로 드러나는데, 이들 시는 세상의 고통과 인간존재의 덧없음으로 고통받는 현대인에게 한줄기 위안과 희망을 발견하게 해준다. 

 

   *아름다운 명화와 함께 삶의 의미를 돌아보는 시간

  《릴케 후기 시집》에는 시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서정적인 풍경을 화폭에 그린 모네, 마네, 세잔, 고흐, 고갱, 쇠라 등의 프랑스 후기 화가들과 인간존재와 내면세계를 표현한 뭉크, 칸딘스키, 고키 등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도 익숙한 화가들의 작품을 함께 수록했다. 이들 명화를 감상하며 독자들은 시와 명화에 대한 이해를 확장할 수 있을 것이며 바쁜 일상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듯 삶의 여유와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독일에서 ‘시인’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릴케를 떠올린다.”
   - 슈테판 츠바이크

 

  “그는 모름지기 시인이었다. 오로지 운문과 산문으로 된 글을 쓰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었다.”
   - 볼프강 레프만




  ○독자 리뷰


 《릴케 후기 시집》

  YOONY | 2015-05-29 |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를 담아낸 이번 책은 《새 시집, 《새 시집》이후의 시, 《두이노의 비가》, 《오르페우스에게 보내는 소네트》와 1956년 발간된 《릴케 전집》제2권에서 1922~1926년 작품 일부를 번역해 후기의 시로 묶어내어 총 다섯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해 귀로 들려준다. 시인의 시선은 아직 눈에 띄지 않지만 어두운 뿌리로부터 빛을 향해 나아가는 나무껍질이 품고 있는 내면의 활기를 응시한다. 어린 것들이 지닌 순수함과 연약함을 사랑하고 바라볼 줄 안다. 그리고 고독으로부터 내면화한 것들을 다시 자연에 빗대어 표현해낸다. 마치 모든 것들 안에 서로가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그의 시에서는 정적이 느껴진다. 어두운 침묵보다는 깊은 비밀을 간직한 고독과도 같은 느낌이다. 정체된 듯 멈춰버린 것 같은 시간이지만 내면에 들어온 외부의 것이 다양한 방법으로 쪼개지고 해석되어 하나의 의미가 되는 과정이 시에 담겨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는 조용하지만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것은 조용하지만 분주히 자신을 쌓아가고 있다. 스페인 삼부작 중 <만약 도시의 군중들이>에서 릴케가 그리는 목자의 일상은 자신의 흔들리는 연약한 내면의 빛을 잠잠하게 해주는 한 사람의 신()과 같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느리지만 꾸준히 쌓아가는 요란스럽지 않은 움직임과 조용한 목소리로 채워진 목자의 하루가 느릿하면서도 순리대로 흘러가는 자연을 닮아 있다.

 

 

  시를 읽는 데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말로 쓰인 시어도 쉽게 다가오지 않는 것들이 많은데, 하물며 원어가 다른 데서 오는 시어의 낯선 느낌은 시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 어려움으로 남는다. 그래서 중간중간 나오는 그림이 우리가 체험하지 못하는 시인의 세계를 잠시나마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는 듯하다. 그중에서도 클로드 모네의 그림은 시인이 바라본 세계를 그려놓은 것 같아 오래도록 눈길이 멈춘다. 또한 릴케의 시는 빛을 머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스름 즈음 빛바랜 벽지에 반사되어 오렌지색을 띠는 빛이 시의 장면마다 필터처럼 끼워져 있는 것 같다. 아직 해가 지지는 않았지만 서서히 밤으로 물들어가는 시간대가 하루 동안 쌓은 경험이 성숙함으로 익어가는 시간으로 비친다.

 

 

  릴케의 시는 이번 책으로 처음 접했지만 릴케가 젊은 시인과 5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주고받은 편지를 묶어낸『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그의 이름을 강렬히 기억하고 있었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사관학교에 입학하지만 시인을 꿈꾸는 젊은이에게 시인은 고독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한다. 하지만 그 당시 릴케의 나이는 고작 28살로 그 또한 고독으로부터 성장하는 법을 배우던 시기였다. 앞선 글과 비교해 젊었을 때는 내면의 고독으로부터 뭔가를 얻고 배우려 했던 시인이 후기의 시에서는 외부에 존재하는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것들에 이끌려 존재의 본질을 표현해내려고 애쓴다. 또한 시인의 고통에도 그 의미가 조금은 달라져 있다. 성장을 향한 유예기간이기도 했던 젊은 시절의 고통에서 쇠락해가는 몸으로 받아들여야 할 죽음을 향한 고통인 것이다. 이 책의 첫 파트인 《새 시집 1902년 조각가 로댕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처음 파리를 방문하며 그의 문학에 중대한 전환점이 된 시기에 쓰인 시들이다. 덧붙여 그가 젊은 시인과 편지를 주고받던 시기와 겹쳐져 시인의 내면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그 흐름을 집어가니 어려움 속에서도 흥미롭게 읽힌다.






 『릴케 시집』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저  | 문예출판사 |



  블론드의 소녀들이 뜨개질을 하며

  블론드의 소녀들이 뜨개질을 하며
  저녁 풍경의 남은 햇빛 속을 걸어갈 때
  그녀들은 모두 여왕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그녀들의 화관花冠을 엮어 나간다.

  그녀들을 둘러싼 빛은
  커다란 은총?
  그 빛은 그녀들의 몸에서 나온다.
  풀어헤친 밀짚에도
  그녀들의 소녀다운 눈물이 촉촉이 배어들고?
  밀짚은 황금처럼 무겁다. 


  고독

  고독은 비와 같다.
  저녁을 향해 바다에서 올라와
  멀리 떨어진 평야에서
  언제나 적적한 하늘로 올라간다.
  그리하여 비로소 도시 위에 떨어진다.

  밤도 낮도 아닌 시간에 비는 내린다.
  모든 골목이 아침을 향할 때,
  아무것도 찾지 못한 육체와 육체가
  실망하고 슬프게 헤어져 갈 때,
  그리고 시새우는 사람들이 함께
  하나의 침대에서 잠자야 할 때,

  그때 고독은 강물 되어 흐른다…….---본문



  ○출판사 리뷰


  구도자의 삶을 위안한 고독한 영혼,
  릴케의 불멸의 시를 아름다운 서양 명화와 함께 만나다.


  *모든 시인 중의 시인, 릴케

  윤동주는 <별 헤는 밤>에서 별 하나에 릴케의 이름을 붙여주었고, 김춘수는 <릴케의 시>라는 시를 지어 릴케를 기리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김수영은 릴케를 ‘시인 중의 시인’이라 극찬한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릴케론>을 외워서 읊을 정도라고까지 말했다. 이처럼 릴케 시는 우리나라 문학계를 이끌어온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시인으로, 지금도 여러 사람에게 많은 시가 애송되고 있다. 


   “아, 하지만 시라고 하는 것은 너무 어린 나이에 쓰면 보잘것없는 것이 되고 만다. 사람은 평생을 두고, 가능하면 오래 살아, 우선 꿀벌처럼 꿀과 의미를 모아들여야 하며, 이를 거름 삼아 아마 삶의 끝에 가서 열 줄 정도의 좋은 시를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시라는 것은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듯이 (젊었을 때 넘치도록 갖는 그러한) 감정이 아니라 체험이다. 한 줄의 시구를 얻기 위하여 많은 도시, 온갖 사람들, 그리고 여러 가지 사물을 알아야만 한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추억이 우리의 가슴속에서 피가 되고, 눈길이 되고, 또 몸짓이 되어, 더 이상 우리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이름이 없어졌을 때 비로소 아주 진귀한 순간에 그 추억의 한가운데에서 시구의 첫마디가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릴케가《말테의 수기》 안에서 밝힌 시인의 창작 과정은 이처럼 삶 전체와 세계,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난한 통찰과 관조를 바탕으로 한다.


   * 아름다운 명화와 함께 감상하는 릴케의 시

  이번에 문예출판사에서는 이런 릴케의 시적 창작의 흐름을 엿볼 수 있도록 릴케의 시대별 시집 네 권을 하나로 묶어 《릴케 시집》으로 출간했다. 《릴케 시집》에는 동경과 환상, 불안, 꿈과 순수한 사랑을 소박하게 그리고 있는 《첫 시집》과 소녀를 주제로 해 섬세한 직관과 깊은 이해력을 보여준 《초기 시집》, 초월적인 존재를 향한 시적 화자의 겸손함과 자기희생을 오롯이 담은 《시도서(時禱書)》, 조각가 로댕의 영향을 받아 일시적이고 덧없이 변화하는 존재의 물질적 특성을 벗기고 존재의 형태를 영원한 것으로 형상화시킨 《형상 시집》이 한데 묶여 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유럽 예술계에 지배적이었던 사조인 유겐트슈틸에 영향을 받은 릴케는 소녀, 꽃, 연못, 천사 등의 소재를 이용해 잡다한 일상에서 멀리 떨어진 순수의 세계, 심미적 가상의 세계를 언어로 창조했다. 시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력과 감동의 정도를 더하기 위해 이번 《릴케 시집》에는 청초하고도 서정적인 풍경을 화폭에 그려낸 모네, 르누아르, 마네, 세잔, 고흐 등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들을 비롯해, 내면의 고독과 철학 세계를 표현한 뭉크, 모딜리아니, 클레 등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도 익숙한 유럽의 유수한 여러 화가들의 작품을 함께 수록했다. 명화를 통해 시의 언어를 머릿속에 그려보고, 시를 통해 아름다운 이미지를 연상해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어서 문학과 미술에 관심이 깊은 독자들의 흥미를 끌 만하다. 

 

   릴케는 죽음에 임박해 <묘비명>이라는 시를 썼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 그리도 많은 눈꺼풀 아래 / 누구의 것도 아닌 잠이고픈 마음이여.”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는 속설 때문에(실제로는 사실이 아니다. 릴케는 백혈병 악화로 사망했다.) 릴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인 장미는 이처럼 그의 시작 인생 전반을 관통하며 그의 죽음까지도 장식한다. 그는 일평생 장미의 꽃잎파리를 한 장 한 장 떼어내듯이 시 작품을 완성해 보여주었다. 자아의 고독과 소외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삶과 죽음, ‘나’와 ‘존재’가 무엇인지 치열하게 관조해 아름다운 언어 안에 잡아둔 릴케의 시는 그를 20세기의 최고 시인이자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