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없는 세대』
볼프강 보르헤르트/ 김주연 역 /문학과 지성사
암울했던 한 시대에 대한 처절한 고백을 담은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작품집 『이별 없는 세대』(김주연 옮김)가 새롭게 리뉴얼된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젊음의 가장 찬란하던 시기, 역사는 보르헤르트를 참혹한 전쟁터로, 감옥으로 내몰았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죽음을 앞둔 2년 남짓의 짧은 기간 동안 병상에서 씌었으며, 그 작업이 바야흐로 궤도에 오를 즈음 그는 표표히 떠나버렸다. 스물여섯 해의 짧은 일생이었지만, 다행히 그의 언어는 오래도록 우리에게 남아 살아 있다.
이 책 『이별 없는 세대』는 이렇듯 요절한 천재 작가 보르헤르트가 남긴 작품 가운데 스물다섯 편의 단편과 열네 편의 시를 선별하여 묶은 것으로, 1975년 처음 국내에 소개되어 2000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재출간되었으며 이번에 세번째로 새롭게 리뉴얼되어 독자들 앞에 선보이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겪은 자신의 체험과 전후에 목격한 전쟁의 참상을 형상화한 그의 작품은, 전쟁이 초래한 인간의 절망적 상황을 격정적으로 그려내며 당시 폐허가 된 독일은 물론이요 동시대인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전하는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 세상의 절망과 불의에 저항하는 크나큰 외침은 시대를 초월해 여전히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작가 소개
볼프강 보르헤르트
독일 함부르크의 에펜도르프에서 태어났다. 열다섯 살에 시를 쓰기 시작해 고등학교 시절 함부르크의 유력 일간지에 시를 발표하고, 졸업 후에는 서점 직원으로 일하며 연극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불온한 시를 쓴 혐의로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신문을 받기도 한 그는, 1941년 7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징집되어 그해 12월 동부전선 칼리닌의 겨울전투에 참전한다. 군 복무 중 자해 혐의로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감옥과 전장을 오가는 가혹한 생활로 인해 병을 얻는다. 복무불능 상태로 전역해 전선극장에 배치될 예정이었지만 몇몇 동료들이 전역 하루 전날 제국 선전장관 괴벨스를 조롱했다고 밀고해 미결수로 구금된다. 1945년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로 이동 중에 탈주해 함부르크로 돌아와, 함부르크 극장에서 조감독으로 활동하지만 악화된 병으로 결국 쓰러지고 만다. 그 후 보르헤르트는 죽음을 예감한 듯 세상을 뜨기 전까지 2년 동안, 병상에서 여러 시와 산문, 희곡 「문밖에서」를 집필한다. 1947년에 완성한 「문밖에서」는 ‘공연하려는 극장도 없고 보려는 관객도 없는 하나의 작품’이라는 부제와는 달리, 방송극으로 만들어져 독일 국민의 엄청난 호응을 얻는다. 보르헤르트는 그해 11월 20일 스물여섯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보르헤르트의 산문은 『민들레』『이번 화요일에』라는 이름의 산문집으로, 시는 『가로등, 밤 그리고 별들』로 엮어 출간되었다.
스스로 체험한 현실을 생생하게 담은 그의 글은 전쟁과 물질문명, 기성세대에 대한 절망과 거부감을 응축되고 간명한, 직접적인 일상 언어로 묘사한다. 보르헤르트는 하인리히 뵐, 한스 베르너 리히터 등과 함께 ‘폐허문학die Trummerliteratur’으로 알려진 전후 독일문학 흐름의 선두에 있었으며, 이후 ‘47그룹’으로 불리는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역자: 김주연
194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버클리대학과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독문학을 연구했으며, 1966년 『문학』에 「카프카시론」이 당선되면서 문학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계간 『문학과 지성』 동인으로 활동해 왔으며, 1978년부터 2006년까지 숙명여자대학교 독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또한 독일 뒤셀도르프대학 객원교수, 한국독어독문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김환태평론문학상, 우경문화저술상, 팔봉비평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2004년에는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이며, 한국문학번역원 원장으로 있다.
지은 책으로 『상황과 인간』, 『문학비평론』, 『변동사회와 작가』, 『고트프리트 벤 연구』, 『독일시인론』, 『새로운 꿈을 위하여』, 『문학을 넘어서』, 『문학과 정신의 힘』, 『독일문학의 본질』, 『독일학 연구』, 『문학, 그 영원한 모순과 더불어』, 『김주연평론문학선』, 『사랑과 권력』, 『가짜의 진실, 그 환상』, 『디지털 욕망과 문학의 현혹』, 『근대 논의 이후의 문학』, 『인간을 향하여 인간을 넘어서』, 『독일 비평사』 등이 있다
○책 속으로
거기 그렇게 그들은 웅크리고 있었다. 유혹적이고도 비루한 삶에 맥이 풀려 늘어져서. 부두와 돌길 귀퉁이에 반쯤 누운 듯 웅크리고 있었다. 방파제와 움푹 팬 지하 창고 계단에, 교각과 부교 위에, 잿빛 먼저 쌓인 거리 인생의 나뒹구는 낙엽과 은박지 사이에 반쯤 누운 듯 웅크리고 있었다. 까마귀들이? 아니, 인간들이! 내 말 들리는가? 인간들 말이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은 팀이라고 불렸고 그는 빨간 목도리를 주고 릴로를 사랑했다. 그런데 지금, 지금 그는 그녀를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까마귀들은, 까마귀들은 까옥거리며 제 집을 찾아간다. 그들의 까옥 소리가 적막하게 저녁 하늘에 머물러 있다. --- p.49
그대들이여, 우리에게 우리 마음이 침묵한다고 해서 우리 마음에 말할 소리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 마음은 만남도 이별도 모두 입에 담지 않을 뿐이다. 만약 우리 마음이 우리가 겪은 모든 이별에 애태우고 슬퍼하고 위로하며 피 흘린다면 우리는 그대들에 비할 수 없이 많은 이별을 해야 할 터이니, 우리의 예민한 마음이 내지르는 비명이 너무도 커서 그대들은 밤마다 침대 맡에 앉아 우리를 위한 신을 간청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별 없는 세대다. 우리는 이별을 부인하며, 아침에 잠든 이별을 놔두고 떠난다. 이별을 막고 이별을 아낀다. 우리를 위해 그리고 헤어지는 이들을 위해 이별을 아껴두는 것이다. 마치 도둑처럼 우리는 이별 앞에서 몸을 숨기며 서로 슬그머니 도망친다. 우리는 사랑을 취하고 이별은 거기 그대로 남겨둔다. --- p.96~97
그들은 삶을 뒤집어쓴 채 매달려 있었고, 얼굴 없는 신에 의해 매달려 있었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신에 의해. 신은 그저 존재할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신이 그들을 삶에 매달았으므로 그들은 잠시 거기서 시계추처럼 흔들렸다. 보이지 않는 종탑 안에서 나지막이 소리 내는 종처럼, 바람에 부푼 허수아비처럼. 자기 자신에게, 이음매를 찾아볼 수 없는 살갗에 내맡겨진 채. 의자에, 막대기에, 탁자에, 교수대에, 헤아릴 길 없는 나락 위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의 희미한 아우성을 알아채지 못했다. 왜냐하면 신은 얼굴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신은 귀도 없었다. 신에게 귀가 없다는 것, 그들에게 그것은 가장 커다란 버림받음이었다. 신은 단지 그들을 숨 쉬게 할 뿐이었다. 끔찍하고 어마어마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숨 쉬었다. 거칠게, 탐욕스럽게, 걸신들린 듯. 하지만 고독했다. 희미할 뿐, 고독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외침, 그들의 끔찍한 비명은 탁자에 함께 앉아 있는 옆 사람에게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 없는 신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탁자에 함께 앉은 바로 옆 사람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바로 옆에 있는, 같은 탁자에 앉은 사람에게도. --- p.133~134
뒷사람들은 모두 앞사람의 다리를 본다. 그 발걸음의 리듬이 설령 낯설고 불편하더라도 그들을 강요하고 따라 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내게 일정한 걸음걸이가 없다는 것을 네가 알아차린다면, 마치 질투심 많은 여자처럼 증오가 너를 엄습할 것이다. 그렇다. 내겐 일정한 걸음걸이가 없다. 세상에는 실제로 일정한 걸음걸이가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의 멜로디로 연주될 수 없는 다양한 걸음걸이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다. 내가 가발의 뒷사람이기 때문에 그 가발을 증오할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네가 나의 뒷사람이라는 무의미한 그러나 나름의 근거 있는 이유로, 너는 나를 증오하게 될 것이다. 네가 다소 불안하고 가벼운 내 걸음걸이에 맞춰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너는 문득 내가 곧바르고 힘차게 걷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네가 나의 이 새로운 걸음걸이를 알아차리자마자, 나는 즉각 산만하고 의기소침하게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몇 발짝 내딛기 시작한다. 그렇다, 너는 나에 대해 아무런 기쁨이나 우정을 느낄 수 없늘 것이다. 너는 나를 증오해야만 한다. 뒷사람들은 모두 자기 앞사람을 미워하는 법이다. --- p.161
하지만 이젠 그렇지도 않다오. 등불을 든 사내가 말했다. 도시도 이젠 그렇지 않아. 아 그래, 저기는 밝지. 하지만 밝은 가로등 아래엔 온통 굶주린 자들만 지나다닌다오. 내 말 명심하시오, 젊은 양반. 함부르크가요? 야행객이 웃었다. 그렇다면 다른 곳도 똑같아요. 하지만 거기로 다시 가야 해요. 그곳에서 왔으니 다시 거기로 가야만 해요. 그곳에서 왔으니까요. 그러고 나서 그는 마치 그 문제를 수없이 생각해왔다는 듯 말했다. 그것이 인생이죠! 한 번뿐인 인생!
--- p.181
○출판사 리뷰
“파멸과 희망, 죽음과 삶, 절망과 믿음 사이에서” 스물여섯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 작가,
볼프강 보르헤르트 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표 작품선
암울했던 한 시대에 대한 처절한 고백을 담은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작품집 『이별 없는 세대』(김주연 옮김)가 새롭게 리뉴얼된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젊음의 가장 찬란하던 시기, 역사는 보르헤르트를 참혹한 전쟁터로, 감옥으로 내몰았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죽음을 앞둔 2년 남짓의 짧은 기간 동안 병상에서 씌었으며, 그 작업이 바야흐로 궤도에 오를 즈음 그는 표표히 떠나버렸다. 스물여섯 해의 짧은 일생이었지만, 다행히 그의 언어는 오래도록 우리에게 남아 살아 있다.
이 책 『이별 없는 세대』는 이렇듯 요절한 천재 작가 보르헤르트가 남긴 작품 가운데 스물다섯 편의 단편과 열네 편의 시를 선별하여 묶은 것으로, 1975년 처음 국내에 소개되어 2000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재출간되었으며 이번에 세번째로 새롭게 리뉴얼되어 독자들 앞에 선보이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겪은 자신의 체험과 전후에 목격한 전쟁의 참상을 형상화한 그의 작품은, 전쟁이 초래한 인간의 절망적 상황을 격정적으로 그려내며 당시 폐허가 된 독일은 물론이요 동시대인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전하는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 세상의 절망과 불의에 저항하는 크나큰 외침은 시대를 초월해 여전히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볼프강 보르헤르트는 1921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전후 혼란기로, 히틀러의 악령이 독일에 드리우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1941년 소집 영장을 받고 러시아 전선에 투입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암울한 시기를 군인으로서 전장과 감옥을 오가며 가혹하게 보낸다. 그때 얻은 병으로 남은 생의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내다가, 1947년 스물여섯 살이 되던 해 자신이 쓴 유일한 희곡 「문 밖에서」가 함부르크 극장에서 초연되기 하루 전날 눈을 감는다.
이렇듯 희곡 「문 밖에서」 이외에 보르헤르트는 시를 썼고 소설을 썼다. 그의 거의 모든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는 ‘전쟁’이었으며, 따라서 그의 작품은 암울한 시대의 고발(“그들은 그에게 총을 쐈다. 그러기 위해 누군가가 총을 발명했다. 그는 그 대가로 보상을 받았다. 그리고 누군가, 누군가가 그것을 명령했다”)이자 역경에 처해 내뱉는 절규(“우리는 신도 머물 곳도 약속도 확신도 없이 내맡겨지고 내던져져서 버림받은 채 살고 있어”), 갈 곳 잃은 등장인물들(“두 남자는 세상에서 갈 곳을 잃은 채 새로운 밤을 맞아 작아지고 풀이 죽어 웅크리고 있었다”) 등이 주를 이루기에 어둡고 우울한, 죽음의 이미지로서 독자들에게 인식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믿음 없는 자들은, 속고 밟히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체념한 자들은, 그리고 신과 선과 사랑에 실망한, 쓴맛을 아는 우리는, 그래 우리는 매일 밤 태양을 기다리지. 거짓을 접할 때마다 다시 진실을 기다리지. 우리는, 밤에 매번 새로운 맹세를 믿어, 우리 밤의 인간들은 말이야. 우리는 3월을 믿어. 11월의 한가운데에서 3월을 믿어”(61~62쪽) 등의 표현에서 볼 수 있듯, 그의 작품 곳곳에는 절망과 허무만이 아니라 그 비극을 뛰어넘는 희망과 유머의 목소리 또한 발견된다.
진실의 맞은편에 놓여 있는 은둔적 침묵을 참을 수 없었던 보르헤르트는 수많은 사람들을 파멸로 몰고 간 전쟁의 참상에 직면해 진실의 고백과 거짓의 폭로를 향해 나아갔고, 그 대가로 전장과 감옥을 오가는 가혹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꽃 한 송이, 햇살 한 줄기, 태양과 바다, 눈과 별, 어두운 밤을 비추는 가로등을 사랑했으며, 그에 대해 쉼 없이 노래했다. “그는 그 꽃을 연인처럼 조심스럽게 물컵 위로 가져갔다. 〔……〕 그는 자신에게 지워진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 홀가분하고 행복했다. 갇힌 신세, 고독, 사랑에의 갈증, 속수무책으로 살아온 스물두 해의 세월, 현재와 미래, 이 세상과 기독교―그렇다, 그런 것으로부터도!”(172쪽) 시처럼 함축적인 단문의 아름다운 언어의 생산자, 절망을 넘어서는 유머의 명인이 바로 보르헤르트로, 절망 어린 현실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따뜻한 시선을 견지하는 그의 작품들은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특히 언어유희, 동일한 단어의 반복, 문장의 극단적인 축약, 구어체의 빈번한 사용, 리드미컬한 문장, 단조롭고 간결한 서술 방식 등을 즐겨 사용하는 데서는 천재 작가로서의 타고난 언어 감각과 실험적인 면모까지도 엿볼 수 있다.
요절한 천재 작가 보르헤르트가 짧게 살다 간 엄혹한 그 시대의 젊은이들은 그 자신을 포함해 이 책의 표제작인 「이별 없는 세대」에서 말하듯 만남도, 이별도, 행복도, 고향도 허락되지 않은 불행한 세대였다. 그러나 그는 작품 말미에 “우리는 도착의 세대다. 어쩌면 우리는 새로운 별에, 새로운 삶에 다다르는 도착의 세대다”라고 희망을 이야기하며, 그와 또 다른 의미에서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망을 넘어선 언어와 눈물의 유머를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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