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이어령 저 | 열림원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는 2007년 세례를 받으며 하나님과 만난 시대의 지성 이어령이 성경 속 하나님 말씀에 대해 솔직하게 묻고 답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문학을 가르친 교수로서, 기호학자로서의 호기심으로 저자는 성경을 다시 읽자고 제안하며 해박한 지성을 아낌없이 녹여냅니다. 성경에 대한 풍부한 이야깃거리와 생각거리를 담은 이 책을 통해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 모두 보다 친근하게 하나님 말씀에 다가가게 될 것입니다.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는 이 책을 저자 이어령의 세례 10주년을 기념하며 새롭게 펴냅니다. 이 책이 하나님 앞으로 한발 더 나아가는 여정에 다정한 동행자이자 더 많은 독자들의 머리와 마음을 축일 수 있는 자그마한 우물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저자의 풍부한 지식과 친절한 안내를 따라간다면 평소 성경을 가까이하기 어려워했던 이들조차도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이 있어 이토록 오랜 세월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마음을 어루만져왔는지 절절히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먹어도 배고프고 아무리 마셔도 목이 타는 세상”에서 우리의 고픈 영혼을 채워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며, 우리에겐 먹어도 죽지 않는 생명의 빵, 영혼의 양식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외침을 통해서요.
저자는 성경 속 상징 키워드를 골라 성경이 쓰였던 시대상황과 맥락을 함께 설명하며 이전과는 다른 각도에서 성경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의 이러한 열정은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의 다른 표현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저자가 소개하는 성경 속 일화는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번민과도 꼭 닿아 있습니다. 글을 따라 읽으며 독자들은 어느새, 우리가 여전히 인간이고 인간일 수밖에 없을 때, 예수님은 어떤 사랑과 고난의 길을 걸으셨는지,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어떤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가만히 묻게 될 것입니다.
○출판사 리뷰
당신에겐 눈물이 있다
책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키워드 중 먼저 눈물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저자는 “눈물과 함께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의 의미를 모른다”는 괴테의 문장을 인용하며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에 나오는 눈물은 세속적인 삶의 고통이나 슬픔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죄와 관련된 인간과 신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비극, 즉 인간의 한계와 숙명을 인정하며 흘리는 눈물임을 지적합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은 성경 속에서 세 번 우십니다. 한 번은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또 한 번은 사랑으로 품어주려고 했던 예루살렘을 돌아보시면서, 마지막 한 번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요. 저자는 예수님이 인간을 위해 흘리신 이 사랑의 눈물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을 씻어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직 사람만이 다른 이를 위해 슬퍼하고 웁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능력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요엘 2:13)”으라 하십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길을 걷다가, 잠을 자다가, 밥을 먹다가도 문득 마음속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회개이고 이것이 우리가 먹을 빵을 적시는 눈물이자 양식을 얻기 위해 흘려야 하는 땀이라고 말이죠.
그런데 우리 시대에는 예수님이 흘리신 눈물 세 가지 가운데 어떤 것도 맛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마음은 어떤 것이라도 너무 아프니까요. 세상은 늘 죽을 만큼 괴로운 것들을 넘어서야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눈물과 피를 흘리신 후 부활하십니다. (…) 그러니 지금 흐르는 눈물을 닦지 마세요. 마를 때까지 그냥 놔두세요. 눈물은 창피한 것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당신에게 눈물이 있다는 것은 영혼이 있다는 것, 사랑이 있다는 것, 누군가를 사랑하고 애타게 그리워한다는 것, 그리고 뉘우친다는 것, 내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은 비가 그치자 나타난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것입니다.
_「눈물과 함께 먹는 빵」, 71~72쪽
우리가 삶이라는 광야에서 찾고, 기다리고 바라보는 것
또 저자가 소개하는 성경의 유명한 구절 중 하나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태복음 19:24)라는 부분입니다. 논쟁이 많은 이 구절에 대해 저자는 말의 기원을 추적하며 한 가설을 소개합니다. 아람어로 낙타는 ‘gamla’, 밧줄은 ‘gamta’인데 이 두 말의 발음이나 철자가 너무 비슷해서 밧줄을 낙타로 잘못 번역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밧줄로 단어를 바꿔보면 말이 보다 그럴싸합니다. 그럼에도 당시 사회에서 낙타 역시 ‘크다’라는 상징이었기에 낙타라는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쟁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를 저자는 독자들에게 건네려 합니다. 낙타는 등에 항상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지만 그것이 대부분 자신의 짐이 아닌 다른 사람의 짐이라고 해요. 즉 낙타는 뭐든 욕심껏 가진 사람을 비유한다는 말인데, 여기서 저자는 몽골에서 전하는 낙타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하며 담담한 여운을 남깁니다.
원래 낙타에게는 뿔이 있었는데, 너무 아름다워서 다른 짐승들이 부러워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슴이 오더니 “그 뿔 좀 빌려 달라”고 했대요. 마음씨 착한 낙타는 인심 좋게 자기 뿔을 빌려줬다는 거죠.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뿔을 돌려주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낙타는 지금도 언제 사슴이 오나 하고 뭔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지평선을 바라보는 것이랍니다. 부자에 비유된 낙타들처럼 우리도 무언가를 잔뜩 짊어진 채 삶이라는 황량한 사막에서 무엇인가를 기다리지요. (…) 우리는 허망하기 짝이 없는 현세의 것들을 찾아 등에 지기 바빠서 하나님이나 진리를 보지 못해요. 우리는 슬픈 눈으로 뭔가를 막연히 기다리고 있는 낙타와 같습니다. 그게 종교를 향한 마음, 영성을 향한 마음이겠죠. 내가 찾고 있는 것이 혹시 거추장스러운 짐뿐인 건 아닌가,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삶이라는 광야에서 무엇을 찾고, 기다리고, 바라보고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_「낙타와 바늘귀」, 175~176쪽
지성은 깨달음으로 가는 사다리다
이외에도 저자는 빵, 새와 꽃, 아버지, 탕자, 양, 집, 목수, 접속, 포도, 제비, 비둘기, 까마귀, 독수리, 지팡이, 사막과 광야, 예수, 십자가 등 성경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대표적인 키워드들을 프리즘 삼아, 성경 읽기와 해석의 새로운 각도를 보여줍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이콘들이 함의한 문화적 상징과 이미지들을 자유자재로 분석하면서 성경이 경건하고 고귀한 이야기를 넘어 문학작품처럼 감동과 재미를 갖춘 성대한 텍스트의 보고임을 증명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행간이 숨겨두고 있는 풍요로운 시학의 성찬과 마주하면서 신학神學에서 ‘ㄴ’ 하나를 빼면 시학詩學이 된다는 저자의 위트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어령의 지성이 독자에게 선물하는 깨달음으로 가는 사다리이자, 우리를 영성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계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정신판 서문
아직도 문지방 위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우물을 파는 사람이지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이번에도 똑같은 말을 해야겠다. 나는 문학이든 신앙이든 지적 호기심과 상상력을 가지고 우물을 파듯이 판다. 물이 나올 때까지. 그렇게 판 우물에서 물이 솟아나면 나는 얼른 다른 곳으로 땅을 옮기고 또다시 새 우물을 판다. 이렇게 해서 수없이 많은 책들이 태어난 거다. 그 책들 하나하나가 삶에 대한, 진리에 대한 갈증인 셈이다. 그러한 책들이 내 목을 축여 갈증을 없애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건 빈 두레박과 마찬가지다. 두레박은 비어 있기 때문에 다시 물을 찾는다.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라는 제목으로 펴냈던 이 책 역시 내 첫 크리스천의 목마름을 위해 파낸 하나의 우물에 지나지 않는다. 역시 그 책을 쓰고 난 떠났다. 벌써 내 관심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에서 한 말들에서 멀리 떠나가버렸다. 성서에 보면 불타는 소돔의 성을 뒤돌아보았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롯의 아내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내가 쓴 책에 대해 뒤를 돌아다본 적이 없다. 심한 경우에는 오자나 잘못된 사실이 있어도 고치려 하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온 삶은 아무리 후회하고 반성하더라도 교정을 보듯이 또는 개정판을 내듯이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이번에 나에게는 정말 예외적인 일이 생겼다. 이미 출간된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의 개정신판을 내게 된 것이다.
이름을 바꾼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의 성경에는 ‘빵’이 대부분 ‘떡’으로 번역되어 있다. 본문에서도 떡이냐 빵이냐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했다. 그러나 이것을 책 제목으로 하고 보니 많은 오해가 생겼다. 특히 “떡만으로는 살 수 없다”라 알고 있는 독실한 크리스천에게는 큰 혼란을 가져왔다. 이유는 또 있다. 정통적인 신학으로 보면 오류에 가까운 해석들이 많아 이단의 책으로 비칠 수도 있는 내용들이 있다. 신학으로, 종교인의 고정된 시점으로 읽은 게 아니라 인류 최고의 베스트셀러, 롱셀러인 바이블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즉 문학비평가의 시점으로 읽었기 때문에 종교적 해석과는 다른 점이 많다. 그래서 ?문학으로 읽는 바이블’이라는 부제를 택하고, 의문과 믿음의 문지방 사이에서 아직도 방황하고 있는 내 마음을 그대로 고백한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를 제목으로 삼았다.
지성을 버려야만 영성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에 나와 같이 아직도 문지방 위에 서 있는 많은 사람들, 특히 지식인들에게 꼭 읽히고 싶은 욕심에 이 개정신판을 내게 되었다. 특히 열림원의 정중모 대표와 이은아 편집장, 유성원 편집자가 나도 잊고 있었는데 금년이 내가 일본 러브 소나타 행사에서 세례를 받은 지 꼭 10주년이라며 기념행사까지는 몰라도 무슨 표지標識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고 했던 간곡한 부탁도 있었다.
10년이라니, 강산도 변한다는데 나는 얼마나 변했을까. 묵은 책을 신간처럼, 그리고 내가 쓴 책을 남이 쓴 책처럼 다시 읽어보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판 우물물을 마셔본 거다.
2017년 여름
이어령
○작가 소개
1934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하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56년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를 발표,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등장한 그는, 문학이 저항적 기능을 수행해야 함을 역설함으로써 '저항의 문학'을 기치로 한 전후 세대의 이론적 기수가 되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된 이래, 1972년부터 월간 「문학사상」의 주간을 맡을 때까지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등 여러 신문의 논설위원을 역임하며 우리 시대의 논객으로 활약했다. 현재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중앙일보 상임 고문 및 (재)한중일 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1967년 이화여자대학교 강단에 선 후 30여 년간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석좌교수이다. 그는 시대를 꿰뚫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진 명 칼럼리스트로만 활약한 게 아니라 88서울올림픽 때는 개ㆍ폐회식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문화 기획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1980년 객원연구원으로 초빙되어 일본 동경대학에서 연구했으며, 1989년에는 일본 국제일본문화연구소의 객원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1990~1991년에는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저서로는 『디지로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지성의 오솔길』, 『오늘을 사는 세대』, 『차 한 잔의 사상』 등과 평론집 『저항의 문학』, 『전후문학의 새물결』, 『통금시대의 문학』,『젊음의 탄생』,『이어령의 80초 생각 나누기』등이 있고, 어린이 도서로는 「이어령의 춤추는 생각학교」시리즈 등이 있다.
디지로그(Digilog)는 아날로그 사회에서 디지털로 이행하는 과도기, 혹은 디지털 기반과 아날로그 정서가 융합하는 시대의 흐름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그는 그의 저서 『디지로그』에서 현재 우리가 한때 '혁명'으로까지 불리며 떠들썩하게 등장했던 디지털 기술은 그 부작용과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시 아날로그 감성을 불러들이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지적해준다. 시대를 읽는 특별한 눈을 가진 그는 우리에게 선사하는 새로운 사명으로 디지로그 시대의 개척자이자 전도사가 되었다. 한국이 산업사회에선 뒤졌지만 정보화사회에선 선두주자로 나설 수 있음을 일찍부터 설파한 그가 이제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디지로그 시대의 개막'을 선언한다. 물리적 나이로 보자면 분명 노학자이지만, 그는 디지털 미디어를 매개로 한 문명전환의 시기에 누구보다도 앞서 디지털 패러다임의 한계와 가능성을 몸소 체험한 얼리어댑터이다.
그의 서재에는 7대의 컴퓨터와 2대의 스캐너, 무선 공유기, 프린터 등 각종 디지털 장비가 자리한다. 7대의 컴퓨터를 직접 네트워킹했다. 그는 컴퓨터들을 이용해 직접 자료를 모으고, 검색하고, 정리하고, 자신의 지적 회로망에 연결한다. 그에게 컴퓨터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뇌의 확장된 영역이 되고, 그가 선창하는 디지로그 세상을 몸소 살고 있는 인간임을 증명한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1963년 「경향신문」에 연재 에세이 형식으로 발표된 글을 모은 것으로 처음으로 이 땅에 한국 문화론의 기치를 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으로 이어령은 "젊은이의 기수" "언어의 마술사" "단군 이래의 재인"으로까지 불렸다. 또한 대만에서 출간되었을 때는 임어당으로부터 "아시아의 빛나는 거성"으로 칭송받기도 했으며 일본에서는 저명한 문화 인류학자 다다 교수가 '그가 읽은 책 가운데 가장 감동을 준 세 권의 책 가운데 하나'로 꼽을 정도였다. 영문으로 번역되어 나갔을 때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었다. 이 책은 한국의 문화를 최초로 분석해 낸 기념비 같은 것이면서도 '젊다'. 또렷하고 거침없는 표현도 그렇거니와 한국의 건축, 의상, 식습관, 생활양식에 대한 예리하고도 통찰력 있는 지적은 지금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방대한 지식에 기반하여 한국의 풍습을 중국과 일본과 비교하면서 동서고금의 사상을 가리지 않고 적용하는 자유로운 그 사고방식과 이질적으로 보일 수 있는 요소들을 조화롭게 엮어내는 글재주 역시 비상하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일본 고전 문헌에 대한 자료와 그간의 일본, 일본인론에 대한 저자의 견해 및 비평을 피력하면서 문화 현상을 중심으로 일본인을 투시해 본,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며 그럼으로써 가혹한 분석이다. 일본인을 바라보는. 시대를 초월한 근본적인 통찰을 제공하며 인접국인 일본에 대한 피상적 이해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둥지 속의 날개』(상,하)는 1978년 월간 「한국문학」에 '의상과 나신'이라는 제목으로 8회 연재를 하다가 도중에 저자의 건강상 이유로 중단했던 작품이다. 분망한 나날과 가진 고초 속에서 저자인 이어령의 문학적 열정을 모두 쏟아 부었던 작품이라 그런지 세월이 갈수록 유난히 애정을 느끼게 되는 소설이라고 한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산업화가 한창이던 70년대서 80년대의 초반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영원한 내면세계를 다루려 한 소설이기에 산업화·도시화라는 시대상황과 관계가 없는 이야기이다. 그러면서도 광고라는 새로운 직업을 소재로 하였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문명 비평적 요소도 없지 않다.
오랫동안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여겨져 온 이어령. 문학박사, 교수, 장관 등 다채로운 이력과 타이틀을 지닌 그는 과거 무신론자였다. 하지만 칠십이 훌쩍 넘은 나이에 세례를 받고 신앙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지성에서 영성으로』는 이러한 이어령의 모습을 담은 책이다. 말하자면 '(무신론자의) 신앙입문기'라고 할까. 지식인 이어령이 아닌 그리스도교 신자 이어령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영성'에 관한 참회론적 메시지와 함께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인생의 후반에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이어령. 존재 자체의 변화로 인해 그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지성과 영성의 문지방 위에서, 그는 지성을 넘어선 영성을 추구하고 있다. 세례를 받았고, 시집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를 냈다. 생명과 영성을 언급하며 새로운 글쓰기에 나섰다. 지나온 세월 동안 한국의 대표지성으로 이름을 날린 그가 새로운 변화를 꿈꾸며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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