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1~3
레프 톨스토이 작/ 박형규 역/문학동네
<안나 카레니나>는 <전쟁과 평화>, <부활>과 더불어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3대 걸작 중 하나이다. 톨스토이 스스로 ‘과거에 관한 책’이라고 했던 <전쟁과 평화>와는 달리 동시대인의 삶으로 이루어진 <안나 카레니나>는 사랑과 결혼, 가족문제라는 보편적인 소재로 발표되자마자 전 러시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농노제 붕괴에서 러시아 혁명에 이르는 역사적 과도기에 놓인 19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의 풍속과 내면생활을 150명이 넘는 등장인물과 사실적인 묘사, 엄청난 깊이와 힘으로 완벽하게 반영해냄으로써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당대의 작가들에게 ‘완전무결한 예술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을 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번역되어 ‘역사적 시대에 예술적 공식을 이끌어낸’ 작품의 전범으로 후대의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또한 10여 차례에 걸쳐 영화로 만들어지며 그레타 가르보, 비비안 리, 소피 마르소 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세계문학사상 가장 매력적인 여주인공의 하나’(나보코프)인 안나 카레니나를 연기했다. 2007년에는 영국의 노턴 출판사에서 실시한 영어권 유명작가 125명이 뽑은 최고의 문학작품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뉴스위크> 선정 100대 명저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등, 19세기 러시아에서 탄생한 불세출의 걸작 <안나 카레니나>는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인간 삶의 총체적인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해낸 인류 보편의 걸작으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는 1873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1875년부터 1877년까지 <러시아 통보>지에 연재한 후 1878년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역사적 과도기에 놓인 러시아 사회의 불안이 짙게 깔려 있다.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가정의 불행과 개인의 혼란을, 상류사회의 아름다운 여인 안나와 레빈, 스티바의 가정생활을 통해 세세하게 그려내는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육체적 특징과 그들의 파악하기 어려운 심리 변화를 결합시키는 뛰어난 묘사력으로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로 평가받으며 이후 다른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일리야 레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초상>, 1887
“<안나 카레니나>는 예술작품을 넘어서 하나의 인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작가는 이야기를 지어내거나 짜 맞춘 것이 아니라 내면의 눈앞에서 일어난 대로 옮긴 것이며, 사건은 소설에서 묘사된 그대로 일어난 것이다. 안나의 어깨와 머리채와 가늘게 뜬 눈, 카레닌의 지친 듯한 미소와 손가락 꺾는 버릇, 스티바의 촉촉한 눈매와 부드러운 얼굴 표정, 이러한 면모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주변 지인들의 그것만큼 실감이 넘친다. 놀랍게도(혹은 유감스럽게도) 오히려 톨스토이의 피조물들보다 현실의 지인들이 훨씬 더 불명확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매튜 아놀드(영국의 시인, 평론가)
<안나 카레니나>는 정열이 밟아 가는 내면적 궤도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는 너무도 새로운 시도여서, 많은 비평가들이 이를 이해조차 하지 못했고 지면을 통해 그들의 당황을 표출했다.“ ―니콜라이 스트라호프
사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영지인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안나 카레니나>를 집필하는 동안 일기를 전혀 쓰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안나 카레니나>에 모든 것을 써 넣었고 아무것도 달리 쓸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실제로 철도가 가져온 변화, 상류사회의 풍속과 생활상, 가족 안에서의 환희와 불화 등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들에는 작가가 당시에 흥미를 갖고 접했거나 관찰했던 것들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특히 귀족 출신이면서도 시골의 영지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는 레빈의 내면적 탐구와 정신적 고뇌는 그 당시 톨스토이의 생활과 활동을 알아보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일리야 레핀, <숲속에서 쉬는 톨스토이>, 1891
소설에서 유일하게 소제목을 붙인 제5부의 20장 ‘죽음’에서 죽음을 맞은 형을 지켜보며 살아 있는 자와 죽어가는 자에 대한 잔혹할 만큼 선명한 묘사와 소설의 제8부에서 삶에 대한 회의와 죽음에의 공포에 시달리는 레빈의 모습은 이후 톨스토이가 <고백>에서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는 내용과 이어지기도 한다. 이 소설을 발표한 이후 작가의 실제 삶은 일대전환을 맞아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며 윤리에 관한 수필 외에는 전혀 소설을 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톨스토이는 자신의 문학적 정점에 이른 시기에 <안나 카레니나>라는 대작을 통해 탄생과 죽음, 결혼, 가족, 노동, 종교 등 인간을 둘러싼 모든 관계와 사랑과 욕망, 환희와 좌절, 희망, 분노, 질투, 구원에의 갈망 등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온갖 감정들, 즉 인간과 삶에 관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담아냄으로써 소설가로서의 한 경지를 이루어낸 것이다.
“마침내 바로 그 소설을 이루었다네. 무척이나 생생하고 격렬하며 또한 완벽한 소설을 말일세. 이 소설은 지금까지 내가 쓴 것들 중 진정 내 마음을 사로잡은 최초의 작품이라네.” ―톨스토이의 편지 중에서
나보코프가 전하는 에피소드에 의하면 “오래전부터 소설 쓰기를 중단했던 톨스토이는 노경에 이른 어느 울적한 날 무턱대고 한 권의 책을 집어 들고 중간 부분부터 읽기 시작했다. 너무나 재미있어서 표제를 보았더니 그것은 자기가 쓴 <안나 카레니나>였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 역시 책의 표지가 다 닳을 정도로 이 소설을 읽고 또 읽으며 늘 곁에 두었다고 한다.
○해외 서평
<안나 카레니나>는 예술작품으로서 완전무결하다. 인간 영혼의 넓고 깊은 심리 분석, 그리고 러시아에서 전례 없는 예술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인간의 죄와 악행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구현한다. 현 시대의 유럽문학 가운데 이 작품에 비견될 만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도스토옙스키
<안나 카레니나>는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사회소설이다. ―토마스 만
톨스토이는 세계 전체다. 그는 한 세기에 걸쳐 체험한 것들을 놀라운 진실성과 힘과 아름다움으로 표현했다. ―고리키
<안나 카레니나>는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연애소설의 하나이지만, 단순한 ‘사랑의 모험 소설’은 아니다. 톨스토이의 예술은 남달리 강렬하고 맹렬한 빛을 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창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톨스토이는 창조적 원숙의 정점에 이르렀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안나 카레니나>는 19세기 세계문학 가운데 절대 결합될 수 없을 것 같은 수많은 소재들― 열정의 내적 경로, 사회의 시사문제, 지주제도, 과학, 철학, 예술 등등 ―을 성공적으로 엮어낸 단 하나의 작품이다. ―보리스 아이헨바움
[독자 리뷰]
○작가들이 꼽은 최고의 고전 문학
―소설가 백영옥
<안나 카레니나>를 처음 본 건 초등학교 4학년 어두운 다락방에서였다. 거실에는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는데, 집안 식구들 중 아무도 들춰보지 않던 무거운 책들은 곧 다락방 차지가 되었다. 비가 쏟아지던 일요일, 밖에 나갈 수 없던 나는 어두운 다락방에서 금빛 글씨가 반짝거리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곧 오래된 책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와 무슨무슨 스키와 같은 익숙지 않은 이름들, 발음하기 힘든 지명들과 세로줄 쓰기에 눈이 어지러워 책을 덮었다.
고전이 전화번호부만 한 그 악랄한 두께로 보통 사람의 ‘기’를 짓누르는 건, 세계 공통이다. 도대체 짧게 쓴 ‘고전’이란 게 있긴 한가 싶을 정도로 ‘걸작’이라 부르는 책들은 엄청난 분량을 자랑한다. 게다가 행갈이 없이 이어지는 만연체를 감당할 만한 사람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내가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정독하게 된 건 그러므로 10년이 훌쩍 지나서였다. 고해성사를 하자면, 고전은 작가들도 읽기 ‘되게’ 힘들다(그러므로 ‘고전’이란 몇 번의 실패와 포기 끝에 ‘마침내’ 읽게 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오죽하면 파울로 코엘료는 자신의 에세이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작가들이 인정하는 유일한 책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뿐인데, 실상 이 책에 대한 내용을 물어보면 하나같이 횡설수설한다고 적어놓았을까.
이반 크람스코이, <어떤 여인의 초상>, 1883. 안나 카레니나를 이미지로 그린 것이라고도 한다.
고전에 대한 엄숙함을 잠시 접어두고, 다소 불량스럽게 얘길 하자면 <안나 카레니나>는 ‘사랑과 전쟁’의 19세기 러시아판이다. 그것은 남들이 보기에 부족할 것 없는 고관대작의 부인 안나가 젊은 장교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체면 때문에 자신과 이혼해주지 않는 남편과 어린 딸과 아들 사이에서 지독한 불행을 견디지 못한 그녀가 달리는 기차에 스스로 몸을 던진다는 내용이다. 기념비적인 저 마지막 기차 투신 장면을 ‘불륜의 말로’라고 정의해버리고 나면 곧이어 이어지는 결말은 계몽주의에 입각한 탄식일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우리는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톨스토이는 49세에 이르러 <안나 카레니나> 집필을 마무리한다.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의 삶에 이정표를 세운 작품으로, 진실한 사랑과 결혼, 예술, 종교, 죽음 등 삶에 관한 모든 것을 쏟아 부은 톨스토이 문학의 집대성이다. 톨스토이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세계관이 크게 바뀌는데, 자신이 잘못 살았다는 통렬한 심정으로 참회록을 쓰기에 이른다. 참회록 집필 후, 그는 위대한 베스트셀러 작가에서 전 인류에게 훈계하는 계몽주의적 스승으로 극적인 변환점을 맞는다.
한 인간이 자신의 삶과 문학을 일치시키려 이토록 발버둥친 역사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런 안간힘과 상관없이 그토록 자신이 지향한 인물과 점점 멀어져간 사람도 거의 없었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소설에서 비판하고 경멸했던 것들, 가령 도시의 환락과, 무위도식, 사랑 없는 결혼, 거짓과 허위의 예술을 버리고 인간을 사랑하며 삶과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파에 가까운 ‘설교’를 했다.
톨스토이가 안나를 비극적 죽음으로 내몬 까닭은 단순히 그녀의 사랑이 불륜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당시 러시아 귀족사회의 연애와 결혼제도,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고민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질문했다. 좋은 소설이란 ‘답’이 아닌 그 시대를 산 인간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것으로,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밖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질문에 대한 답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고, 변화할 수 있다. 고전이 매번 사람들에게 다르게 읽히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내가 기적처럼 <안나 카레니나>를 완독했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는 이 소설의 주제가 ‘인과응보’였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바람 난 여자가 기차에 치여 죽었으므로 슬프긴 해도 삶은 원래 그래야 하는 것, 이라고 실컷 잘난 척했을 것이다. 그것은 철저히 이솝 우화적인 세계로 ‘교훈’을 찾는 것이 진정한 독서의 의미라고 생각했던 11살 내 가치관과도 들어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서른일곱에 읽는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사는 게 나쁘다!’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가?’라는 선뜻 대답하기 힘든 질문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내가 실패를 거듭하며 이 소설의 첫 장과 마지막 장을 읽는 동안 내가 그은 밑줄은 상당 부분 바뀌어 있었다. ▶소피 마르소 주연 <안나 카레니나>(1997)
나는 읽을 때마다 예전에 그은 밑줄이 달라지면 달라질수록 좋은 소설, 이란 편견을 꽤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는데, <안나 카레니나> 역시 그런 소설 중 하나다. 이번의 독서에서 나는 안나가 아닌 그녀의 남편 카레닌의 마음에 훨씬 더 감정 이입되었다. 그것은 결혼 10년차 주부라는 내 개인적인 삶의 조건과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마침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주인공 테레사가 왜 자신의 ‘충견’ 이름을 ‘카레닌’이라고 지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레닌은 테레사가 보기에 타고난 희생양이었고, 그녀는 스스로 자신을 이 19세기 러시아 남자와 동일시한 것이다.
톨스토이는 절제하고 금욕하는 구도자의 삶을 원했다. 이웃에겐 사랑을 베풀라 설파했지만 아내에겐 냉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게으른 귀족을 경멸했지만 자신은 귀족이었고, 성욕을 혐오했지만 육체적 욕망을 주체하지 못했고, 결혼제도를 증오했지만 결코 이혼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버리고 청빈하게 살기를 원했지만 낭비벽이 심했다. 언제나 눈물겹게 노력했지만 이상과 현실 사이를 도돌이표처럼 반복했다. 이런 괴리가 다행스레 ‘정신병’ 대신 ‘걸작’을 만들어냈으니 위대한 아이러니라 부를 수도 있을 만하다.
‘고전이 재미있다’라는 말을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그건 마치 뜨거운 욕탕에 들어앉아 ‘어! 시원하다’라는 아빠의 거짓말과 일맥상통한다. 고전은 어렵고 읽기 힘들다. 고전 읽기에는 상당한 유혹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하버드에서 철학을 공부 중인 첼리스트 장한나가 최고로 꼽는 소설은 <안나 카레니나>다. (그녀는 몇 번씩 이 소설을 반복해서 읽는 중이란다.) 톰 울프, 스티븐 킹 같은 최고의 영미권 작가 125명이 꼽은 최고의 소설 1위 역시 <안나 카레니나>다. 13년을 신춘문예에 낙방했던 내가 기적처럼 등단한 건 우연히도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난 후였다.
-출처: 문학동네 네이버카페>한국작가가 읽어주는 세계문학 2011.09.05
○[안나 카레니나], 가장 위대한 사회소설이 말해주는 것
―이현우(서평가)
너무도 유명한 작가와 소설에 대해 간략하게 말하기, 이게 내게 주어진 미션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은 소감을 적는다는 미션. “<안나 카레니나>는 예술작품으로서 완전무결하다.”는 도스토옙스키의 평이 <안나 카레니나> 뒤표지에 박혀 있는데, 이건 사실 톨스토이 자신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작품의 주제가 뭐냐는 질문에, 그걸 말하려면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읽어야 한다고 했다던가. 요컨대 군더더기라곤 한 군데도 없는 완벽한 작품이라는 뜻이리라.
완벽한 작품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다. 경탄이 아니라면 경탄에 경탄 정도? 독일문학을 대표하는 토마스 만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안나 카레니나>는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사회소설이다”라는 게 그가 남긴 경탄이다. 무얼 덧붙이겠는가. 햄릿의 말처럼 “그리고 침묵.” 위대한 작품에 대해선 침묵하는 게 옳다. 일단은 그렇다. 그럼에도 몇 마디 거들려고 한다면 뭔가 다른 빌미가 필요한데, 이번에도 출처는 톨스토이 자신이다.
[ 안나 카레니나]를 쓰고 난 직후 소위 ‘정신적 위기’를 경험한 톨스토이는 <참회록>을 쓰면서 모든 예술을 부정한다. 너무도 ‘과격한’ 톨스토이였기에 자신의 작품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예술작품으로서의 소설은 더 이상 쓰지 않겠다는 게 그의 결단이었다. 만년에 그가 서가에서 빼낸 책을 읽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표지를 보니 <안나 카레니나>였다는 전설적인 에피소드가 나오게 된 배경이다. 가장 완벽한 작품이지만 동시에 작가에게는 잊힌 작품. 근대 소설의 정점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작가에게는 그 한계를 깨닫게 해준 작품. <안나 카레니나>의 문제성이다. 이걸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의 <안나 카레니나>(2012)
너무도 유명한 첫 문장이 실마리이자 맥거핀이다. 실마리처럼 보이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게 히치콕이 즐겨 구사했던 맥거핀이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적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이 문장은 1부의 첫 문장이기에 전체 8부로 구성된 소설 전체의 첫 문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통상 작품의 대략적인 내용과 주제까지 암시해주는 문장으로 읽힌다.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이 있다는 것, 그리고 행복한 가정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이라는 것. 소설의 초점은 물론 불행한 가정들에 맞춰진다.
행복한 가정은 엇비슷하기에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소설의 재미는 무엇보다 남들의 가지가지 불행한 가정사를 읽는 재미다. 아이들 가정교사와 바람을 피우다 들통이 나는 바람에 곤경에 처한 스티바와 돌리 커플의 이야기부터가 얼마나 흥미로운가! 오빠 부부를 중재하기 위해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기차를 타고 달려온 안나가 젊은 장교 브론스키와 눈이 맞아 열애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는 또한 얼마나 위력적인가! 고위 관리이면서 가정에서도 사무적인 남편 카레닌이 안나의 불륜에 대한 응징으로 이혼을 거부함으로써 안나와 브론스키의 관계는 교착 상태에 빠지고 점차 삐걱거리게 된다. 브론스키의 애정이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에 상심한 안나는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결국은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만다.
대략 이런 줄거리라면 러시아식 ‘막장 드라마’의 소재로도 변주될 만하다. 여주인공 이야기의 기본구조만 보자면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와 <안나 카레니나>의 거리는 몇 뼘 되지 않는다. 그런데 플로베르와 다르게 톨스토이는 안나의 이야기에 또 다른 이야기를 병치시키고자 했다. 그것도 동등한 비중으로. 바로 레빈의 이야기인데, 건축에서 비유를 들자면 안나 이야기와 레빈 이야기는 <안나 카레니나>를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이다. 공정하게 제목을 붙이자면 ‘안나와 레빈’이라고 해야 맞을 만큼 레빈은 이 작품에서 적잖은 비중을 차지한다. 놀라운 것은 이 두 주인공이 거의 만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7부에 가서야 레빈은 안나를 찾아가 독대하고 그녀의 솔직함에 좋은 인상을 받는다. 바로 7부 끝부분에서 안나가 자살하게 되므로 둘의 만남은 분명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대체 안나와 레빈의 이야기를 한데 묶어주는 ‘연결의 미로’는 무엇인가? 어째서 두 인물은 주인공이면서 각기 다른 장면에 나오는가?
물론 이런 의문을 작가가 의식하지 못했을 리 없다. 톨스토이는 소설의 두 기둥을 덮어주는 지붕이 작품에 존재한다고 시사했다. 잘 찾아보라고?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자면 이 작품에선 레빈만이 아니라 안나 또한 작가 톨스토이의 분신이다. 곧 레빈이 정신적 자아를 대표한다면, 안나는 육체적 자아를 대표한다. 톨스토이 자신이 레빈처럼 삶의 의미라는 형이상학적 물음에 과도하게 사로잡힌 인물이었고, 안나처럼 강렬한 육체적 욕망의 소유자였다. 문제는 이 두 자아의 통합이다.
육체적 욕망에 의해 결합된 안나와 브론스키 커플이 결국 파국에 봉착하는 데 반해서 레빈과 키티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교감을 통해 이상적인 커플 상을 보여주는 듯싶다. ‘행복한 가정’의 모델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8부의 마지막 장면에서 레빈은 자신의 깨달음을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한다. 비록 사랑스러운 아내이지만 키티는 형이상학적 물음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레빈의 고뇌를 특이한 성격 정도로 이해할 공산이 크다. 실제로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야 역시 남편을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가정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얼핏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을 대비시키려는 듯 보이지만, <안나 카레니나>는 행복한 가정의 가능성 자체에 회의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마무리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란 첫 문장이 맥거핀이라고 말한 이유다. 불행한 가정에 대한 소설적 탐구는 작가 톨스토이로 하여금 ‘가정의 불행’이란 결론으로 이끈다. 모든 가정은 필연적으로 어긋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가 도달한 결론이다. 하지만 이 결론을 그는 <안나 카레니나> 안에는 적어두지 않았다. 아마도 이런 정도의 문장이지 않을까. “무릇 모든 가정이 행복을 꿈꾸지만 행복은 가정 안에 깃들지 않는다.”
톨스토이에게 인생의 진리와 함께하지 않는 행복이란 가능하지 않으며, 설사 존재한다 하더라도 기만에 불과하다. 그리고 가정은 그런 진정한 행복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참회록>에서 예술과 함께 가정을 삶의 진리를 은폐하는 기만으로 간주한다. <안나 카레니나>를 떠나면서 톨스토이는 예술로부터, 그리고 가정으로부터 떠난다. ‘죽음’이라는 인생의 진리 앞에서 완벽한 예술도 행복한 가정도 모두가 기만에 불과하다. ‘위대함의 허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안나 카레니나>는 한 번 더 위대한 소설이다.
글/ 이현우 (서평가.) 한겨레 등에 서평과 북칼럼을 연재하고, ‘로쟈’라는 필명으로 ‘로쟈의 저공비행’이라는 이름의 블로그를 꾸리면서 ‘인터넷 서평꾼’으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로쟈의 인문학 서재>, <책을 읽을 자유>, <애도와 우울증>,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 <그래도 책읽기는 계속된다>, <아주 사적인 독서>, 옮긴 책으로 <레닌 재장전>(공역), <폭력이란 무엇인가>(공역) 등이 있다.
출처 : 문학동네 네이버카페>한국작가가 읽어주는 세계문학 2013.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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