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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詩를 읽다

우표 한장 부쳐서/ 천양희

금동원(琴東媛) 2019. 1. 13. 13:08

우표 한장 부쳐서

 

천양희

 

꽃 필 때 널 보내고도 나는 살아남아

창 모서리에 든 봄볕을 따다가 우표 한장

붙였다 길을 가다가 우체통이 보이면

마음을 부치고 돌아서려고

 

내가 나인 것이 너무 무거워서 어제는

몇 정거장을 지나쳤다 내 침묵이 움직이지

않는 네 슬픔 같아 떨어진 후박잎을

우산처럼 쓰고 빗속을 지나간다 저 빗소리로

세상은 여위어가고 마음도 늙어

허리가 굽었다

 

꽃 질 때 널 잃고도 나는 살아남아

은사시나무 잎사귀처럼 가늘게 떨면서

쓸쓸함이 다른 쓸쓸함을 알아볼 때까지

헐한 내 저녁이 백년처럼 길었다 오늘은

누가 내 속에서 찌륵찌륵 울고 있다

 

마음이 궁벽해서 새벽을 불렀으나 새벽이

새, 벽이 될 때도 없지 않았다 그럴 때

사랑은 만인의 눈을 뜨게 한 한 사람의

눈먼 자를 생각한다 누가 다른 사람

나만큼 사랑한 적 있나 누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나 말해봐라

우표 한장 붙여서 부친 적 있나

 

 

참 좋은 말

 

내 몸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혀

한잎의 혀로

참, 좋은 말을 쓴다

 

미소를 한 육백개나 가지고 싶다는 말

네가 웃는 것으로 세상 끝났으면 좋게다는 말

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랑하라는 말

 

내 마음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

한줄기의 슬픔으로

참, 좋은 말의 힘이 된다

 

바닥이 없다면 하늘도 없다는 말

물방울 작지만 큰 그릇 채운다는 말

짧은 노래는 후렴이 없다는 말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말

한송이의 말로

참, 좋은 말을 꽃피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란 말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말

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꾸 온다는 말

 

 

그자는 시인이다

 

그는 일생을 쓰면서 탕진했다 탕진도 힘이었다

그 힘으로 피의 문장을 썼다

 

불꽃 삼키고도 매운 연기 내는

굴뚝의 문장

시뻘건 꽃 피우다 모가지째 툭, 떨어지는

동백의 문장

모천회귀하려다 불귀의 객이 되는

연어의 문장

 

문장을 들고

두려움과 슬픔을 이기기 위해

쓰고 쓰고 또 쓰는 지족한 짓

문장이란 낭비의 극점에서 완성되는가

말은 뿔처럼 단단해지고

불안은 소리처럼 멀리 퍼진다

 

뒤져보면 두려움이 슬픔보다 더 두꺼웠다

슬픔은 말하자면 비자금 같은 것인데

슬픔을 저축해둘 걸 그랬어 아이들 듣는데

그런 소리 마라 아이가 자라면 죄도 자라는 것이니

피붙이란 본질적으로 슬픈 것이지

 

도대체 이놈의 문장은 구속을 담배에 불붙이듯 한다

담배에 불붙이며 중얼거린다

 

죄를 병처럼 끙끙 앓는 그의 몸은 세찬 바람이다

바람소리에는 운명이 들어 있다 아니 미래의 미지가 들어 있다

 

어떻든 간에 그자는 시인이다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창비,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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