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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詩를 읽다

새벽에 생각하다/ 천양희

금동원(琴東媛) 2019. 3. 10. 21:05

새벽에 생각하다

 

 천양희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노트르담의 성당 종탑에 새겨진 '운명'이라는 희랍어를 보고 「노트르담의 꼽추」를 썼다는 빅토르 위고가 생각나고 연인에게 달려가며 빨리 가고 싶어 30분마다 마부에게 팁을 주었다는 발자크도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인간의 소리를 가장  닮았다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가 생각나고 너무 외로워서 자신의 얼굴 그리는 일밖에 할 일이 없었다는 고흐의 자화상이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어둠을 말하는 자만이 진실을 말한다던 파울첼란이 생각나고 좌우명이 진리는 구체적이라던 브레히트도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소리 한 점 없는 침묵도 잡다한 소음도 훌륭한 음악이라고 한 존 케이지가 생각나고 소유를 자유로 바꾼 디오게네스도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괴테의 시에 슈베르트가 작곡한 「마왕」이 생각나고 실러의 시에 베토벤이 작곡한 「환희의 송가」도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마지막으로 미셸투르니에의 묘비명이 생각난다 "내 그대를 찬양했더니 그대는 그보다 백배나 많은 것을 내게 갚아주었도다 고맙다 나의 인생이여"

 

 

누군가의 시 한 편

 

어느 잡지의 한 페이지에

누군가의 시 한 편이 들어 있다

누구의 시인지도 모르고 읽는

누군가의 시 한 편

 

머리에 도둑 든 것처럼 뒤죽박죽 시들이

쓸모없는 모자를 쓴 시들이

위기 극복의 유전자도 없는 시들이 시들해지고

씁쓸한 시에 맛 떨어질 때

 

누군가의 시 한 편

입맛 돋우는 봄나물 같아

웰빙시도 좀 먹어봐야지

희망버스 같은 시도 좀 타봐야지

이 무슨 발견인가! 무릎도 좀 쳐봐야지

 

나는 그만

아무 생각 없는 듯 쓴 누군가의 시 한 편이

너무 좋아서 미울 정도라네

눈물의 뼈 같은

침묵의 뿔 같은

누군가의 시 한 편

 

 

-새벽에 생각하다,(문학과 지성사,2017)

 

  천양희는 1942년 부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5년 『현대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사람 그리운 도시』 『하루치의 희망』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너무 많은 입』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육필시집으로 『벌새가 사는 법』, 산문집으로 『시의 숲을 거닐다』 『직소포에 들다』 『내일을 사는 마음에게』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공초문학상, 박두진문학상, 만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