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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마리아 칼라스: 세기의 디바 (2017)

금동원(琴東媛) 2019. 7. 24. 22:19

 

 

 

마리아 칼라스: 세기의 디바 (2017)

감독: 톰 볼프

 

 

  뛰어난 곡 해석력과 마음을 울리는 연기로 전설이 된 디바 칼라스, 하지만 화려한 무대를 내려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그녀, 마리아! 모두가 사랑했지만 끝내 고독했던 디바의 일생이 공개된다.

 

  영화는 마리아 칼라스의 사망 3년 전인 1974년에 이루어진 인터뷰로 시작한다. 어린 마리아에서 말년의 ‘라 칼라스’가 되기까지, 그녀가 어떻게 변신했는지 다루는 미공개 편지와 희귀한 인터뷰, 출판되지 않은 회고록의 일부 문장들로 칼라스의 이야기를 엮어 나간다. 칼라스의 말은 칼라스 자신이 바라본 그녀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주며, 그녀의 성공 그 이면의 모습과 비극적인 운명의 비밀을 엿보게 해준다.
(2018년 제14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https://youtu.be/1iwGIBewHPM

 

 

 

 

마리아 칼라스

ⓒ Hulton-Deutsch Collection / CORBIS | All rights reserved

 

 

○최고의 프리마 돈나로 군림하기까지

 

  세기의 디바, 최고의 프리마 돈나로 군림했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는 1923년 12월 2일 그리스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또래보다 큰 체구와 목청을 지닌 칼라스는 노래에 타고난 재능을 보였다. 미국 이민 시절 부모님의 이혼을 경험한 후, 어머니와 함께 그리스로 돌아온 칼라스는 가정의 불화로 인한 불안함을 음식과 노래로 달랬다.

 

  1937년, 그녀는 아테네 음악원의 성악 교사였던 마리아 트리벨라(Maria Trivella)를 만나 성악의 기초를 배웠고 열네 살에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산투차 역으로 처음 오페라 무대에 섰다. 트리벨라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난 스승 이달고(Elvira de Hidalgo)를 사사하는 동안에는 주페의 오페레타 〈보카치오〉를 통해 국립 리릭 극장의 프로 무대에 진출했고 열일곱 살에는 아테네 오페라단의 평생 단원이 되었다.

 

 

 

스승 이달고(오른쪽)와 마리아 칼라스(가운데)

ⓒ Χρήστης Templar52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1947년 8월 3일, 베르디 아레나에서 칼라스는 〈라 조콘다〉로 이탈리아 데뷔 무대를 가졌다. 연습 도중 넘어져 발목을 삔 그녀는 붕대를 감은 채로 무대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연주를 마쳤다. 그해 겨울, 칼라스는 베로나에서 함께 공연했던 지휘자 툴리오 세라핀(Tullio Serafin)의 소개로 베니스의 라 페니체 극장에 출연했고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푸치니의 〈투란도트〉 두 작품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듬해인 1948년 칼라스는 트리에스테, 제노아, 로마, 피렌체, 투린 등에서 잇달아 연주를 했고 40일 동안의 맹연습 끝에 막을 올린 〈노르마〉를 통해 이전에 없던 최고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이후 〈노르마〉는 그녀가 가장 많이 공연하게 되는 레퍼토리이자 그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49년 4월 21일, 장기간에 걸친 남미 순회공연을 앞두고 칼라스는 사업가 메네기니(Battista Meneghini)와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1951년에는 이른바 ‘대세’인 칼라스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던 밀라노에서 출연을 요청해왔다. 칼라스는 1951년 12월 7일,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의 엘레나로 변신해 라 스칼라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라이벌이었던 레나타 테발디(Renata Tebaldi)가 떠나고 난 후 비로소 완벽한 밀라노의 안주인이 된 칼라스는 1962년 무대를 완전히 떠날 때까지 매 시즌 라 스칼라 무대에 섰다. 1952년 여름에는 세계적인 메이저 음반사인 EMI와 계약을 맺었다. 어마어마한 계약금과 함께 EMI의 독점 아티스트가 된 그녀는 이후 모든 레코딩을 EMI와 함께 한다.

1954년 4월, 칼라스는 1년여에 걸친 혹독한 다이어트 끝에 날씬한 몸으로 무대에 올랐다. 갑작스런 다이어트 때문에 성량이 줄어들 거라는 우려와는 달리 더욱 매끄럽고 풍성한 목소리를 선보였고 유례없는 최고의 대우를 약속받고 뉴욕메트로폴리탄 무대에 섰다.

 

 

 

음악 공부 중인 마리아 칼라스

ⓒ AS400 DB / Corbis | All rights reserved

 

 

 

  1958년 12월 19일, 칼라스는 파리에서의 데뷔 공연을 가졌다. 파리 오페라 사상 최고의 티켓 가격을 기록한 이날, 프랑스 대통령 부부를 비롯해 찰리 채플린, 브리짓 바르도, 에드워드와 심슨 부인 부부 같은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고, 이곳에서 선박업을 하는 그리스 출신의 오나시스(Aristotle onassis)를 만나 연인이 되었다.

 

 

  ○영원한 디바, 마리아 칼라스

 

  1960년 이후로 칼라스는 무대에 서는 횟수를 부쩍 줄였다. 1958년 칼라스는 스물여덟 차례 무대에 섰지만 1960년에는 단 일곱 번, 이듬해에는 다섯 번 무대에 섰고, 1963년에는 오페라 무대엔 한 번도 서지 않고 콘서트와 녹음만 했다. 1965년 5월 29일, 파리에서 예정된 〈노르마〉 공연의 마지막 무대에서는 공연 중간에 쓰러졌고, 런던에서는 4회 공연하기로 했던 〈토스카〉를 1회만 공연해야했다.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서 비올레타 역을 맡은 마리아 칼라스 (1958년)

ⓒ Houston Rogers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오페라 〈토스카〉에서의 마리아 칼라스

ⓒ Hulton-Deutsch Collection / CORBIS | All rights reserved


 

  이후 칼라스는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를 선언하고,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마스터클래스를 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생애 마지막 활동은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Giuseppe Di Stefano)와 함께 7개월간의 순회 연주를 한 것이다. 1977년 9월 16일 마리아 칼라스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 후에도 그녀는 최고의 디바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리아 칼라스는 미국 ABC 방송에서 선정한 20세기를 빛낸 100인의 여성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칼라스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되는 2007년에는 그리스에서 ‘마리아 칼라스의 해’를 선포하고 화려한 기념 공연과 공식 행사를 개최하는 등 세상을 떠난 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전설의 디바를 기억하는 움직임은 계속 되고 있다.

 

 

 

세상을 떠나기 전 마리아 칼라스가 머물던 파리의 한 아파트

ⓒ Mu / imedia Commons | CC BY-SA 3.0

 

 

○글: 정주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이론전공 졸업 및 동대학원에서 음악학 석사와 경영학 석사를 졸업하고 음악학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 기자, 한국교육방송 〈서양음악기행〉 작가를 역임하고, 국립오페라단 교실 속 오페라 여행 대본, 키즈 오페라 〈울려라 소리나무〉의 대본을 집필하였다. 현재는 KBS 클래식 FM 〈장일범의 가정음악〉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경희대 사회교육원과 영남대학교에 출강 중이다. 저서로는 《독재자의 노래》(공저, 한울, 2012)가 있다. 출처: 클래식 백과, <음악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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