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록》
이태준저 | 깊은 샘
상허 이태준은 우리 근대 문학의 전개과정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역할을 했던 작가 중 한사람이다. 이 책은 이태준 수필집『무서록』과 기타 수필로 이루어져 있다. 앞부분「무서록」은 1944년 박문서관(博文書館) 3판본을 원본으로 하여 전부를 실었고, 뒷부분「기타」는 이태준이 여러 잡지등에 썼던 수필 중에서 구할 수 있는 원고는 대부분 추려 실었다.
○작가 소개
190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1909년 망명하는 부친을 따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가 그해 8월 부친의 사망으로 귀국하였다. 1912년 모친마저 별세하자 철원의 친척집에서 성장하였다.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동맹휴교의 주모자로 지적되어 1924년 퇴학하였다.
1924년 학교 신문 [휘문 2호]에 단편동화 「물고기 이야기」를 처음 발표했다. 1925년 문예지『조선문단』에 「오몽녀」가 입선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27년 신문·우유 배달 등을 하며 ‘공기만을 먹고사는’ 궁핍한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귀국,『개벽』과 『조선중앙일보』의 기자, 『문장』지 편집자로 활동하였다. 1933년 박태원·이효석 등과 함께 ‘구인회’를 조직하였다. 1934년 첫 단편집 『달밤』 출간을 시작으로 『가마귀』, 『사상의 월야』, 장편소설 『해방전후』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1930년대 전후에 아동잡지 [어린이]에 발표한 많은 동화들은 여전히 많은 어린이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주고 있다. 해방 후에는 문학가동맹, 남조선민전등 조직에 참여하다가 1946년 월북하였다.
‘구인회’ 활동 과거와 사상성을 이유로 임화, 김남천과 함께 가혹한 비판을 받고 숙청되어 함흥노동신문사 교정원, 콘크리트 블록 공장의 파고철 수집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960년대 초 산간 협동농장에서 병사하였다는 설이 있다. 저서로 단편소설집 『달밤』 『가마귀』 『복덕방』 『해방 전후』 『구원久遠의 여상女像』 『딸 삼형제』 『사상思想』, 수필집 『무서록』, 문장론 『문장강화』 『상허 문학독본』 등이 있다.
○책 속으로
물
나는 물을 보고 있다.
물은 아름답게 흘러간다.
흙 속에서 스며나와 흙 위에 흐르는 물, 그러나 흙물이 아니요 정한 유리그릇에 담긴 듯 진공 같은 물. 그런 물이 풀잎을 스치며 조각돌에 잔물결을 일으키며 푸른 하늘 아래 즐겁게 노래하며 흘러가고 있다.
물은 아름답다. 흐르는 모양, 흐르는 소리도 아름답거니와 생각하면 이의 맑은 덕, 남의 더러움을 씻어는 줄지언정. 남을 더럽힐 줄 모르는 어진 덕이 이에게 있는 것이다. 이를 대할 때 얼마나 마음을 맑힐 수 있고 이를 사괴일 때 얼마나 깨끗이 할 수 있는 것인가!
물은 보면 즐겁기도 하다. 이에겐 언제든지 커다란 즐거움이 있다. 여울을 만나 노래할 수 있는 것만 이의 즐거움이 아니다. 산과 산으로 가로막되 덤비는 일없이 고요한 그대로 고이고 고이어 나중날 넘쳐 흘러가는 그 유유무언(悠悠無言)의 낙관(樂觀), 얼마나 큰 즐거움인가! 독에 퍼 넣으면 독 속에서, 땅 속 좁은 철관에 몰아놓으면 몰아넣는 그대로 능인자안(能忍自安)한다.
물은 성(聖)스럽다. 무심히 흐르되 어별(魚鼈)이 이의 품에 살고 논, 밭, 과수원이 이 무심한 이로 인해 윤택하다.
물의 덕을 힘입지 않는 생물이 무엇인가?
아름다운 물, 기쁜 물, 고마운 물, 지자(智者) 노자(老子)는 일즉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하였다.
---P. 17~18
기질에 맞는 것을 쓴 작가에게는 상식 혹은 개념이상의 창조가 있다.그러나 기질에 맞지 않는 것을 쓴 작가에게는 기껏해야 상식이요.개념 정도다.종교는 윤리학이기보다는 차라리 미신이기를 주장한다.문학은 사상이기보다는 차라리 감정이기를 주장해야 할 것이 철학이 아니라 예술인 소이(所以)다.감정이란 사상 이전의 사상이다.이미 상식화된 학문화된 사상은 철학의 것이요,문학의 것은 아니다. P.53
사람의 가장 고귀한 권능인 '생각하는 자유'가 우리에게로 왔다. 여성 여러분도 지금 생각의 홍수 속에서 차라리 헤쳐 나갈 방향에 방황할 줄 안다.
우리는 완전한 해방이 아직 아니다. 먼저 민족으로서 완전해방 완전독립에 매진해야겠다. 민족 자체의 해방이 없이 계급해방도, 여성해방도 존재할 수 없을 뿐더러 의미부터 없다. 인류의 질서단위로 '민족'만이 가장 자연이요 가장 합리적인 것이다. 민족으로 해방되고도 민족 속에 권리 독점하는 계급이 남는다면 그때는 계급타파가 있어야 할 것이다. 계급의 차별마저 없어진 연후에 당연 등장할 것은 여성문제일 것이다. 남존여비의 현실은 그 관념에서부터 소멸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여존남비로 내달아도 잘못이다. 그것은 폐해를 근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폐해의 위치만을 바꾸어 놓는 것이니까.
첫째, 민족의 완전해방
둘째, 계급의 완전해방
셋째, 여성의 완전해방
이 순서가 없이 덤비면 서로 뒤죽박죽이 되고 말 것이다. 민족의 완전해방이란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다. 소군과 미군이 거둬 가고 우리 정부가 선다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으로 독립되지 않고는 사상누각인 것이다. 우리 정부가 섰다고 해서 곧 현재의 그렇지 않아도 미약한 이 생산 체제를 뒤엎는 날에는 일시 계급타파는 될지 모르나 우리 민족은 다시 전체가 경제적으로 남의 노예가 될 숙명에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라고 해서 전날 일본제국주의가 속여 인식시킨대로 공연히 꺼릴 것은 없다. 제국주의란 얼마나 악독한 것이었는가. 나는 무슨 주의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 악독한 제국주의에 가장 준열峻烈한 처단을 내리었고 그 가장 많은 피해자 구출한 것이라면 민주주의거나 공산주의거나에 대하여 우리는 적어도 제국주의가 오인시켜 준 관념만은 버리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진의를 파악한 뒤에 그 두 가지 다 현대라는 것과 조선이라는 것에 합리화시켜야 할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혈기에 치우치기 쉬운 청년인 우리는, 더구나 문화면에 종사하는 우리는 남녀를 물론하고 민족의 총역량을 효과적이게 집중시키기를 의도하되, 우선 이런 선후의 분별이 필요할까 생각한다. 《여성문화》1945년 12월
--- p. 302~303
오래 살고 싶다.
좋은 글을 써보려면 공부도 공부려니와 오래 살아야 될 것 같다. 적어도 천명을 안다는 50에서부터 60, 70, 100에 이르기까지 그 총명. 고담의 노경속에서오래 살아보고 싶다. 그래서 인생의 깊은 가을을 지나 농익은 능금처럼 인생으로 한번 흠뻑 익어보고 싶은 것이다.
좋은 글을 써보려면 공부도 공부려니와 오래 살아야 될 것 같다. 적어도 천명을 안다는 50에서부터 60, 70, 100에 이르기까지 그 총명. 고담의 노경속에서오래 살아보고 싶다. 그래서 인생의 깊은 가을을 지나 농익은 능금처럼 인생으로 한번 흠뻑 익어보고 싶은 것이다. P. 20-21
국화를 위해서는 가을밤도 길지 못하다. 꽃이 이울기를 못 기다려 물이 언다. 윗목에 들여놓고 덧문을 닫으면 방안은 더욱 향기롭고 품지는 못하되 꼬초가 더불어 누울 수 있는 것. 가을밤의 호사다. 나와 국화뿐이려니 하면 귀뚜리란 놈이 화분에 묻어 들어왔다가 울어대는 것도 싫지는 않다. 가을꽃들은 아지랑이와 새소리를 모른다. 찬 달빛과 늙은 벌레 소리에 피고 지는 것이 그들의 슬픔이요 또한 명예이다. P.39
나무들은 아직 묵묵히 서 있다. 봄은 아직 몇천 리밖에 있는 듯하다. 그러나 나무 아래 가까이 설 때마다 나는 진작부터 봄을 느낀다. 아무 나무나 한 가지 휘어 잡아보면 그 도틈도틈 맺혀진 눈들. 하룻밤 세우만 내려주면 하루아침 따스한 햇발만 쪼여주면 곧 꽃피리라는 소근거림이 한 봉지씩 들어있는 것이다. 봄아 어서 오라! 겨울나무 아래를 거닐면 봄이 급하다. P.106
한 시간 뒤에는 잇짚 지붕들도 흰 빨래 울타리들도 다 사라졌다. 맷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 어린아이처럼 타박거리는 내 발소리뿐. 나는 몇 번이나 발소리를 멈추고 서서 귀를 밝혀보았다. 아무 소리도 오는 데가 없었다. 그 유구함이 바다보다도 오히려 호젓하였다.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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