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 고정희 유고시집
고정희(지은이) / 창비/ 1992-05-01
화약냄새보다 더 강한 시의 향기를 뿜어냈던 서정시인이자 여성운동가로서 짧고 정열적으로 살다 불의의 사고로 타계한 고정희의 유고시집. 여기에 실린 「밥과 자본주의」,「외경 읽기」 연작, 통일굿 마당시 등은 기독교적·민중적·여성해방적 시각으로 민족통일과 민중해방에 대한 희망과 투쟁을 노래하고 있다. 시인 화보 및 연보 수록.
○책 속으로
새 시대 주기도문
고정희
권력의 꼭대기에 앉아 계신
우리 자본님
가진 자의 힘을 악랄하게 하옵시매
지상에서 자본이 힘 있는 것같이
개인의 삶에서도 막강해지이다
나날에 필요한 먹이사슬을 주옵시매
나보다 힘없는 자가 내 먹이사슬이 되고
내가 나보다 힘 있는 자의
먹이사슬이 된 것같이
보다 강한 나라의 축재를 북돋으사
다만 정의나 평화에서 멀어지게 하소서
지배와 권력과 행복의 근본이
영원히 자본의 식민통치에 있아옵니다(상향~)
○저자 소개
1975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실락원 기행』 『초혼제』 『이 시대의 아벨』 『눈물꽃』 『지리산의 봄』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 『광주의 눈물비』 『여성해방출사표』 『아름다운 사람 하나』,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등이 있다.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했다. 1991년 6월 9일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매일, 시 한 잔 : 두 번째>,<이 시대의 아벨> … 총 22종
○목차
제1부 밥과 자본주의
밥과 자본주의―민중의 밥
밥과 자본주의―아시아의 아이에게
밥과 자본주의―브로드웨이를 지나며
밥과 자본주의―아시아의 밥상문화
밥과 자본주의―하녀 유니폼을 입은 자매에게
밥과 자본주의―악령의 시대, 그리고 사랑
밥과 자본주의―새 시대 주기도문
밥과 자본주의―밥은 모든 밥상에 놓인 게 아니란다
밥과 자본주의―다시 악령의 시대를 묵상함
밥과 자본주의―행방불명 되신 하느님께 보내는 출소장
밥과 자본주의―가진자의 일곱 가지 복
밥과 자본주의―구정동아 구정동아
밥과 자본주의―푸에르토 갈레라 쪽지
밥과 자본주의―우리를 불지르고 싶게 하는 것들
밥과 자본주의―그러나 너를 일으키는 힘은 우리로부터 나온다
밥과 자본주의―왜밥·왜자·왜교를 경고함
밥과 자본주의―해방절 도성에 찾아오신 예수
밥과 자본주의―평화를 위한 묵상기도
밥과 자본주의―우리 시대 산상수훈
밥과 자본주의―신 없이 사는 시대의 일곱 가지 복
밥과 자본주의―코레히도 아일랜드의 증언
밥과 자본주의―죽은자들의 대리석 빌리지 풍경
밥과 자본주의―호세 리잘이 다시 쓰는 시
밥과 자본주의―몸바쳐 밥을 사는 사람 내력 한마당
밥과 자본주의―희년을 향한 우리의 고백기도
밥과 자본주의―밥을 나누는 노래
제2부 외경읽기
외경읽기―브로부도르 사원의 부처님
외경읽기―손이 여덟 개인 신의 아내와 나눈 대화
외경읽기―눈물샘에 관한 몇 가지 고백
외경읽기―농사꾼이 머리노동자에게
외경읽기―그대가 두 손으로 국수사발 들어올릴 때
외경읽기―당한 역사는 잠들지 않는다
외경읽기―전봉준이 서울에게
외경읽기―성곽에 둘러싸인 외로움 건드리기 혹은 부활
외경읽기―귀향의 노래
외경읽기―어느날의 창세기
외경읽기―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외경읽기―여자가 되는 것은 사자와 사는 일인가
외경읽기―할말을 다하지 못하고 사는 혀를 위한 잠언시편
외경읽기―바이러스 엑스를 경보함
외경읽기―다시 오월에 부르는 노래
외경읽기―몌별사, 몌별사를 쓰는 봄이라고
제3부 몸통일 마음통일 밥통일이로다
첫째마당 남남북녀 초례청
1. 혼례청 인사
2. 신랑신부 들어오는 노래
3. 혼인을 서약하는 노래
4. 남남북녀 사랑노래
5. 혼인을 축하하는 시
둘째마당 통일고사
6. 통일자축 고사문
7. 푸닥거리―허튼귀신 물러가라
셋째마당 대동놀이
8. 송득수의 회심가
9. 백제 신정읍사
10. 고려 신만전춘별사
11. 황진이 신사랑가
12. 이옥봉 신상봉가
뒤풀이 어쩔씨구 옹헤야
제4부
사십대
독신자
○남성 문단이 홀대한 아시아의 페미니스트 시인
- 이세아 기자
- 승인 2021.06.01 07:3/ 수정 2021-06-01 08:3
[고정희 시인 30주기 ②]
소외된 민중, 더 소외된 여성을 껴안고
여성운동의 대중화 고민...여성연대 노래한 시인
아시아 뒤덮은 자본주의·식민주의 꿰뚫고
한국 넘어 아시아의 페미니스트 시인으로
“생전이나 지금이나 공고한 남성중심적 문단서 홀대받아”
고정희 시인은 한국을 넘어 아시아 민중과 여성의 현실을 고민한 페미니스트였다. ⓒ여성신문
소외된 민중, 더 소외된 여성을 껴안고
여성운동의 대중화 고민...여성연대 노래한 시인
고정희 시인은 여성 위인부터 5·18 민주화운동을 겪은 여성들, 도시의 여성 노동자들, 평범한 주부까지 역사가 억압하거나 홀대했던 여성의 자아에 해방의 언어를 선물했다. 김정란 시인은 2005년 5월 여성신문 기고에서 “고정희는 기독교적 세계관으로부터 출발해 민중에 대한 사랑을 거쳐, 민중 논의에서마저 배제된 여성들을 발견해 낸다”고 평했다. 특히 5월 광주를 그린 시가 “억압당하는 민중의 몸에 가해진 폭력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그대로 뒤집어 에너지로 뒤바꾸는 놀라운 역설의 미학을 보여준다”고 했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 1983년 『이 시대의 아벨』 수록 「상한 영혼을 위하여」 중
오매, 미친년 오네
넋나간 오월 미친년 오네
쓸쓸한 쓸쓸한 미친년 오네
산발한 미친년 오네
젖가슴 도려낸 미친년 오네
눈물 핏물 뒤집어쓴 미친년 오네
옷고름 뜯겨진 미친년
사방에서 돌맞은 미친년
돌맞아 팔다리 까진 미친년
쓸개 콩팥 빼놓은 미친년 오네
오오 오월 미친년 오네
- 1986년 『눈물꽃』 수록 「오매, 미친년 오네」 중
고정희 시인의 시집 『여성해방 출사표』(1990) ⓒ여성신문
고정희 시인이 본격적으로 페미니즘의 목소리를 높인 것은 1984년 여성주의 문화운동 모임 ‘또 하나의 문화’를 창립하면서부터다. 1980년대 리얼리즘 논의가 한창일 때 ‘여성주의적 현실주의’라는 용어를 만들고 여성해방문학을 주창했다. 자신이 읽은 한국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분석해 여성문학의 성취와 비전을 탐색하는 ‘여성사 새로 쓰기’ 연구에도 힘썼다. 시인의 논문은 한국 여성문학 비평의 출발점이 됐다. ‘여성운동’과 ‘문학’을 대립 개념으로 여기던 시대에 ‘창작이 곧 운동’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시인은 창작의 범위를 넘어 사회정치적으로 여성의 현실을 바꿀 방법을 도모했다. 1988년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맡으며 여성운동의 대중화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여성신문 창간 선언문에서 ‘자매애’가 “남자를 움직이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우주의 축을 옮기는 힘”이라며 여성 연대의 힘을 강조했다. 1991년 타계 전까지도 가부장제에 길든 여성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자고 노래했다.
1988년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맡은 고정희 시인은 ‘여성신문 0호’에 게재한 창간 선언문에서 ‘자매애’가 “남자를 움직이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우주의 축을 옮기는 힘”이라며 여성 연대의 힘을 강조했다. ⓒ여성신문
우리 서로 봇물을 트자
할머니의 노동을 어루만지고
어머니의 모습을 씻어 주던
차랑차랑한 봇물을 이제 트자
벙어리 삼년세월 봇물을 트자
귀머거리 삼년세월 봇물을 트자
눈먼 삼년세월 봇물을 트자
달빛 쏟아지는 봇물을 트자
할머니는 밥이 아니어도 좋아라
어머니는 떡이 아니어도 좋아라
여자는 남자에게 남자는 여자에게
한반도 덮고 남을 봇물을 터서
석삼년 말라터진 전답을 일으키자
일곱삼년 가뭄든 강산을 적시자
- 1987년 「또 하나의 문화」 제3호 권두시 「우리 봇물을 트자」 중
“빗방울이 다른 빗방울과 만나 도랑을 이뤘습니다. 도랑물이 다른 도랑물과 만나 개울을 이뤘습니다. 개울물이 다른 개울물과 만나 시냇물을 이뤘습니다. 시냇물이 다른 시냇물과 만나 강을 이뤘습니다. 작은 강과 큰 강이 만나 한강을 이루고 북한강을 이루고 낙동강을 이루고 영산강과 섬진강을 이루며 흘러갔습니다. 강은 살아 있는 모든 것과 따뜻한 동행을 이루며 흐르고 다시 흘러갑니다. 여성신문과 독자는 하나의 강입니다. 때론 부질없고 시원찮고 때로 못나고 어리석은 동반자라 하더라도, 만고풍상을 견뎌내고 비로소 광야에 이르는 물의 힘과 지혜로 여성신문은 뻗어나가겠습니다.”
- 1988년 12월2일 여성신문 창간호,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 - 따뜻한 동행’ 중
여자가 뭉치면 무엇이 되나?
여자가 뭉치면 사랑을 낳는다네
모든 여자는 생명을 낳네
모든 생명은 자유를 낳네
모든 자유는 해방을 낳네
모든 해방은 평화를 낳네
모든 평화는 살림을 낳네
모든 살림은 평등을 낳네
모든 평등은 행복을 낳는다네
- 1990년 시집 『여성해방출사표』 수록 「여자가 뭉치면 새 세상 된다네」 중
아시아 뒤덮은 자본주의·식민주의 꿰뚫고
한국 넘어 아시아의 페미니스트 시인으로
한국을 넘어 아시아 민중과 여성의 현실도 고민했다. 유고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1992)에 실린 「밥과 자본주의」 연작시에서는 탈식민주의적 페미니즘의 단계로 나아간다. 이소희 한양여대 교수는 “한국뿐 아니라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의 여성들이 경험한 자본주의와 신식민주의의 현실을 꿰뚫어 보고 이러한 양상들을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시에 담아낸 아시아의 페미니스트 시인”이라고 평가했다(『여성주의 문학의 선구자 고정희의 삶과 문학』, 2018).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시아엔
네 탯줄을 결정짓고
네 길을 결정짓는 힘이 따로 있었구나
네가 네 발로 걷기도 전에 아시아엔
네가 두 손으로 절하며 받아야 할
밥과 미끼가 기다리고 있구나
고개를 똑바로 들려무나 아이야
아시아의 운동장을 뛰어가려무나
네가 두 손으로 절하며 밥을 받을 때
그것은 아시아가 절하는 거란다
네가 무릎 끓며 미끼를 받을 때
그것은 아시아가 무릎 끊는 거란다
네가 숨죽여 고개 숙일 때
그것은 아시아의 하느님이 고개 숙이는 거란다
- 1992년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수록 「아시아의 아이에게」 중
고정희 시인의 유고집이 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여성신문
“생전이나 지금이나 공고한 남성중심적 문단서 홀대받아”
그러나 시인이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홀대됐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여성신문은 2005년 5월 “고정희 시인은 시인으로서 뿐 아니라 페미니스트로서 민중운동가, 여성운동가, 탈식민주의적 글쓰기를 실천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고정희 시인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여성운동 영역 내에서만 이야기될 뿐 그가 남긴 업적과 성과에 대한 온전한 평가는 전사회적인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가 생존했을 때와 사후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공고한 남성중심적 문단, 나아가 사회는 변함이 없다”고 보도했다. 시인을 기억하는 이들은 타계 30년인 지금도 동의하는 지적이다.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도 “한편에서는 여성의 고통을 가볍게 아는 ‘머스마’들에 치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족의 고통을 가볍게 아는 ‘기집아’들에 치이면서 그 틈바구니에서 누구보다 무겁게 십자가를 지고 살았던 시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시인공화국 풍경들] <32> 高靜熙의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 한국일보/ 입력 2005. 10. 11. 18:22 수정 2005. 10. 11. 18:22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1992: 이하 '모든 사라지는 것')는 고정희(1948~1991)의 1주기에 맞춰 나온 유고 시집이다. 그렇다고 이 시집의 체제가 출판사의 재량에 따라 짜여진 것은 아니다.
지리산 뱀사골의 급류에 휩쓸려 생을 마감하기 일주일 전쯤, 시인은 출판사 편집자를 찾아가 자신에게 정리된 신작 시집 원고가 있다고 귀띔했다고 한다. '모든 사라지는 것'은 시인의 사후에 경기도 안산 집에서 찾아낸 이 원고를 거의 고스란히 활자화한 것이다.
고정희는 생전에 열 권의 시집을 냈다. 첫 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를 낸 것이 31세 때인 1979년이었음을 생각하면, 그리 길지 않은 문학 이력을 통해 도드라진 다산성을 드러낸 샘이다. 좋은 것은 흔치 않은 법이다. 고정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의 펜끝에서 쏟아져 나온 수많은 시행이 모조리 미적으로 탐스럽지는 않았다.
더러는, 말수를 얼마쯤 줄이고 언어를 조금만 더 벼리며 '시인됨'에 대한 욕심을 부렸으면 고정희 문학이 한결 돋보였을지 모른다는 아쉬움이 고개를 쳐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아쉬움은 또 얼마나 부질없는가. 그가 이미 죽은 시인이어서만이 아니라, 생전의 고정희 자신이 문학을 미적 허영의 전시장으로는 도무지 여기지 않았던 바에야 말이다.
고정희에게 시는 무기였다. 해방을 위한 무기였다. 그 해방은 민족해방이었고, 민중해방이었고, 특히 여성해방이었다. 박남수와 김춘수의 영향 아래 시를 쓰기 시작한 시인이 문학을 (넓은 의미의) 이념 속에 용해시킨 것은 별난 일이다. 이것은 고정희의 시가 아름다움을 경멸했다는 뜻이 아니다.
고정희의 적잖은 시들은 아름다움으로도 뛰어나다. 그가 문학을 이념 속에 용해시켰다는 것은 그저, 그의 내면 속에서, 이념에 대한 성심이 아름다움에 대한 성심을 자주 이겨냈다는 뜻일 뿐이다. 아니, 이 진술을 이렇게 고치는 것이 좋겠다. 고정희에게는, 차라리, 해방의 이념이 곧 아름다움이었다고 말이다.
이 내용주의자에게 형식에 대한 모색의 열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판소리나 마당굿은 고정희의 눈에 그 해방 이념에 어울리는 그릇으로 비쳤던 듯하다. 그는 이 전통 연행 장르를 문학적으로 차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내용으로서의 해방 이념과 형식으로서의 전통주의는 '모든 사라지는 것'에서도 여전하니, 각 부의 표제를 이루는 '밥과 자본주의' '외경 읽기', '통일굿마당'에서 그 지향이 이미 또렷하다.
은퇴한 매춘여성을 화자로 내세운 '몸바쳐 밥을 사는 사람 내력 한마당'은, 서사성이 다소 무르기는 하지만, 김지하가 바탕을 마련한 담시의 계보를 잇고 있다.
고정희의 마음은 서울 수유리에 둥지를 튼 듯하다. 수유리는 그가 다닌 한국신학대학과 4.19묘지의 공간이다. 고정희의 시세계는 압도적으로 기독교적이지만, 그의 기독교는 독차지의 종교가 아니라 나눔의 종교였고, 제1세계의 종교가 아니라 (제1세계까지를 감싸안는) 제3세계의 종교였으며, 남성의 종교가 아니라 (남성까지를 보듬어내는) 여성의 종교였다.
고정희의 많은 기독교 시가 그 흔한 예배문학으로 굴러 떨어지지 않고 인간해방문학으로, 저항의 문학으로 고양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신학대학(자체가 민중신학의 한 요람이기도 했지만) 근처에 4.19묘지가 있었다는 사실과 조금은 줄이 닿아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의 성경은 '외경'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성경 구절들을 군데군데 패러디한 그의 시 속에서, 인간의 평등과 해방을 가로막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심지어 교회나 하느님까지도 신랄한 풍자와 분노의 표적이 된다. 주류 기독교 신자는 이 기독교 시인이 드러내는 신앙의 불온함을 참아내기 힘들 것이다.
고정희의 예수는 서울 강남의 부자 마을에서 쫓겨난 뒤 "강남아, 가파르나움아/ 가혹하고 고통스런 환란의 시대에/ 내 백성의 피땀으로 호화스럼을 누린 자는 다/ 무서운 폐허에 떨어질 것이다!/ 정녕 나는 너를 어쩌란 말이냐/ 내 속에 네가 있고 네 땅에 내 백성이 거하지 않는구나"라며 분노와 탄식을 내뱉다가도, "당신은 타락을 징벌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기에/ 그 오심 속에 이미 척도가 있습니다/ 애초부터 불완전한 인간에게 완전을 요구하지 마시고/ 완전해지려는 마음을 받으소서('구정동아 구정동아')라는 어느 가난한 여자의 변론에 마음을 돌리는 사랑의 메시아다.
이 시집의 한 발칙한 화자는 "아아 살인병기를 자처하는 다국적군이 실로 참혹하게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땅을 피바다로 싹쓸이할 때도 당신의 말씀은 침묵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미국은 새로운 전쟁시대의 첫 승리자이다' 부시가 오만불손하게 음성을 높일 때, 그리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스무 번씩 기립박수를 칠 때도 당신은 온전히 침묵했"다고 하느님을 힐난한 뒤, "당신은 교회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당탔?교회의 창고부터 열어야"('행방불명되신 하느님께 보내는 출소장') 한다고 다그친다.
왜냐하면 "이 곤궁한 시대에/ 교회는 실로 너무 많은 것을 가졌"기 때문이다. "교회는 너무 많은 재물을 가졌고 너무 많은 거짓을 가졌고/ 너무 많은 보태기 십자가를 가졌고", "너무 많은 파당과 너무 많은 미움과 너무 많은 철조망과 벽을 가졌"기 때문이다.
위에 인용한 시에서 전쟁은 제1차 걸프전이고, 부시는 지금 미국 대통령의 아버지를 가리킨다. 시인이 지리산에서 살아남아 아들 부시의 이라크 침략을 볼 수 있었다면, 그는 뭐라 말했을까? 이 시집이 나오고 흐른 10여 년 동안 고정희의 하느님은 제 자식들로부터 한결 더 멀어진 듯하다.
시가 고정희에게 해방의 무기였다면, 그 해방의 전략은 사랑이었다. 그러니까, 고정희에게 시는, 우리가 다음주에 살필 김남주의 한 시집 제목대로, '사랑의 무기'이기도 했던 셈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종기를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뇌졸중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자궁암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섬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풀잎을 모른다"('눈물샘에 관한 몇가지 고백'). 그리고 고정희에게 사랑의 실천 전술은 밥의 나눔이었다.
고정희 생각에 "밥은 다만 나누는 힘이다"('아시아의 밥상문화'). "밥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것이란다/ 네가 밥을 함께 나눌 친구를 갖지 못했다면/ 누군가는 지금 밥그릇이 비어있단다/ 네가 함께 웃을 친구를 아직 갖지 못했다면/ 누군가는 지금 울고 있는 거란다/ 이 밥그릇 속에 이 밥 한 그릇 속에/ 이 세상 모든 슬픔의 비밀이 들어있단다"('밥은 모든 밥상에 놓인 게 아니란다').
지금 이 곳의 현실 속에서 "아아 밥은 가난한 백성의 쇠사슬/ 밥은 민중을 후려치는 채찍/ 밥은 죄없는 목숨을 묶는 오랏줄/ 밥은 영혼을 죽이는 총칼"이지만, "그러나 그러나 여기 그 나라가 온다면/ 밥은 평등이리라/ 밥은 평화/ 밥은 해방이리라/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온다면/ 밥은 함께 나누는 사랑/ 밥은 함께 누리는 기쁨/ 밥은 하나되는 성찬"('민중의 밥')이 될 것이다.
'모든 사라지는 것'에 묶인 시들의 상당 부분은 시인이 마닐라의 아시아 종교음악연구소 초청으로 필리핀에 가 '탈식민지 시와 음악 워크숍'에 참가하던 한 해 동안 쓰여졌다. 이 시집에 제3세계주의가 깊게 새겨진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고정희의 화자들에게 밥의 문제는 계급문제이면서 동시에 민족문제이기도 하다.
시인이 필리핀 반식민주의 운동가의 목소리를 빌어 "함께 가자, 아시아인이여/ 우리는 이제 서로 손을 잡아야 한다/ 침략의 술잔으로 축배를 들던/ 백인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할 때, 제 자매가 "흰둥이의 퍼킹머신이 되"('호세 리잘이 다시 쓰는 시')었다고 분노할 때, 그 목소리는 반세기 전 대동아공영권의 미망을 다시 불러내는 주문처럼 들려 섬뜩하지만, 한편으로 "아시안이 아시안의 적이던 시대도 끝나야 한다"는 절규는 지금까지의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고 평화로운 아시아 공동의 집을 제 미래로 삼아야 할 아시아인들에게는 너무나 정당하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표제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의 마지막 두 연은 이렇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고정희는 여백으로 남아있다. 커다란 여백으로 남아있다. 여백이란 그의 말대로 쓸쓸함이다.
판소리·마당굿 형식을 빌어 평등을 가로막는 것들을 향해 풍자와 분노를 쏟아내
기독교적 세계관을 넘어 사랑의 실천을… 밥의 나눔의 노래
▲ 새 시대 주기도문
권력의 꼭대기에 앉아 계신 우리 자본님
가진자의 힘을 악랄하게 하옵시매
지상에서 자본이 힘있는 것같이
개인의 삶에서도 막강해지이다
나날에 필요한 먹이사슬을 주옵시매
나보다 힘없는 자가 내 먹이가 되고
내가 나보다 힘있는 자의 먹이가 된 것같이
보다 강한 나라의 축재를 복돋으사
다만 정의나 평화에서 멀어지게 하소서
지배와 권력과 행복의 근본이 영원히 자본의 식민통치에 있사옵니다(상향~)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한국일보 ww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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