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소중했던가
이성복
버스가 지리산 휴게소에서 십 분간 쉴 때,
흘러간 뽕짝 들으며 가판대 도색잡지나 뒤적이다가,
자판기 커피 뽑아 한 모금 마시는데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종이컵 커피가 출렁거려 불에 데인 듯 뜨거워도,
한사코 버스를 세워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가쁜 숨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회청색 여름 양복은 온통 커피 얼룩.
화끈 거리는 손등 손바닥 쓸며,
바닥에 남은 커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했던가.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는 삶은 꿈이다.
- 《달의 이마에는 물결 무늬 자국》, (2003, 문학과 지성사)
“내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는 삶이 꿈이다.’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인 줄, 현실인 줄 압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에서 삶이 깨지기 전에는 삶이 꿈인 줄 모릅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어떤 지점이 있겠지요.
다시 말해 꿈속에서 오만 가지 일이 있지만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꿈 깨면 꿈 깬 ‘나’만 남는 거지. 우리 인생도 모든 게 리얼하지만, 눈감으면 아무것도 없잖아요. 다만 그것을 그렇게 생각하고 보았다는 의식만 남는 거지요. 굳이 말하자면 그래요.
그러니까 그게 문학과 맞닿는 지점이기도 하고, 문학과 헤어지는 지점이기도 해요. 꿈 안에 있는 것을 현실에서 보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거든. 그런데 문학은 일종의 다른 꿈이니 인생의 또 다른 꿈을 (문학으로) 꾸는 것이니까.”
“시는 꿈이라는 현실과 현실이라는 꿈 사이에서 꾸는 더 짧은 꿈이에요”
(월간 조선-[문인과의 차 한 잔] -인터뷰 중에서)
○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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