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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詩를 읽다

나는 시인이랍니다/ 심보선

금동원(琴東媛) 2022. 2. 19. 22:48

나는 시인이랍니다

 

심보선

 

오늘은 오랜만에 산책을 했지요.

되도록 많은 것을 생각하면서요.

당신, 그리고 당신 아닌 모든 사람들에 대해.

지난해의 친구들, 그중 제일 조용한 친구에 대해.

내일의 미망으로 쫓겨난

희미한 빛과 가녀린 쥐에 대해.

지워지지 않는 지상의 얼굴 위로.

나는 한껏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갔지요.

 

중간에 아는 시인을 봤지만 모른 체했어요.

시인끼리는 서로 모른 체 하는게 좋은 일이랍니다.

시인은 항상 좀도둑처럼 긴장하고 있지요.

느릿느릿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들은 가장 사소한 풍경에서

가장 치명적인 색깔을 꺼내 달아나는 중이니까요.

 

나는 멀어지는 시인의 뒷모습에 대고 속삭였죠.

잘 아시겠지만 우리는 시인이랍니다.

오늘 우리가 응시한 것들 중에

적어도 개와 아이는 움찔했겠지요.

하지만 선량한 우리는 늘 말하죠.

무서워하지 말아요. 우리는 시인이랍니다.

 

나는 한 번도 와보지 않은 공간에 도착했어요.

빈 상자와 잡동사니가 아무렇게나 쌓인 복도였죠.

북도 끝에는 늙은 청소부가 바닥에 주저앉아 졸고 있었어요.

반대편 끝에는 처음 보는 연구소가 있었는데

이름은 평화연구소였어요.

나는 노크를 하며 생각했죠.

평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어요.

 

나는 낡은 철제 의자 하나를 펼쳐 앉았죠.

그곳의 분위기는 오래전 방문했던 예배당 같았어요.

나는 거기 앉아 되도록 많은 것을 생각했어요.

내가 까맣게 잊었던 것들에 대해, 이를테면

지난 금요일에는 내가 시인이고 자시고

그냥 인간이고 싶었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소원을 빌기 위해 두 손을 모았지만

어색하고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답니다.

나는 문득 늙은 청소부에게 소리치고 싶었지요.

어이, 아저씨, 금요일 나는 인간이고 싶었어요!

나는 화들짝 깨어난 그에게 말하겠지요.

놀라지 말아요. 나는 시인이랍니다.

 

나는 건물 밖으로 나갔어요.

그동안 몸이 많이 아팠지만 이젠 괜찮아요.

시침이 늘었고 수염이 지저분하게 자랐지만

숨 한 번 크게 쉬면 지옥의 강철 문이라도 열어젖힐수 있어요.

아직까지는 입증할 수 있어요.

나 자신에게, 다른 시인에게,

개와 아이에게, 늙은 청소부에게,

인간적 용기가 꿈틀거렸던 금요일에게.

모든 것을 기억하려는 갸륵한 오늘에게.

바닥의 자갈들에게,

허공의 먼지들에게,

내가 시인이라는 사실을,

그것도 알짜배기 시인이라는 사실을 말이에요.

 

그리고 물론 당신에게 나는 말합니다.

잊지 말아요. 나는 시인이랍니다.

슬퍼 말아요. 나는 시인이랍니다.

시는 우리 사이에 벨벳처럼 펼쳐져 있어요.

그것의 양 끝은 우리가 잠들 때 서로의 머리맡에 놓여 있어요.

 

나는 돌아가신 할머니와 아버지에게,

마침 내일이면 생일을 맞으실 어머니에게,

고모님에게, 여동생에게, 남동생에게,

제수씨에게, 조카들에게 말합니다.

모두들 아무 염려 말아요. 나는 시인이랍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사람들이여, 나는 시인이랍니다.

부디 내게 진실을 묻지 말고 황금을 구하지 말아요.

나는 무엇이 행복이고 무엇이 불행인 줄 몰라요.

그 둘이 마주했을 때,

무엇이 먼저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나는 줄 몰라요.

 

그러니 사람들이여, 명심하세요.

자고로 시인이란 말입니다.

벌꿀과 포도주를 섞은 눈빛으로

술 취한 듯 술 취하지 않은 듯

사물을 조용히 관찰하고 오래오래 생각하는

그런 평범한, 평범한 사람이랍니다.

 

- 《오늘은 잘 모르겠어》, (2017, 문학과 지성사)

 

○작가 소개

시인, 사회학자.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풍경’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5년 만에 첫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2008)를 출간, 시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큰 화제가 되었다. 이후 출간된 시집들 『눈 앞에 없는 사람』(2011), 『오늘은 잘 모르겠어』(2017)도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전공인 예술사회학분야의 연구 또한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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