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마고우》
-강우식/ 리토피아
지은이로부터.1
가만히 생각해 보니
죽음만이 죽마고우가 아니라
詩도 죽마고우였다.
이승에서 배운 게
마음도둑질이라고
시를 팔아 입에 풀칠해 왔다.
그러면서도 늘 시쟁이라고
손가락질만 받아왔으니
걸어온 발이 부끄럽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죽으나 사나 저승에 가서도
시를 쓰겠다는 일념뿐이다.
-2022년 2월 봄을 기다리며
水兄散人 강우식
○시 속으로
죽마고우 竹馬故友
젊었을 때는 곁에 말 걸 상대라도 없으면
세상 혼자 떨어져 사는 거 같아 싫었다.
그것보다는 늙으면 더 외롭다 하는데
딱히 그렇지는 않다.
늘 곁에 누군가 잇는 것 같다.
둘러보니 없긴 없는데 있는 것 같다.
가만히 보니 죽음이다.
당연히 죽음이 날 데려 갈 테니
외톨이로 살아 고독하여도 두렵지 않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미리미리
죽마고우처럼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서다.
사람이니까 죽음도 죽마고우라 부른다.
고향 바다
아내는 나하고는 살 비비며 살만큼 살았으니
이제는 혼자 있고 싶다며
십 오륙년 전에 주소를 고향 바다로 이전했다.
오늘은 분가한 그 바다 앞에서 어디선가
'여보 나 여기 있어요.' 하며 어제이련 듯
물속에서 맑은 얼굴을 쏘옥 내밀 것 같아
행여나 하는 심사로 속 터지도록
안동 답답히 하염없이 서 기다린다.
그사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만나면 마음 속에 두고 못 피웠던
'사랑해'란 말 한마디 간절히 하고 싶어
여태도, 여직까지도 기다린다.
때문에
죽어도 좋다던 옛사랑이
때문에, 때문에 입만 열면
그놈의 코로나 때문에 무서워서
언택트 하잔다. 때문에 라는
탓, 핑계거리가 마음이 짠하다.
안 만나고 안 보면 인지상정으로
있던 정도 멀어지니까
그러면 헤어지는 수밖에 없지.
그 말끝에 세상없는 돌림병이 창궐해도
산 사람이 내일 당장 죽어 나가더라도
움직일 動해야지
어이 꼼짝 없이
방구석 귀신이 되느냐고 해주었다.
요즈음은 유튜부가 대세이니까
내 말도 좋으면 구독 싫으면 거부.
구독 거부 하려해도 아무 것도 없네.
그러니까 詩지.
몸이 집이다
나는 철근처럼 내 뼈로 기초를 세우고
살로 시멘트 외벽처럼 내 몸을 만들어
두 발로는 걷거나 뛰어
움직이는 단독주택을 만들었다.
몸이 집이고 자동차다. 몸으로 다 된다.
자동 네비게이터도 있어
자율 주행과 위험 요소도 피하며
두 팔로는 아무데나 휘젖고 다니는
인지능력이 있는 집을 만들었다.
거기에 상하수도와 자동 화장실도 갖추었다.
이만하면 강남 집 값이 암만 올라도
노숙자되어 서울역 지하도에 낮밤을 자도
아무 걱정이 없는 내 몸이 집인 나를 만들었다.
디오게네스가 왜 그토록 햇볕 하나만 있어도 행복했는지 알겠다.
사람들은 물건을 내 몸 같다고 말하면서도
아직 진짜 사람마음이 담긴 것은 내놓지 못했다.
밤송이
아무도 범접 못할 창으로 촘촘히 무장하고 있는
저 돌멩이 같은 비밀이 궁금해 그 속을 보려고
너무 서둘러 헤집거나 까지 마라.
제철이 되면 그 우주의 견고한 고집도 자연이 된다.
홀딱 벗고 냇가에 뒤어든 아이같이 알몸이 된다.
(餘適)
(.....) 나는 시 쓰면서 이제까지 끊임없이 참회하고 때로는 처절하게 절규하기도 했다. 원죄의 알몸으로 적나라하게 배회하기도 했다. 시는 타고난 팔자다. 나에게 소망이 있다면 나다운 목소리와 티를 내는 것이었다. 죽기 전에 내 목소리가 깃든 누가 읽어도 시인 강우식의 냄새가 묻어나는 시집을 갖고 파서 이 시각까지 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 여기서 짧은 시란 18행 이내의 시를 의미한다. 소박하게 시집의 한 페이지를 넘지 않는 시를 말하며 이름을 넓은 의미에서 2행, 3행, 4행, 기타의 짧은 시를 아우르는 것으로 범박하게 통용하면 어떨까 한다. 또 자유시와 短詩라 내가 스스로 일컬어 온 10행을 넘어선 미묘한 단계를 掌篇小說에 빗대어 掌篇詩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만들어 온 시다.
근일 우리 시단의 흐름도 짧은 시 쪽으로 가는 경향이 있어 넓게 사용해도 괜찮지 않으라 내보인 의견이다. 굳이 掌篇詩의 형식을 말하라면 사륙판시집의 한 페이지를 넘지 않는 詩, 손바닥 만한 詩, 손바닥만한 자리에 써도 좋을 내용과 형식을 갖춘 詩, 掌篇小說의 대칭으로 掌篇詩도 필요하다고 보아 단 의미다.
(......) 좀 낡은 냄새가 날지 모르겠지만 나는 젊은 날에 너무 나대며 쓴 시들보다 늙어 요즈음 차분히 가라앉은 일상사를 시로 읊조리는 것이 좋다. 우리는 흔히 人德이란 말을 자주 입에 올린다. 나는 살아오면서 고맙게도 여러 사람들에게 인덕을 입으며 여기까지 시를 써 올 수 있었다고 믿는다. 덕불고필유인 이웃이 있어 덕이 외롭지 않다는 것은 나에게는 시유동성덕불시가 있어 외롭지 않다는 것이고 시가 외롭지 않다는 것은 바로 人德 때문이라 믿는다.
-「손바닥 시와 書畵 이야기」 중에서
○강우식 시인은 1941년 강원도 주문진에서 출생하여 196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사행시초》, 《마추픽추》, 《바이칼》, 《백야》, 《시학교수》 등이 있다. 성균관대학교 시학 교수로 정년퇴임했다.
'詩 이모저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시대의 아벨 / 고정희 (0) | 2022.06.29 |
---|---|
연인들 / 최승자 (0) | 2022.04.15 |
평론 ‘허수경 후기시론―자연의 고아, 시간의 낙과, 우주의 난민’ (0) | 2022.02.08 |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0) | 2022.01.12 |
시는 상징이다/ 김주연 (0) | 2022.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