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휴일에 단단히 벼르고 있던 책을 정리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다 보니 언제나 작은 서재는 책들로 넘쳐난다. 정기적으로 발송되는 각종 잡지 외에도 새로 출간된 시집을 보내주는 시인들도 많고 평소 읽고 싶어 눈여겨보다 사놓은 책도 제법 많다. 틈틈이 정리하고 일정 분량만큼 규칙적으로 비워내고 기증하고 소비하는데도 책은 산더미처럼 쌓여가기만 한다.
공중파 TV에서 집안의 복잡한 살림살이를 전문가가 정리해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끈 적이 있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끈 것은 집마다 처박혀 있던 쓰레기더미 같은 살림들을 기가 막히게 분산 배치하여 세련되고 깔끔하게 정리해놓은 것이다. 정리 전후를 비교해보면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180도 바뀐 집이 된다. 전문가들의 전문성에 감탄하게 된다.
비결은 비움이었다. 임계치를 넘어선 대부분의 집안 살림은 어디에 어떤 물건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어 찾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다시 필요 때문에 비슷한 가구나 물품들을 사고 다시 살림 도구나 의류는 소비되지 못한 채 쌓여만 간다. 책이 그랬다. 미처 다 읽어보지도 못하는 책에 대한 지적 허영심과 애착, 집요함이 책더미 속에서 살게 했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황홀한 쾌감을 느끼던 열정의 시간도 있었다. 그러나 책도 다른 모든 소비재와 똑같은 짐이며 정리해야 할 현실이다.
일정리의 대명사로 떠오른 '정리의 여신' 일본의 곤도 마리에는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에서 ‘나를 설레게 하는 물건이 아니면 지금 당장 버려라’라고 말한다. 지금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라는 조언이 주는 냉정하고 현실적인 판단에 조금은 마음이 울적해진다. 모든 대상은 설레는 순간이 있다. 설렘은 사람에 대한 것이든 책에 관한 것이든, 추억이고 사랑이고 기억이고 위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단호하고 냉정해져야 하는가.
법정 스님은 ‘무소유’에서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가지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있다는 뜻이다”라고 했다.
이제 책에 대한 소유욕과 그 누구도 곁 눈짓하지 못하게 했던 애착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의미 있는 삶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일상생활 주변을 단순하고 간결하게 만들고 싶다. 한 트럭 분의 책과 이별하며 그것은 이별이 아닌 새로운 만남이리라 깨닫는다.
비우고 비우는 삶, 머릿속 지식과 추억조차 이제는 비워야 한다. 홀가분하고 고요한 공간, 청결하게 비워진 공간이 주는 사색과 성찰이 새로운 상상의 동력이 되었으면 좋겠다. 비워진 공간만큼 새로운 시심(詩心)이 여백의 새로움으로 채워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