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아들다
정현종
녹아들지 않으면
그럴듯하지 않고
즐겁지도 않다
마음은 특히 그렇다.
(지금의 세계는
마음이 만드는 세계가 아니거니와)
녹아들지 않으면
마음은 필경
삶의 전부인 저
진실의 순간을 만나지 못한다.
그런 순간이 없으면
삶은 깡그리 허탕이다.
녹는 일에는
물과 가름과 바람이 있고
살과 피와 무슨 그런 게 있지만
그러나
마음이 녹아들지 않으면
(지금의 세계는
마음이 만드는 세계가 아니거니와)
세계는 잿더미요
삶은 쓰레기 더미이다.
산책
산책을 한다.
그 시간은 이 세상의 시간이 아니고
그 공간은 고해 苦海를 벗어나 있다
세계는 푸른 하늘까지
숨결은 대기 속에......
그렇게 가없는 몸이여.
이 단순한 활동은 얼마나 풍부한가.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듯한 시간이라니!
사물사물하는 보석,
이 시간이 없으면 어떻게 살까.
세상의 시간이 아닌 때를
고해가 아닌 데를 걸어가느니.
◎책 속으로
무슨 시 같은 게 태어나려는
기운,
산기産氣.
늘 그렇듯이
온 우주의 에너지가
씨앗 하나에 모인다.
물질, 반물질
감각, 기억
빛과 어둠.
그 모든 동력들이
고요히 고요히
응축하면서
폭발을 기다리고 있다.
---「한 씨앗」중에서
여기서 저기로 움직이는데,
한때에서 다른 때로 넘어가는데,
그때 흔히 살짝 지나가는 슬픔,
갈피마다 들어 있는 슬픔이여,
만고 지층을 꿰뚫는
지축이여.
---「너 슬픔이여」중에서
아, 별과 별 사이의
거리에 퍼져 있는 음악,
뜻을 알면서 밝아지고
설명을 들으면서 어두워지는
별들의 빛과 그리고
그림자.
시간이 벌인
놀이의 퇴적.
사람의 역사가 남긴
발자국들―
비에 젖고, 눈 덮이고
바람 부는 흔적들……
---「단어들」중에서
맑은 저녁 석양에
하늘의 구름이 발그레하여
너무 이뻐
그 빛깔 하나로
이 세상이 액면 그대로 딴 세상인데,
다시
그 우주적 숨결의 가락
그 자연의 채색의 비밀 아래로
인간 석양 하나 걸어가면서
오래된 시간의 속삭임을 듣는다
오랜 시간의 지층이 그 스스로를 듣는 듯이
---「꿈결과 같이」중에서
◎출판사 리뷰
“제어할 길 없는 본능적 생기”로
세상을 흠뻑 감각하기
지성은 탁월하게
덕성은 원만하게
감성은 아름답게
감각은 생생하게
항상 그렇도록 하면
희망은 저절로 샘솟고
의욕은 저절로 넘치며
사랑에도 저절로 물들 터이니,
나날이 맑은 정신
나날이 뜨거운 가슴
나날이 생생한 몸을
어쩌지 못하리
샘과 꽃과 하늘에 기대어
노래하는 수밖에는.
―「나날이 생생한 몸을」 전문
정현종은 그야말로 ‘감각하는’ 시인이다. 생동하는 자연을 흠씬 탐미하고(「개구리들의 합창이여」 「마음의 과잉을 어쩔 줄 모르겠네」), 고아한 예술 작품에 한껏 탄복하며(「가없는 마음」 「그런 있음에서 저런 부드러움이 흘러나온다」), 아끼는 사람들로부터 얻는 기쁨을 담뿍 표현한다(「항심일가恒心一家」 「오디오 천사」 「마음이 꽃밭이니」 「극진한 마음」 「철학의 맑은 얼굴」). 세상 구석구석에 깃들어 있는 생명력을 벅차도록 느끼고, 생기가 “몸과 마음에 감돌고 살과 피에 흘러” 넘치니, 시인은 노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시인은 맑은 눈과 싱그러운 가슴으로 지은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른다. 그의 시를 읽고 나면 새삼스럽게 ‘살아 있는’ 기분이 드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울어서 싹틔우고 껴안아서 꽃피운
아름답고 쾌적한 정현종의 정원
남을 창조하기 위해
나는 있느니.
남이 곧 나,
남을 잘 살아야
내가 잘 사는 것.
내가 곧 만인이니
만인의 목소리
만인의 그림자에
울고 웃는 사람!
―「배우를 기리는 노래」 부분
정현종의 감각 중 가장 예민하게 발동하는 것은 바로 통각이다. “녹아들지 않으면 그럴듯하지 않고 즐겁지도 않”(「녹아들다」)으므로, 그는 마치 남을 녹여내는 배우처럼 타인의 삶을 살며 그 아픔과 비참마저 충실하게 감각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눈물은 어디선가 발원하여 강을 이루”(「어디선가 눈물은 발원하여」)는 이 터전에서 기꺼이 함께 울고, 삼월 하순의 매화 두 송이처럼 “천지를 다 기울여”(「천지를 다 기울여 매화가」) 전언한다.
온갖 슬픔에 울어본 시인에게 이 세상은 애틋할 수밖에 없다. 시인은 언어와 노래로 세상을 껴안고, 그의 “포옹 속에서”(「포옹」) 모든 것은 싹트며 지구는 꽃핀다. 이렇게 생겨난 시의 정원은 “그 무슨 말 무더기 무슨 이름 그 무슨 기념관 같은 거”(「나 세상 떠날 때」) 대신 따사로운 태양과 그것이 뿜어내는 “눈부신 날빛”(「봄날」)으로 가득하다. “거기 앉아 있고 싶을 만큼 아름”답고 “거기서 쉬고 싶을 만큼 쾌적”(「세상의 구석들」)하도록 정성껏 가꿔진 정현종의 정원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 작가의 말
조시 한 편과 추모시 한 편은
지난 시집에 넣어야 했는데
이번에 찾아서 넣었다.
2022년 10월
정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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