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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사랑이다/ 김주연

금동원(琴東媛) 2023. 2. 11. 00:20

문학은 사랑이다

 

김주연(문학평론가)

 

 

 사랑이라는 말이 귀청을 시끄럽게 때린다. 언제부터인가 장안이 온통 트로트 열풍인데, 그 열풍을 생산, 유통시키고 있는 기관이 티비와 유투브 등의 방송이어서 이들과 단절되지 않는 한 이 열풍을 피할 길이 없다. 문제는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의 제품들인데 이 단어는 인근 영화, 연극등의 장르와 더불어 우리의 감각을 완전히 장악하고 휘저으면서 흘러간다. '사랑'의 압도적인 위세는 오로지 이러한 대중매체로부터 침투해 오는 것만은 아니다. 어디 다른 곳이 있겠는가. '사랑'의 표방은 교회로부터도 사찰로부터도 온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설교를 듣고 '사랑'의 감화를 받고 흡족한 모습으로 귀가한다.

 그러나 세상은 결코 사랑으로 충만해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많은 사랑이 어디로 갔는지 어리둥절할 정도로 사랑은 보이지 않는다. 사랑 타령으로 가득하던 티비화면은 바로 그 옆 채널에서 온갖 증오와 저주의 언어를 쏟아놓는다. 온갖 증오의 범죄들이 인간에 대한 저주와 미움을 폭발시키고 있으며, 상대방에 대한 모략과 폭언이 일상이 된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뉴스는 그 자체로 인간혐오의 현장이다. 그 넘쳐나던 사랑은 어디로 갔는가. 결국 말로 떠도는 사랑은, 사랑의 부재와 결핍에 대한 한탄이며 사랑을 갈구하는 당위의 노래일 뿐 인간에게는 사랑의 능력이 없다는 것을 말해 줄 따름이다. 사랑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사랑은 사랑 자체로 존재할 뿐 사람과는 애당초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소설가가 있다. 이미 60대에 접어든 중진 작가 이승우가 그이다. 그의 말을 들으면 사랑이 무엇인지, 사람이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을는지 조금은 머리가 끄덕여진다. 이승우에 의하면, 사람은 사랑의 숙주일 뿐, 사랑은 사랑 독자적으로 자기 생애를 살아간다. 물론 사랑은 사람 속에 들어가서 생애를 시작하고 생애를 끝내지만 어디까지나 그 스스로의 생애가 있는 것이다.(장편 《사랑의 생애》 2017)

 사랑이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결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산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캐치 프레이즈가 되다시피 한 멋진 호소문(?)이 가장 전형적인 구두선일 것이다. 과연 그럴까?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이 문장은 가짜다. 특히 이성간에 있어서 이 말은 발화자의 욕망을 은폐하고 있는 기만이기 일쑤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에 대한 위협의 언어가 된다. '사랑한다'는 말 속에는 결국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욕망과 협박이 숨어 있으니, 사랑한다는 말과 노래가 범람할수록 이 사회에는 오히려 증오와 저주의 무질서가 난무하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사랑'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사랑 없이 살아가는 가운데 그의 소설은 질문한다. "사랑이 대체 뭐예요?"(《사랑의 생애》 281쪽)

 소설 《사랑의 생애》 끝부분에는 다른 여자에게 미혹되어 집을 나간 아버지가 30여 년후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그의 아내가 그를 돌보아주려고 한다. 그들의 젊은 아들은 이 같은 어머니의 결정에 분노한다. 사랑의 정체에 대한 물음은 여기서 폭발한다. 어머니에 대한 항의와 함께 그의 내면을 휩쓴 의문들은 작가 이승우로 하여금 때로 사랑을 단순한 욕정으로, 때로 타인을 향한 아낌없는 헌신으로, 그리고 때로는 신의 거룩한 속성으로 느끼고 받아들이게 한다. 사랑은 변할 수 있는데 사랑에 대한 관념은 변하기가 쉽지 않다고 작가는 말한다. 사랑의 속성 때문이 아니라 관념의 속성 때문이라는 것. 이승우의 소설은 이 관념에 대한 도전이다. 문학은 사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 《문학의 집.서울》, (통권256호)

 

○작가 소개

  김주연 문학평론가는 1941년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버클리 대학과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독문학을 연구했다. 『문학과지성』 편집동인으로서 『상황과 인간』, 『문학비평론』, 『변동 사회와 작가』, 『새로운 꿈을 위하여』, 『문학을 넘어서』, 『문학과 정신의 힘』, 『문학, 그 영원한 모순과 더불어』, 『사랑과 권력』, 『가짜의 진실, 그 환상』, 『디지털 욕망과 문학의 현혹』, 『근대 논의 이후의 문학』, 『미니멀 투어 스토리 만들기』, 『문학, 영상을 만나다』, 『사라진 낭만의 아이러니』, 『몸, 그리고 말』, 『예감의 실현』(비평선집) 등의 문학평론집과 『고트프리트 벤 연구』, 『독일시인론』, 『독일문학의 본질』, 『독일 비평사』 등의 독문학 연구서를 펴냈다. 한국독어독문학회 학회장, 한국문학번역원장을 역임했다. 30여 년간 숙명여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