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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詩를 읽다

문장의 방문/ 허수경

금동원(琴東媛) 2023. 4. 25. 17:58

문장의 방문

 

허수경

 

아직 아무도 방문해보지 않은 문장의 방문을 문득

받는 시인은 얼마나 외로울까,

문득 차 안에서

문득 신호등을 건너다가

문득 아침 커피를 마시려 동전을 기계 속으로 밀어넣다가

문장의 방문을 받는 시인은 얼마나 황당할까?

 

아주 어린 시절 헤어진

연인의 뒷덜미를 짧은 골목에서 본 것처럼

화장하는 법을 잊어버린 가난한 연인이 절임 반찬을 파는

가게 등불 밑에 서서

문득, 그 문장의 방문을 받는 시인은

얼마나 아릴까?

 

가는 고둥의 살을 빼어 먹다가

텅 빈 고둥 껍질 속에서 기어나오는

철근 마디로만 남은 피난민 거주지

다시 솟아 오르는 폭탄을 보다가

문득, 문장의 방문을 받는 시인은

얼마나 쓰라릴까, 혹은

 

부드러운 바위를 베고 아이야 잘자라, 라는

노래를 하고 있던 고대 샤먼이

통곡의 거리로 들어와

부패한 영웅의 사진을 들고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 옛 노래를 잊어버린 시인이

그 문장의 방문을 받을 때

세계는 얼마나 속수무책일까?

 

 

난 존재를 안고 있는 허당이었어요

 

 

나는 중얼거렸다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차 소리가 났다 잎새들이 바깥에서 지고 있었다

 

너는 중얼 거렸다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난 존재를 안고 있는 허당이었어요

 

단 한 번도 뿌리와 소통을 해보지 않은 나뭇잎

 

울 수도 없었다 울기에는 너무 낡은 정열이이었다

 

뿌리에서 떠나 다시 뿌리를 덮어주는 나뭇잎

 

웃을 수도 없었다 웃기에는 너무 오랜 정열이었다

 

 

-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문학동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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