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감이 있는 그 곳]
사유의 방
금동원
아주 어린 시절의 이미지 하나가 떠오른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우리 사 남매는 무조건 시골 외갓집으로 향했다. 아들 없는 딸부잣집 막내딸이었던 엄마의 친정 부모님에 대한 효도법이었다. 시끌벅적하고 신나는 꿈같은 며칠을 보내고 나면 허전하고 섭섭해하실 외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위해 볼모처럼 나는 며칠을 더 지내다 오곤 했다. 울적한 마음에 시골집 뒤 툇마루에 홀로 앉아 석양을 바라보곤 했다. 나와 황금빛 노을, 둘만이 마주 바라보고 느꼈던 고요한 명상의 시간. 지금에 와서 헤아려보면 어린 마음에도 그 순간은 설명할 수 없는 뭉클한 감동으로 마음이 차분해지는 열린 사유의 공간이자 위로의 시간이었던 것 같다.
글을 쓰는 작가에게는 대부분 좋아하는 자신만의 특별한 장소가 있다. 은밀한 듯 자연스럽고 편안한 공간으로 스며들고 싶은 날이 있는데 자기 방식의 쉼표인 셈이다. 여린 감수성과 그리움으로 침묵하고 싶을 때 나에게는 발걸음을 멈추는 곳이 있다. 자신의 숨소리만이 들리는 듯 평온하고 아늑한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이다. 서늘한 다락방 같은 신비함과 설렘을 동시에 갖게 하는 묘한 공간이다. 이곳에 오면 반드시 들러 오랜 시간을 머물다 가는 가장 좋아하는 곳이 있다. 본관 상설 전시관 2층에 있는 ‘사유의 방’이다. 삼국시대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국보 제78호와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이 전시되어있는 방이다.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걸치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깊은 명상에 든 두 반가사유상의 모습은 존재만으로도 주변의 소음과 잡념, 번뇌를 잠재우고 흡수하는 힘이 느껴진다. 두 반가사유상을 감싸고 있는 황금빛 조명의 엄숙한 분위기와 심오한 음악의 조화는 저절로 내면 여행의 길을 열어준다. 방문객들의 단순한 호기심과 어수선한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스스로 사색의 문을 열게 한다.
두 반가사유상은 뚜렷하게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략 50여 년의 시차를 가지고 있기에 두 사유 상은 모습도 분위기도 같은 듯 다르다. 제78호는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쓴 미륵보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다. 여성적 곡선과 섬세한 옷자락, 화사한 미소는 어떤 깊이에서 나오는 표정인가 싶게 우아하고 아름답다. 입꼬리가 올라간 입매의 단정하면서도 고혹적인 매력은 계속 보고 있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평화스럽고 자애로운 아우라가 주변의 기운을 밝게 비춘다. 표정에는 뭔가를 초월하여 심연의 저 어딘가에 침잠해있는 깊은 사유의 시간이 느껴진다.
제83호는 머리에 낮은 보관을 쓰고 있는데 훨씬 단호하고 간결하다. 근육 하나 없는 매끈한 맨살이 더없이 명상적이다. 모든 긴장을 풀고 이완되어있는 깊은 침잠의 상태를 보여준다. 유명한 로댕의 생각하는 남자와 비교해볼 때 뚜렷하게 차이가 느껴진다. 동서양의 신체적 차이에서도 사유하는 형태와 모습의 차이를 잘 드러낸다. 로댕의 근육질 조각품에는 인간의 형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머릿속에 온통 복잡한 세상사를 끌어안고 있는 듯 표정도 몸도 모두 어둡고 거칠다. 고뇌에 찬 인간의 괴로움을 그대로 보여주는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이다. 이에 비해 금동반가사유상이 보여주는 자태는 고요와 초월적 공간 그 자체다. 평화와 안정, 마주하고 있으면 금방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힘, 놀랍고 신비하다. 뿜어나오는 아우라와 에너지가 예사롭지 않다. 마음의 평정을 찾고 서늘한 그리움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글쓰기의 무겁고 답답한 마음을 비워내어 가볍고 홀가분한 위안과 용기를 준다. 온전한 이완 상태의 휴식을 준다.
모든 예술품은 위대하다. 우리 소인배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위로와 감동을 전해준다. 글을 쓰는 나의 정체성을 조용하게 일깨워준다. 희로애락의 삶으로 돌아가는 길 차분하게 감사의 두 손을 모으게 한다. 몇천 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사유의 방에 머물러 있던 아득한 순간의 경이로움과 고요함에 자연스럽게 글감이 떠오른다. 사랑하는 공간이 무심한 듯 베풀어주는 묵직한 힘이자 황홀한 선물이다.
- 《문학의 집 서울》, 2024년 5월호 (통권 제 2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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