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거기, 가스계량기가 있는 나무복도에서 할머니가 말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
그 말을 작정하고 마음에 새긴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수용소로 가져갔다. 그 말이 나와 동행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그런 말은 자생력이 있다. 그 말은 내 안에서 내가 가져간 책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는 심장삽의 공범이 되었고, 배고픈 천사의 적수가 되었다. 돌아왔으므로 나는 말할 수 있다.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17쪽)
행복은 갑작스러운 데가 있다.
나는 입의 행복... 더보기
바로 거기, 가스계량기가 있는 나무복도에서 할머니가 말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
그 말을 작정하고 마음에 새긴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수용소로 가져갔다. 그 말이 나와 동행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그런 말은 자생력이 있다. 그 말은 내 안에서 내가 가져간 책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는 심장삽의 공범이 되었고, 배고픈 천사의 적수가 되었다. 돌아왔으므로 나는 말할 수 있다.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17쪽)
행복은 갑작스러운 데가 있다.
나는 입의 행복과 머리의 행복을 안다.
입의 행복은 먹을 때 오고 입보다 짧다. 입이라는 단어보다도 짧다. 소리내어 말하면 머리로 갈 새도 없다. 입의 행복은 입 밖으로 말해지길 원치 않는다. 입의 행복에 대해 말하려면 모든 문장 앞에 갑자기라는 말을 써야 한다. 그리고 이런 문장으로 끝맺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모두 배가 고프니까. (273쪽)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는 카프카의 명제에『숨그네』보다 더 부합하는 작품이 있을까”라고 안드레아 쾰러는 말했다. 누군가가 프리쿨리치의 이마에 도끼를 꽂았듯, 작가는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에 도끼를 내리친다. 다행히『숨그네』는 독자의 공감을 통해 그 얼음이 깨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분노 속에서도 희망을 갖게 한다. (해설_342쪽)
출판사 서평
2009 노벨문학상 수상
헤르타 뮐러의 최신 화제작!
언어로 만든 예술품, 이 책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_포쿠스
“상황은 처참했다. 문자는 아름다웠다.
나는 비극은 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처참함을 고발하기 위해서는 그래도 비극은 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내 문학의 명예였다.”
_헤르타 뮐러
『숨그네』는 이차대전 후 루마니아에서 소련 강제수용소로 이송된 열일곱 살 독일 소년의 삶을 충격적이고 강렬한 시적 언어로 밀도 있고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인간의 숨이 삶과 ... 더보기
2009 노벨문학상 수상 헤르타 뮐러의 최신 화제작! 언어로 만든 예술품, 이 책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_포쿠스 『숨그네』는 이차대전 후 루마니아에서 소련 강제수용소로 이송된 열일곱 살 독일 소년의 삶을 충격적이고 강렬한 시적 언어로 밀도 있고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인간의 숨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그네처럼 가쁘게 흔들리는 것을 상징하는 『숨그네』는 철저히 비인간화한 상황 속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인간 삶의 한 현장을 섬뜩하면서도 아름답게 포착해낸다. 루마니아 독재 치하에서 비밀경찰에 협조를 거부하며 독일로 망명한 헤르타 뮐러가, 자신처럼 망명한 시인이자 실제 수용소 생존자인 오스카 파스티오르의 구술을 토대로 작품을 썼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학적 증인”이라는 찬사를 받은 헤르타 뮐러의 2009년 대표작이다. 우리 시대 가장 중요한 문학적 증인 헤르타 뮐러, 침묵 뒤로 숨은 말을 찾아나서다 주인공 레오폴트 아우베르크가 소련의 강제노동 수용소로 떠나던 날 들었던 마지막 말 “너는 돌아올 거야”는 2006년 작고한 시인 오스카 파스티오르가 수용소로 떠나던 날 들었던 마지막 말이기도 하다. 장편소설 『숨그네』는 뷔히너 문학상을 받은 시인이자, 실제 우크라이나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오 년을 보낸 오스카 파스티오르의 체험을 바탕으로 쓰였다. 그의 체험은 독일계 소수민이었던 헤르타 뮐러의 전(前) 세대가 공유했던 체험이기도 했다. (헤르타 뮐러의 어머니도 수용소에서 오 년을 보냈다.) 헤르타 뮐러는 이차대전 후 수용소 생활을 했던 독일계 소수민들의 비극적 운명에 주목한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민간인들이 유배되었기 때문에, 나는 집단적 죄과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 시기에 민간인들이 차출되었고, 아주 나이 어린 사람들, 자기 손으로 아무런 죄를 짓지 않은 열일곱 살짜리도 포함되었다. 나치 독일의 범죄가 없었다면 유배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할 요소다. 그런 일이 맑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경우는 없으니까.”_헤르타 뮐러 (노벨 재단 인터뷰 中) 헤르타 뮐러의 아버지 또한 이차대전 당시 나치 무장친위대로 징집되었다가 돌아왔고,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의 강제수용소에서 오 년간 노역했다. 단지 히틀러의 동족인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던 마을 사람들은 돌아와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침묵의 무게를 더는 감당할 수 없다고 느낀 뮐러는 침묵 뒤로 숨은 말들을 찾아나섰다. 2001년, 헤르타 뮐러는 강제추방 당했던 마을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기록하기 시작했고, 동료 시인 오스카 파스티오르도 추방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뮐러는 파스티오르의 경험담을 받아 적었고 두 사람은 함께 책을 쓰기로 결정했다. 2006년 10월 파스티오르가 돌연 세상을 떠나자 뮐러는 일 년여 가까이 글을 쓰지 못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9년 8월 17일 그녀의 생일에,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소설 『숨그네』를 발표한다. 인간성이 사라진 극단의 땅으로의 추방,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사람들 “『숨그네』는 한 개인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학대받은 모든 사람의 이야기이다.”_헤르타 뮐러 루마니아 1945년. 이차대전이 끝나고 루마니아에 살던 독일계 소수민들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소련은 폐허가 된 땅을 재건하기 위해 그들을 강제로 징집한다. “순찰대가 나를 데리러 온 건 1945년 1월 15일 새벽 세시였다. 영하 15도, 추위는 점점 심해졌다.” 열일곱 살의 소년 레오폴트 아우베르크는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숨그네』는 레오폴트 아우베르크의 이야기이자 그와 함께 수용소에 있었던 모든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죽음이 결정된 집단학살 수용소가 아닌 노동 수용소에서의 오 년 동안, 기본적인 욕구만 남은 고통스러운 일상과 단조롭고 끝없는 고독을 경험하며 삶과 죽음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늘 굶주림이 있다. 주인공이 고향으로 돌아와 대도시로 이사를 하고 결혼을 한 후에도 공포는 사라지지 않는다. 수용소는 계속 그의 안에 있다. 헤르타 뮐러의 신작소설 『숨그네』는 ‘생존자’에게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찍은 비참한 경험을 보여준다. 숨 막히는 공포와 불안에 맞선 신비로운 시적 언어, 소설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언어 예술! “상황은 처참했다. 문자는 아름다웠다. 나는 비극은 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처참함을 고발하기 위해서는 그래도 비극은 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내 문학의 명예였다.” _헤르타 뮐러 『숨그네』는 강제노동 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수용소’ 문학, 혹은 기록 문학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수용소에서의 공포와 불안을 강렬한 시적 언어로 아름답게 승화시킨다. 수용소 안의 강제노동자들은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단절되고 이전의 삶에서 떨어져 나온다. 기존의 언어로는 비현실적이기조차 한 ‘수용소’를 표현해낼 수 없다. 동시에 이 작품에서 언어는 수용소가 아닌, 존재하지 않지만 희망하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수단이 된다. 이를 위해 헤르타 뮐러는 그녀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독특한 조어들을 탄생시킨다. ‘숨그네’‘배고픈 천사’‘양철키스’‘심장삽’‘감자인간’‘석회여인’‘볼빵’등은 독일어로 이루어진 말이지만 정작 독일어에는 없는 말이며, 두 단어가 합쳐져 새로운 상징어가 된다. ‘숨그네’는 ‘숨’과 ‘그네’라는 말이 합쳐져 인간의 숨이 그네처럼 흔들리는 것을 상징하는 단어로 재탄생한다.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들면서 가쁘게 흔들리는 숨그네는 수용소에서의 오 년 동안 강제노동자들과 언제나 함께한다. 헤르타 뮐러의 언어는 독자가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수용소의 일상을 머릿속에 섬뜩하리만치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그려넣는다. 헤르타 뮐러는 주인공의 운명뿐만 아니라 그 경험의 핵심을 미적으로 시화한다. 인간의 남은 삶 전체를 결정짓는 통렬한 경험, 그 원초적인 고통을 거장의 솜씨로 설득력 있게 묘사해낸다. 이 책에 쏟아진 찬사 독자여, 앉아서 그녀의 글들을 읽으시기를. 삶의 환희가 찾아온다 싶은 어느 밝은 날, 읽으시기를. 그때 우리는 그곳에서 어떤 어두운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알게 된다. _허수경(시인) 마음에 오래 남아 잊히지 않을 독서 체험. 압도적으로 감동적이다. _FAZ 헤르타 뮐러에게는 초혼招魂의 힘이 있다. 그녀가 쓰는 언어의 광휘는 실로 눈부시다. _르몽드 헤르타 뮐러의 작품들은 문학의 중요한 미덕을 겸비하고 있다. 그녀는 모든 경계를 초월한 정의를 위해 항변한다. _슈피겔 헤르타 뮐러는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학적 증인이다. _차이트 순수성에 대한 그녀의 열망은 내부의 단검 같다. 카프카의 꿈속 한 장면처럼, 그녀는 척추 대신 검을 가진 듯하다. _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 뮐러는 잔인할 만큼 정직하고 무시무시하게 슬픈, 비범한 목소리를 창조해냈다. _컨템포러리 픽션 다시, 또다시, 헤르타 뮐러의 언어들은 놀라움의 연속이다. _오스트레일리언 『숨그네』의 문장에는 강요당한 적확함의 톤이 있다. 그녀는 끔찍함과 끔찍한 것을 이미지 안에 붙잡아놓은 시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_타게스 슈피겔 응축된 시와 진솔한 산문으로 박탈당한 삶의 풍경을 그려냈다. _스웨덴 한림원
나 또한 조심스레 숨 쉬어본다. yh**es |
처음 <<숨그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헤르타 뮐러가 2009년 노벨문학상으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그 선정에 가장 많이 영향을 끼친 책. 아름다운 시적 언어와 박탈당한 삶의 풍경을 잘 그려냈다는 찬사를 받은 이 작품의 제목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전혀 몰랐다. "숨 쉬다"의 "숨"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것은 맞는걸까, 내가 모르는 또다른 의미가 있는 걸까, 여러가지 상상을 해보지만 책에서는 정확한 의미를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주인공과 함께 느낄 뿐이다.
소설이라고 알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산문 형식의 글에 당황했다. 소설 속 산문이 아닌, 진짜 작가의 수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소설의 첫부분에선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주인공의 성별은 물론, 공원에서 벌어지는 일이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지, 그가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럼에도 그는 일단 희망을 안고 떠난다. "너는 돌아올 거야."...17p
수용소...하면 생각나는 것은 유대인 학살을 목적으로 독일이 세웠던 것이 가장 먼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비참하게 죽어갔는지 많은 매체를 통해 익히 알고 있는 것들. 그런데 <<숨그네>>에선 낯설다. 같은 시대에 유대인이 아닌, 단지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수용소로 보내졌다.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상식적으로 많은 일이 벌어지는 지를 보여준다. 한 쪽에선 독일인이기 때문에 가해자가 되고, 다른 한 쪽에서는 독일인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된다. 그리고 그 피해자는 다른 가해자들 때문에 평생을 자신의 피해 사실을 밖으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지냈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배고프고...배고프고... 배가 고프다.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한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지키고 싶은 마지막 희망과 자존심은 있다. 누군가에겐 손수건이 될 수도 있고, 할머니의 말 한 마디나 미래에 대한 끝없는 상상력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손수건이 내 운명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운명을 포기하면 지는 것이었다. 나는 확신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라는 할머니의 작별인사가 손수건으로 모습을 바꿨음을. 나는 손수건이야말로 수용소에서 나를 보살펴준 단 한 사람이었다고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말할 수 있다. "...90p
내가 살기 위해선 부도덕하다고 여겨지는 일도 수용소에선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지고, 그런 일들에 단련이 되면서 점점 현실과는 괴리감을 느끼게 된다. 그들이 수용소에서 보낸 시간은 단 5년이었지만, 젊은이에게는 청춘을 앗아갔다. 바깥 세상에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여러 재능을, 희망을 빼앗아갔다. 때문에 수용소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들에겐 바로 설 자리가 없다. 집에서는 대리 동생이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고, 가족에겐 자신을 추모했던 시간을 배신한 것 같은 죄책감에 휩싸인다. 그렇게 그들은 인생을 강탈당했다.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수록 그런 마음에 휘둘리지 않도록 애썼다. 희망이 좌절될 때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귀향에 대한 희망은 놓을 수 없었지만 만약의 경우를 위해 나 자신에게 말했다. 그들이 나를 이곳에 영원히 잡아두더라도 그 역시 내 삶이라고. 러시아 사람들도 살지 않나. 이곳에 정착하게 되어도 반항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반쯤은 밀봉한 병 안의 수프가 된 셈치고 나도 이곳에 머물 것이다. "...184p
헤르타 뮐러만의 독특한 표현법이 많다. 제목인 '숨그네'를 비롯하여 '배고픈 천사', '심장삽', '볼빵' 같은 단어들. 처음엔 좀처럼 낯선 이 단어들에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헤르타 뮐러 식의 이 표현법은 레오의 철저한 단절과 배고픔, 고립 등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책을 읽는내내 무척이나 힘들었다. 사건을 서사적 묘사로 서술하는 것도 아니고 철저히 레오의 입장에서 쓰여지는 이 산문식 글이 곧바로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장을 덮고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뒤늦게야 여운이 맴돈다. 그의 배고픔이, 단 5년이지만 평생과 같았을 수동적 삶이 그에게 미쳤을 영향이 얼마나 컸을 지를. 차라리 수용소를 그리워하며 평생을 살았을 그의 삶이 왠지 이해되기 때문이다.
고통 마시기, 희망 내뱉기 - 숨그네 ya**hy6407
Zeitgeist, 시대정신을 의미하는 독일어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이란 역사의 격정적 단면을 장식했던 전쟁이란 이데올로기가 이 시대의 절대정신이었다. 살인, 고문, 강간, 강도 등의 범죄가 만연하고, 누구에겐 ‘선택’이 아닌 ‘당위’였다. 역사를 통틀어 최대규모의 피해를 자랑하는 비극의 파장은 사그라들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큰 후유증을 남겼다.
‘숨그네’는 퇴폐적 시대정신이 낳은 괴물에 대한 단상으로,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자전적 성격의 Super - 리얼리즘 소설이다. 관찰자와 체험자 간에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기에 헤르타 뮐러만이 갖는, ‘숨그네’만이 갖는 특유의 긴장감과 몰입이 이 작품이 갖는 특유의 매력이라 생각한다. 헤르타 뮐러의 소설은 애상적 전경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특징이 있는데, 그 설명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을 꼽으라면 숨그네라 말하겠다. ‘삽질 1회 = 빵 1그램’, 이보다 더 당시의 참상을 나타낼 수 있는 말이 있을까? 또 이 구절은 극 전체의 분위기를 이해하고 주제를 파악하는데 요구되는 필수명제이다. 작품의 주요공식이기도 한 이는 배고픔이란 심상을 통해 전개되고 있는데 강제수용소 내의 모든 피와 눈물을 대변하는 총체적 감각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을 맞이하여 할 수 있는 거라곤 담담히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다. 코키토스는 오로지 밑을 향해 흐르기 때문이다. 정신을 부여잡고 버티는 사람들이지만 배고픈 천사 앞에선 무기력하게 배부른 돼지를 선망하게 될 것이다. 절망으로 빚어낸 디스토피아, 유일한 탈출구라곤 희망이란 이름의 쥐구멍인데 그마저도 케르베로스가 지키고 있는 상황이니 문자 그래도 설상가상(雪上加霜)이다. 일련의 극한적 상황이 지속되다보니 사람들은 점점 고통이란 마약에 중독되어 갔다. 내 안에 ‘배고픈 천사’를 담아낼수록 ‘나’는 점점 희미해졌다. 그가 ‘나’를 게워내고 ‘나’를 채우는 것이었다. 천사를 채워나갈수록 악마에 나아가는 역설, 그것은 거대한 판옵티콘에 감금된 죄수를 향한 세뇌이자 명령이었다.
‘불가피’라는 전제조건 아래 인재(人災)는 천재(天災)로 거듭났다. 한낱 물고기가 바다의 흐름을 거스를 순 없는 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했기에 사람들은 죽음이 아닌 생존을 택했다. 그들의 전략은 ‘생존’, 이거면 충분하다. 약자들의 생존전략, 그것은 저항의 길이 아닌 순응의 길이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의 정신을 그대로 구현시켰다 볼 수 있다. 그들은 의연히, 담담히 받아들였다. 자신들 앞에 놓인 현실을, 공기에 서린 고통을. 고통이 산소에 스며든다고 해서 호흡을 멈출 수 없는 노릇이다. 아프면 울면 되고, 절망에 빠지면 절규하면 된다. 숨쉬는 게 고통스럽다면 마신 고통 도로 내뱉어 버려라.l 시지프 신화의 그것인양, 고통에 굴레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고통을 즐겨라. 고통을 마시고 희망을 뱉어낼 수 있다면 언제라도 반전은 있다. 희망이란 이름의 기적이 만든 역사의 반전 말이다.
반면교사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가르침을 얻는다는 뜻이다. 부정을 전적으로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고통이 한계치를 넘어서게 되면 죽음이란 마침표를 찍게 되니 말이다. 그러나 만약 그 모든 고난과 시련의 시간들을 견뎌낸다면? 견딜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반면교사를 통해 ‘진화’하게 될 것이다. 극한적 도전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도전이유를 물어보면 단 한가지일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라고. 두드리지 않고 단단한 철은 탄생할 수 없다. 인류는 역사의 반 이상을 전쟁이란 악으로 점철시켰지만 그 악이 바로 현재의 인류를 키운 양분이다. 낙관주의와 비관주의, 그 차이는 종이 한 장보다 얇다.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것을 피로 얼룩진 살인극으로 보는 것과 생명의 존엄성을 다시금 다지는 계기로 삼는 것 간엔 명백한 차이가 있다.
한국이란 나라가 제국주의, 식민주의란 시대정신에 의해 일제강점기란 암울한 시기를 거쳐야만 했다. 그리고 얼마 뒤, 해방의 기쁨을 만끽해보지도 못한 채 몬스터의 대립으로 인한 냉전의 도입을 알리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한국이란 나라는 종전 후 문자 그대로 망(亡)했다. 한국이란 작은 나라가 강담하기에 한국전쟁의 출혈은 너무나도 컸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형이다. 한 차례 큰 폭풍으로 인해 그 간의 열매들과 잎들은 모두 나무를 떠났지만 뿌리만큼은 결코 뽑히지 않았다. 비온 뒤에 땅이 굳듯이 경이로운 RQ를 뽐내며 힘차게 도약해보였다. ‘한강의 기적’은 한국전쟁을 겪은 비운의 민족들이 이룩했기에 더 값지리라. 용수철의 위로의 반동을 위해선 최대한 아래로 눌러야한다. 이것이 용수철의 역설이자 미학이다. 그것을 몸소 증명한 것이 우리와 그들이다.
헤르타 뮐러는 역사의 산증인이다. 숨그네의 전경은 비록 파스티오르의 눈에 의해 전달된 것이지만 관점이 다를 뿐 영상은 동일하다. 그녀의 언어가 이토록 슬플 수 있고,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상상이 아닌 경험의 산물이기에 가능한 듯 싶다.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나 베르코르의 ‘바다의 침묵’,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문학적 감동을 뛰어넘어 사람들의 가슴에 어필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속에 작가의 인생이 담겼기 때문이 아닐까? 기억이란 물질은 소멸하지만 진실에 대한 기억에 담긴 정신만은 영원을 달린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당대의 삶을 글로써 그려낸 것이다. 숨그네 또한 그렸다. 배고픈 천사를 그렸고, 심장삽을 그렸으며, 작가 자신 또한 그려냈다. 숨그네는 지금도 유효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배고픈 천사가 찾아와 심장삽을 들게 되면 그에게 당당히 외쳐라. ‘내가 퍼내는 것은 빵 1그램이 아닌 희망 한 줌이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