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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목마른 계절/ 전혜린

금동원(琴東媛) 2015. 10. 27. 06:03

[윤성근의 헌책방 독서일기]오래된 책 속에 살아있는, 전혜린

윤성근 | 이상한 나라의 헌책

 

▲ 목마른 계절…전혜린 | 범우사(1976년)

 

 


  일하고 있는 헌책방에 한 무더기 책이 새로 들어왔다. 헌책방은 날마다 정해진 양만큼 책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 그날그날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양이 한꺼번에 들어오면 마음부터 분주해진다. ‘문학’, ‘역사’, ‘철학’, ‘예술’처럼 큰 덩어리로 먼저 나눈 다음, 하나하나 살피며 다시 분류한다. 그렇게 해서 몇 덩어리로 나눈 책들을 깨끗하게 닦고 난 뒤 한 권 한 권 책 정보를 살피기 시작한다. 이때 물론 집중해서 보려고 하지만 종종 중요한 책인데 그냥 흘려버리는 때가 있다.
 
  최근에야 다시 찾아낸 전혜린의 수필집이 바로 그런 경우다. 책 제목은 <목마른 季節>이다. 처음 이 책을 봤을 때 책 표지에 있는 한자를 잘못 읽어서 ‘季節(계절)’이 아닌 ‘李箱(이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목마른 이상>이라는 제목을 봤을 때 그저 어떤 무명작가가 이상의 이름을 책 제목에 넣어서 쓴 촌스러운 잡문집 같은 거라 짐작하고 옆으로 치워놨던 것이다.

  그렇게 반년도 넘은 시간이 흐른 다음 우연히 그 책을 다시 봤는데 이번엔 제목을 제대로 읽었다. <목마른 계절>이다. 아아, 이것은 그 이름만으로도 우리를 깊은 감수성의 바다로 끌어당기는 전혜린의 수필집 제목이 아니던가. 게다가 다른 허접한 책더미 속에 파묻힌 저 가녀린 문고본은 1976년 범우사 초판이다! 나는 깜짝 놀라 얼른 쌓여 있는 다른 책들을 치우고 전혜린을 구조했다.

  전혜린은 법학도였으나 도중에 전공을 독일문학으로 바꾸고 독일로 건너가 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1956년에 결혼하여 딸을 낳았지만 1964년에 이혼했고 우리나라로 들어와 교수로 일하다 이혼 다음 해인 1965년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서른한살 짧은 생을 마감했다. 소설이나 시를 써서 책으로 펴낸 것은 없고 전혜린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책 대부분은 외국 문학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 사후에 나온 책으로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66년)와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1968년)가 있다.

  1960년대에 나온 두 책에 비해 <목마른 계절>은 앞선 책의 내용을 발췌해서 한 권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인지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편집이란 바로 이런 맛이 아닌가. 먼저 나온 책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전혜린의 글들을 아무런 수정 없이 그대로 실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면 <목마른 계절>은 두 책을 절묘하게 편집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천재 소리를 듣던 젊은 학자이자 루이제 린저와 프랑수아즈 사강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가, 탁월한 수필가이며 동시에 여리지만 치열한 감성을 지닌 한 아름다운 여성을 손바닥만 한 책 속에서 만나게 된다.

  때론 짧고 단호하게, 어느 곳에서는 편안하면서도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저 끝까지 녹아 있는 감성들을 글로 만나노라면 이런 사람이 어째서 이리 빨리 생을 마감하게 되었는지, 책 위에 놓인 글자들이 서로 뒤엉켜 이내 파도처럼 아쉬움이 밀려올 뿐이다.

 
  전혜린이 쓴 책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절판 없이 새 책으로 만나볼 수 있다. 그만큼 독자들이 계속해서 전혜린을 찾는다는 말이고, 얼마 되지 않은 분량의 유고지만 시절이 변해도 문장 속에 끊임없이 솟아나는 힘이 있다는 증거다. <목마른 계절> 역시 깔끔하게 새 옷을 입혀 범우사에서 펴내는 문고본을 지금도 싼값에 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6년에 펴낸 초판을 대하며 감격스러운 이유는 책을 펼 때마다 전혜린을 바로 눈앞에서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40년 전 날짜가 찍힌 이 오래된 책 속에서 전혜린은 여전히 젊고 날카로운 눈빛을 가지고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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