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원 시인의 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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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詩를 읽다

유리(瑜璃)를 향하여/ 이기철

금동원(琴東媛) 2015. 11. 10. 00:12

 

 

유리(瑜璃)를 향하여

 

이기철

 

 

나는 봄의 온유, 여름의 염열, 가을의 소조(蕭條), 겨울의 냉혹보다

한 언어가 내게로 다가올 때의 수정 같은 초조

그 긴장된 순간의 불꽃을 노래하고 싶다

 

 

유리 언어여, 내 마음의 보석이여

너는 내 고통의 내용이고 기쁨의 항목이다

내 정신의 한 그릇 밥이고 내 마음의 한 그릇 물이다

 

 

그러나 내게는 겨울 나무를 덮어줄 외투가 없고

혹한의 들판을 덮어줄 이불이 없다

내게는 내 추운 겨울을 닫아버린 구두 속의 온기가 있고

내 벗어던진 옷가지에 남은 먼지 같은 체온이 있을 뿐

내게는 이 쓸쓸함과 저 적막을 한데 기울 바늘이 없고

이 질시와 저 저주를 일거에 꿰뚫을 창이 없다

 

 

내 참담의 내용을 다 기록할 노트가 없지만

나는 유리의 이름으로 내 삶의 세목을 축약하겠다

오래 흘러 평지에 드는 물처럼

수채화 걸린 복도를 지나는 아름다운 사람처럼

내 걸어가 닿고 싶은 곳은

지는 잎새 소리가 문고리에 매달리는 황혼녘의 집이다

 

 

나는 부인할 수 없다

내가 마신 술은 내 사랑임을

내가 저주한 하루들은 내 생애임을

이미 내 염원의 반쯤은 숯이 된 지금

나는 떠난 시간에 나는 돌 던질 수 없다

 

 

언젠가 유리처럼

내 알몸으로 거리에 서도 부끄럽지 않은 시간이 오면

뜨거워 살이 데는 불꽃의 언어를 식히며

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

펭귄이 걸어간 극지의 흰 눈 속을

나는 맨발로 걸어가리

 

 

 

시집 『유리의 나날』( 1998, 문학과 지성사)

 

유리의 나날(문학과지성시인선 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