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瑜璃)를 향하여
이기철
나는 봄의 온유, 여름의 염열, 가을의 소조(蕭條), 겨울의 냉혹보다
한 언어가 내게로 다가올 때의 수정 같은 초조
그 긴장된 순간의 불꽃을 노래하고 싶다
유리 언어여, 내 마음의 보석이여
너는 내 고통의 내용이고 기쁨의 항목이다
내 정신의 한 그릇 밥이고 내 마음의 한 그릇 물이다
그러나 내게는 겨울 나무를 덮어줄 외투가 없고
혹한의 들판을 덮어줄 이불이 없다
내게는 내 추운 겨울을 닫아버린 구두 속의 온기가 있고
내 벗어던진 옷가지에 남은 먼지 같은 체온이 있을 뿐
내게는 이 쓸쓸함과 저 적막을 한데 기울 바늘이 없고
이 질시와 저 저주를 일거에 꿰뚫을 창이 없다
내 참담의 내용을 다 기록할 노트가 없지만
나는 유리의 이름으로 내 삶의 세목을 축약하겠다
오래 흘러 평지에 드는 물처럼
수채화 걸린 복도를 지나는 아름다운 사람처럼
내 걸어가 닿고 싶은 곳은
지는 잎새 소리가 문고리에 매달리는 황혼녘의 집이다
나는 부인할 수 없다
내가 마신 술은 내 사랑임을
내가 저주한 하루들은 내 생애임을
이미 내 염원의 반쯤은 숯이 된 지금
나는 떠난 시간에 나는 돌 던질 수 없다
언젠가 유리처럼
내 알몸으로 거리에 서도 부끄럽지 않은 시간이 오면
뜨거워 살이 데는 불꽃의 언어를 식히며
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
펭귄이 걸어간 극지의 흰 눈 속을
나는 맨발로 걸어가리
시집 『유리의 나날』( 1998,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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