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
도종환
경멸을 유파의 이름으로 삼으리라
데생의 기본도 안 되었다는 야유를
초보들의 희미한 초벌그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조롱을
역사적 배경도 없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비웃음을
있는 그대로 접수하고 그 위에 목탄을 칠한 뒤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지우리라
그대들이 개막식 테이프를 끊고 건배를 드는 건물 밖에서
우리는 낙선자 전시회를 준비하리라
우리에게 강렬하게 다가왔던 햇살
초록의 잎새 위에서 찬란하게 몸을 바꾸던 빛
그것들을 만나기 위해 화실 밖으로 나가리라
화폭 밖에서 새로운 그림을 그리리라
본 것을 다 그리지 않으리라
몇 장의 수련 잎과 그 위에 앉은 불온한 구름
원근과 명암에 구애받지 않는 깊은 하늘을 옮겨 오리라
수면을 덮는 짙은 녹색 물살과
그네를 타는 버들잎으로 다시 기뻐하리라
경멸, 오 고마운 경멸로
새로운 유파의 이름을 삼으라
- 신현림의 『미술관에서 읽는 시』,( 서해문집,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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