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의 일정은 2박 3일(늬른베르그, 하이델베르크, 프랑크푸르트)이었다. 체코 프라하에서 국경을 넘은 것은 늦은 오후였지만, 유럽의 백야 현상은 밤 9시가 다 되도록 어두워지지 않았다. 뉘른베르그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작은 동네에 위치한 숙소는 정갈하고 소박했다.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헤르만 헤세의 생가 '칼프'를 둘러보고, 점심식사 후에 도착한 곳이 아름다운 중세도시 하이델베르크이다.
"죽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 하이델베르크로 가라, 그래도 죽고 싶다면 그리하라", 라는 유명한 시가 있는 곳, 환갑이 넘은 괴테를 불륜에 빠뜨렸던(서른 살의 유부녀 빌레머 부인과 뜨거운 사랑에 빠져 8번이나 이 곳을 방문한) 곳이다. 괴테는 이 곳에서<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집필 완성했으며,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황태자의 첫사랑'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2016, 6/15~6/ 17)
괴테가 매일 산책하며 연애 작업(?)했다는 공원의 벤치와 은행나무가 있는 풍경
○ 하이델베르크
30년전쟁 때 폐허가 되었다가 1693년 프랑스인의 침략으로 거의 파괴되고 남은 건물은 성령교회(1400~36)·마르슈탈(1590, 옛날의 왕실 마구간)·기사회관(1592)뿐이었다. 지금 남아 있는 주요건물들은 대부분 중세의 고딕 양식이 아닌 바로크 건축 양식으로 지어져 있다. 가장 인상깊은 건물은 강에서 100m 높이에 웅장하게 서서 시가지를 압도하고 있는 하이델베르크 성이다.
울창한 숲으로 뒤덮인 오덴발트 구릉지대에서 운하화된 네카어 강이 빠져나와 라인 평야로 흘러드는 지점에 있다. 1196년에 처음 문헌에 등장한 이 도시는 1720년까지 라인팔츠의 중심지로서 선제후인 팔츠 백작가의 거주지였다. 30년전쟁(1632) 때 폐허가 되었고, 1689, 1693년에는 프랑스인의 침략으로 거의 파괴되어 지금 남아 있는 주요건물들은 대부분 중세의 고딕 양식이 아닌 바로크 건축 양식(18세기 후반까지 유행함)으로 되어 있다. 이 도시는 1802년 바덴에 양도되었고, 20세기에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1693년에 파괴되지 않고 남은 건물은 성령교회(1400~36)·마르슈탈(1590, 옛날의 왕실 마구간)·기사회관(1592)뿐이었다. 그밖에 중요한 건축물로는 알테 다리(1786~88, 재건 1945 이후)와 시청(1701~03), 예수회 교회(1712)가 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가장 흥미롭고 인상 깊은 건물은 하이델베르크 성이다. 이 성은 1689, 1693년에 프랑스인들에게 파괴되었고 1764년에는 벼락을 맞았지만, 강에서 100m 높이에 웅장하게 서 있는 붉은 사암 건물은 아직도 시가지를 압도하고 있다.
또한 이 성은 13세기에 짓기 시작했지만 가장 유명한 부분은 르네상스 시대에 만들어졌고, 성의 익면(중심 건물에서 옆으로 날개처럼 뻗은 부분)에는 오토-하인리히 관과 프리드리히 관이 있다. 프리드리히 관의 지하실에는 용량이 18만 5,500ℓ나 되는 거대한 포도주 통인 하이델베르크 술통(1751)이 있다. 시내에서 쾨니히스슈툴 산(단층 지괴) 꼭대기까지 왕복 운행하는 케이블 철도를 이용하면 이 성에 닿을 수 있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하이델베르그 대학교(루프레히트카를대학교)는 루페르트 1세가 세웠고, 1386년에 교황 우르바누스 6세의 인가를 받았다. 이 대학교의 지질-고생물학 연구소에는 턱뼈 화석인 '하이델베르크인의 하악골'이 전시되어 있는데, 학자들은 이 화석을 '호모 에렉투스'로 분류하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대학도시이자 주거도시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공장의 수효가 많이 늘어났다. 기계·정밀기기·가죽·담배·나무 제품이 이곳에서 생산된다. 가장 중요한 산업은 관광업이다. 해마다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하이델베르크 성을 찾는다. (출처:다음백과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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