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집
이종형
당신은 물었다
봄이 주춤 뒷걸음치는 이 바람 어디서 오는 거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4월의 섬 바람은
수의 없이 죽은 사내들과
관에 묻히지 못한 아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아이의 울음 같은 것
밟고 선 땅 아래가 죽은 자의 무덤인 줄
봄맞이하러 온 당신은 몰랐겠으나
돌담 아래
제 몸의 피 다 쏟은 채
모가지 뚝뚝 부러진
동백꽃 주검을 당신은 보지 못했겠으나
섬은
오래전부터
통풍을 앓아온 환자처럼
살갗을 쓰다듬는 손길에도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러댔던 것
4월의 섬 바람은
뼛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뼛속에서 시작되는 것
그러므로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바람의 집이었던 것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삶창, 2017)
생(生)은 아물지 않는다
이산하
평지의 꽃
느긋하게 피고
벼랑의 꽃
쫓기듯
늘
먼저 핀다
어느 생이든
내 마음은
늘 먼저 베인다
베인 자리
아물면, 내가 다시 벤다
-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 (문학동네, 1999)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김수열
일흔의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천둥 번개에 놀라 이리 휘어지고
눈보라 비바람에 쓸려 저리 휘어진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나이테마다 그날의 상처를 촘촘히 새긴
나무 한 그루 여기 심고 싶다
머리부터 어깨까지 불벼락을 뒤집어쓰고도
모질게 살아 여린 생명 키워내는 선흘리 불칸낭
한때 소와 말과 사람이 살았던,
지금은 대숲 사이로 스산한 바람만 지나는
동광리 무등이왓 초입에 서서
등에 지고 가슴에 안고 어깨에 올려
푸르른 것들을 어르고 달래는 팽나무 같은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일흔의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허리에 박혀 살점이 되어버린 총탄마저 보듬어 안고
대창에 찔려 옹이가 되어버린 상처마저 혀로 핥고
바람이 가라앉으면 바람을 부추기고
바람이 거칠면 바람의 어깨를 다독여주는
봄이면 어김없이 새순 틔워 뭇새들 부르고
여름이면 늙수그레한 어른들에게 서늘한 그늘이 되는
그런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푸르고 푸른
일흔의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내일의 바람을 열려 맞는 항쟁의 마을 어귀에
아득한 별의 마음을 노래하는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순간 포착] 문재인 대통령, 4.3희생자 추념식 참석.. 후보자 시절 약속 지켰다
이영수 입력 2018.04.03. 14:50
12년 만에 대통령이 4.3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으로 참석해 국가적 추념행사로 위상을 높이겠다”는 후보자 시절의 약속을 지켰다.
70년 전 제주의 4월, 유채꽃과 동백이 만발한 땅에서 이유도 모른 채 수많은 생명이 희생됐다.
3일 제주 4.3평화공원에서 열린 4.3희생자 추념식은 사상과 이념 그리고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생명을 기억하고 상생과 화해의 역사로 나아가는 걸음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행방불명인 표석 및 위패봉안실에 방문해 동백꽃과 술 한 잔을 올렸다.
이어 추념식 최초로 대통령과 대통령 부인이 함께 헌화 및 분향을 진행했습니다. 김정숙 여사는 4.3을 상징하는 동백꽃을 헌화했다.
“슬픔에서 기억으로 기억에서 내일로” 이번 추념식의 슬로건이다. 제주 4.3이 제주도에 국한된 역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기억이자 역사로 나아가기 위한 추념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의미를 담은 다양한 추모공연도 진행됐다.
이번 추모공연은 4.3을 대한민국의 역사로 기록하고 보존하기 위해 헌신하신 분들이 애국가 제창을 이끌고, 애국가 영상도 제주도의 모습으로 편집해 국민의례에까지 제주 4.3의 모습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350여 명이 희생된 북촌희생사건을 모티브로 소설 ‘순이삼촌’을 써서 제주 4.3을 전국에 알린 소설가 현기영의 추모글을 낭독했다. 또한 제주 4.3 추모곡인 ‘4월의 춤’을 만든 가수 루시드폴의 노래에 맞춰 제주도립무용단의 공연이 진행됐다.
작곡가 김형석의 연주를 배경으로 제주도민인 가수 이효리는 이종형 시인의 ‘바람의 집’, 이산하 시인의 ‘생은 아물지 않는다’, 김수열 시인의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등 세 편의 시를 낭독했다. 가수 이은미는 가수 이연실의 ‘찔레꽃’을 부르며 유족들을 위로했다.
행사의 마지막은 제주4.3 유족 50명으로 구성된 4.3평화합창단이 제주도립합창단, 제주시립합창단과 함께 ‘잠들지 않는 남도’를 합창해 추념식의 의미를 더 깊게 새겼다.
12년 만에 대통령이 4.3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으로 참석해 국가적 추념행사로 위상을 높이겠다”는 후보자 시절의 약속을 지켰다.
특히 이관석 희생자의 유족인 이숙영씨가 유족 편지를 낭독해 모두를 숙연하게 했다. 총살당한 아버지, 바다에 수장당한 큰오빠, 그 한을 가슴에 품고 돌아가신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이다.
<설움을 딛고 희망으로>
이숙영(이관석 희생자의 유족)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늘 제 가슴속에 살아 계신 어머니!굳은 신념과 열정으로 교육에 헌신하던 아버지가4.3사건으로 끌려가 사라봉 기슭에서 총살당하시던 날 산등서이 맴돌던 까마귀의 구슬픈 울음소리를 저 하늘은 기억하고 있습니다.“무슨 이유로 학살했는지 그 경위를 밝혀 달라.”울분을 참았다가 밤이면 쏟아내는 흐느낌“어머니, 밤에 무사 울언?” 묻지 못하고 여섯 살 막내는 설움으로 철들며 자랐습니다.
제주도 최초로 교악대를 창단하며 음악 교육에 앞장 섰던 큰오빠가 예비검속으로 끌려가 바다에 수장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던 날“집안의 주춧돌이 무너졌다.” 그 애끊는 통곡의 소리를 저 바다는 기억하고 있습니다.짧은 운명 대신하여 오빠의 비석 옆에 심어놓은 무궁화는 시대의 아픔을 잠재우며 해마다 피어나는 영혼의 꽃.
사삼사건·예비검속·행방불명·그리고 연좌제 이 아픈 단어들을 가슴에 새긴 채 숨죽이며 살아온 70년!이제, 밝혀지는 4·3의 진실, 바로 세워지는 4·3의 역사 앞에 설움을 씻어내며 부르게 될 희망찬 노랫소리 외롭고 고단한 삶을 살다 가신 어머니!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는 날 마디마디 맺힌 한(恨)을 풀어놓으시고 편히 잠드십시오.
2018년 4월3일
평화공원에서 막내가 올립니다.
이영수 기자 juny@kukinews.com 사진=청와대 페이스북
■[화합으로 거듭나는 제주]마을마다 오름마다 생생한 ‘그날’ 떠올리며 ‘4·3길’ 걸어볼까
대표적인 4·3사건 유적지 제주4·3사건의 흔적은 마을마다 오름마다 여전히 남아 있다. 제주 전역이 유적지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주도가 집계한 유적은 ‘초토화작전’으로 가옥이 불탄 이후 사라진 마을 108곳, 희생터 154곳, 주둔지 83곳, 4·3성터(강제동원으로 축성된 집단거주지) 65곳, 수용소 18곳, 기타 169곳 등 모두 597곳에 이른다. 제주4·3 70주년기념사업위원회는 제주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와 공동으로 제주 4·3 유적지를 소개한 ‘4·3 길을 걷다’ 지도 2만 부를 제작, 배포했다. 유적지 43곳의 위치와 개요 등을 간략하게 소개했다.
이 지도는 ‘4·3 평화기행’ 걷기 코스를 추천했다. 제주시 동부권은 관덕정∼곤을동∼4·3평화공원∼낙선동성터∼북촌너븐숭이 기념관∼다랑쉬굴 코스이고, 서부권은 정뜨르비행장∼빌레못굴∼진아영할머니삶터∼만벵듸공동장지 등으로 짜였다. 서귀포시 서부권은 동광 잃어버린 마을∼동광 큰넓궤∼백조일손지묘∼알뜨르∼섯알오름 등이고, 동부권은 4·3평화공원∼남원 현의합장묘∼의귀리 송령이골∼표선 백사장∼성산읍 터진목 등이다.
대표적인 4·3사건 유적을 소개한다.
○ 관덕정
제주시 삼도2동 관덕정은 1947년 제28주년 3·1절 기념식을 마친 군중들이 빠져나오다 경찰의 발포로 6명의 희생자와 8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사상 초유의 민관 총파업이 이어졌고 수많은 도민이 관덕정 인근 경찰서에 끌려와 고문취조를 당하거나 구금됐다.
○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
70여 가구로 이뤄졌던 제주시 화복동 곤을동마을은 1949년 1월 4일 군인들에 의해 초토화된 후 복구되지 못했다. 토벌대에 의해 가옥이 전소되고 주민들이 희생당한 비극을 겪었다. 해안마을 가운데 드물게 초토화된 마을로 현재는 마을 터만 남아 있다.
○ 충혼묘지 4·3추모비
제주시 노형동 충혼묘지에는 4·3사건으로 희생된 군·경들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묘지 입구에는 박진경 추도비가 세워져 있다. 1948년 5월 11연대 연대장으로 제주도에 부임한 박진경 중령은 강경진압으로 일관해 많은 인명 피해를 야기했다. 그러다 박진경은 대령 진급 후 축하연을 끝내고 숙소에서 잠을 자다가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 다랑쉬굴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다랑쉬굴은 1948년 하도리, 종달리 주민 11명이 피신해 살다가 발각돼 희생당한 곳이다. 토벌대는 이 굴에서 주민들이 나오지 않자 굴 입구에 불을 피워 연기를 불어넣어 학살했다. 1992년 유해 11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굴이 발견돼 4·3 진상규명 목소리를 높이는 계기가 됐다.
○ 너븐숭이 4·3공원
1949년 1월 17일 북촌리 400여 명의 주민이 학살당했다. 제주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마을이다. 학살당한 북촌주민들을 추념하려고 공원과 기념관을 속칭 ‘너븐숭이’로 불리는 곳에 조성했다. 기념관 외에 순이삼촌 문학기념비, 위령비, 방사탑 등이 들어서 있다.
○ 큰넓궤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큰넓궤는 1948년 11월 중순 마을이 초토화된 이후 동광 주민 120여 명이 2개월가량 집단적으로 은신생활을 했던 굴이다. 굴이 토벌대에 발각된 후 주민들은 한라산으로 숨어 들어갔으나 영실 부근에서 토벌대에 총살되거나 잡혀서 서귀포로 이송됐다가 정방폭포 등지에서 학살됐다.
○ 낙선동 성터
제주 조천읍 선흘리가 1948년 11월 초토화작전으로 불타 버린다. 미을 주민들은 1949년 낙성동에 성을 쌓고 집단 거주했다. 주민들이 강제 동원돼 성이 만들어졌다.
○ 성산읍 터진목
서북청년회에 끌려온 성산, 구좌지역 주민들이 감자공장 창고에 수감돼 고문당하다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일출봉 인근 터진목으로 끌려와 총살됐다. 성산읍 4·3희생자 유족회가 2010년 위령비를 세웠다.
○ 섯알오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섯알오름은 6·25전쟁 발발 직후 모슬포를 중심으로 예비검속자들이 집단 학살된 장소다. 1950년 8월 20일 오전 2시에 한림어업창고 및 무릉지서에 구금됐던 63명, 5시경에는 모슬포 절간 고구마창고에 구금됐던 132명이 집단 학살됐다. 최근 학살터 주변을 정비해 위령공원을 조성했다.
제주=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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