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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금동원(琴東媛) 2018. 7. 17. 21:56

 

 

『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저  | 교양인 |

 

 

『혼자서 본 영화』는 한국 페미니즘 담론의 최전선에 서 있는 여성학자이자 ‘영화광’인 정희진이 20년 동안 꼭꼭 쌓아 둔 영화에 관한 내밀한 기록이다. 저자가 ‘내 인생의 영화들’로 꼽는 28편의 영화가 담겼다.

  정희진에게 영화는 기분 전환이나 휴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외로움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괴로움 속에서 삶을 살아갈 힘을 얻는 치열한 인식 활동이다. ‘혼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영화와 홀로 대면하여 자신만의 눈으로 보고 해석하는 일이며, 나와 대화하고 관계를 맺는 일이다. 영화와 나만 있는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가 영화 속 인물과 만나고 그 인물을 통해 나를 발견하고, 나의 내면과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혼자서 본 영화』는 ‘나에게 말 걸기’이자 ‘타인에게 말 걸기’의 기록이다.

  영화를 보는 나만의 습관이 있다. 혼자 본다. 어두운 극장 안에서 메모하느라 대개는 두 번 본다. …… ‘혼자서 본 영화’는 영화와 나만의 대면, 나만의 느낌, 나만의 해석이다. 나만의 해석. 여기에 방점이 찍힌다. 나의 세계에 영화가 들어온 것이다. 지구상 수많은 사람들 중에 같은 몸은 없다. 그러므로 자기 몸(뇌)에 자극을 준 영화에 대한 해석은 모두 다를 것이다. 한 작품을 천만 명이 본다면 그 영화는 천만 개의 영화가 ‘되어야 한다’. - 머리말에서      

 

 

  ○작가 소개

 

 

  1967년 서울 출생. 서강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했다. 현재 국가 안보와 젠더를 주제로 여성학 박사논문을 쓰고 있다. 대학을 6년 만에 겨우 졸업한 후 여성운동단체인 ‘여성의 전화’에서 5년간 상근자로 일했다. 대학과 시민단체, 노동조합 등에서 여성학을 강의하며, 다양한 여성조직에서 자문위원,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한국 여성의 전화 연합'외에도 '여성과 인권 연구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기지촌 여성 공동체 [새움터]의 운영위원으로도 일하고 있다.

  그녀는 사회운동, 평화, 인권, 탈식민주의, ‘아시아’, 인간 관계의 심리학과 정치학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작가는 특히 여성에 대한 폭력과 집단 학살, 여성주의 심리 상담, 인간의 고통을 글로 표현하는 것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의 폭력성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쓴 책으로는『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 가정폭력과 여성인권』, 편저자로 일한『한국여성인권운동사』와『성폭력을 다시 쓴다 ― 객관성, 여성운동, 인권』이 있다. 이외 다수의 공동 저서가 있다.

『페미니즘의 도전』은 그녀가 2005년 발간한 책으로 페미니스트에 대한 세상의 고정관념을 깨주는 책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위안부 누드 사건, 스와핑, 성매매 여성들의 시위 등 여러 가지 사회의 이슈에 대해 여성의 시각에서 재해석하여 글을 구성하고 있다. 작가가 진정으로 꿈꾸고 있는 세상은 여성과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등 사회에서 소외받고 차별받는 우리 사회의 모두가 함께 경쟁하고 소통하고 공존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 그녀의 사상이 작가의 책들에 잘 표현되어 있다

 

 

 

 

  ○목차

 

  1장 사랑하기와 말하기 사이에서
  가족 밖에서 탄생한 가족 _ [가족의 탄생]
  ‘사랑한다’와 ‘사랑했다’ _ [하얀 궁전]
  남성이 요부가 될 때 _ [인 더 컷]
  마조히즘을 욕망하는 여자? _ [피아니스트]
  부패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_ [디 아워스]
  메릴 스트립의 노래, 아바의 노래 _ [맘마 미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낼 때 _ [샤도우랜드]
  사랑한다면, ‘배용준’처럼 _ [외출]
  마지막 장면 _ [문라이트]

  2장 상처가 아무는 시간
  지옥에서 탈출하는 법 _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인간이 위대할 때 _ [타인의 삶]
  고통을 견디게 하는 것은 _ [밀양]
  가해자를 찾아가 만난다면 _ [끔찍하게 정상적인]
  ‘착한’ 여자의 ‘나쁜’ 남자 순례기 _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상처가 아무는 시간 _ [위플래쉬]
  질투라는 자발적 고통 _ [질투는 나의 힘]
  누가 말하는가, 누가 듣는가 _ [더 스토닝]
  상처와 응시 _ [거북이도 난다]
  슬픔의 강을 건너는 방법 _ [슬픔의 노래]

  3장 젠더, 텍스트, 컨텍스트
  ‘정치적인’ 남성, ‘비정치적인’ 여성? _ [송환]
  북한 남성 판타지 _ [강철비], [의형제], [용의자], [공조]
  타인의 시선으로 1루까지 걷다 _ [YMCA 야구단]
  정체성의 슬픔 _ [박치기!], [우리 학교], [피와 뼈]
  박정희와 김재규의 차이? _ [그때 그 사람들]
  “여자도 남자도 아닌, 그러나 인간인”_ [사방지]
  여성 리더와 여성주의 리더 _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아주 격렬한 평화 만들기 _ [웰컴 투 동막골]
  몸의 기록 _ [머니볼]

 

 

 

 ■ [출판사 리뷰]

 

 

  ‘모든’ 사랑은 사랑하는 자의 결핍이나 욕망에 대한 자기 판단, 회계(會計, 대차대조표), 자기 확신의 활동이다. 자기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절대로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랑받음은 내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상대방의 자기 혼란이다. 사랑은 내가 타인의 상태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달려 있다. ---「하얀 궁전」중에서

  스릴러 영화의 공식인, 남자 주인공을 시험에 들게 하는 팜파탈(Femme Fatale), 즉 치명적 요부를 남성의 모순을 여성에게 투사한 존재이기에 오랫동안 남자 감독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팜파탈은 남성이 저지르는 폭력과 파괴가 결코 남성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남성 판타지의 산물이다. …… 팜파탈을 통해 남성 문화가 진짜 주장하고 싶은 바는, 섹스라는 ‘자연’ 앞에서 고뇌하는 이성과 문화의 담지자인 남성과, 섹스밖에 모르는 머리 없는 몸뚱이 자연으로서 여성이라는 성별 이분법의 대비다. [인 더 컷]은 이 공식을 뒤집는다. ---「인 더 컷」중에서

  이런 세상을 상상해본다. 남자에게도 사랑이 관계, 생존, 돈, 자아 실현, 인생의 목표여야 한다. 남자들도 친밀감에 목숨을 걸고 관계 유지를 위해 자기 생의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여자의 출세를 위해 헌신한다. 남자가 여자에게 성폭행당한 후 여자가 결혼을 거부하자 자살한다. 여자는 배, 남자는 항구가 되어 남자도 여자를 기다리다 지쳐 썩어 문드러져 돌이 된다. …… [피아니스트]는 ‘사랑은 여자의 일이되, 사랑의 주체는 남자’라는 이 체제의 법칙을 거부한 여자가 가슴의 내파를 견디지 못하고 자폭하는 이야기다.---「피아니스트」중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변화시킨 사람을 사랑한다. 영원한 사랑 - 일부일처제, 배타적인 낭만적 사랑 - 을 믿고 실천하는 자의 고통은 상대가 자신을 변화시킨 그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순간을 지속시키기 위해,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고통을 필연적이다. …… 사랑은 유기체다. 그래서 모든 사랑은 부패한다. 문제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에게 변치 않(아야 하)는 사랑의 의미는 무엇인가이다. [디 아워스]는 이 오래된 질문을 성찰적인 남성의 시선으로 새롭게 던진다. ---「디 아워스」중에서

  사랑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쉽다’. 그것은 동일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엔 적대했으나 지금은 선망하게 된 타인, 나는 다가갈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사는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일은 경험하기 힘든 인간성이다. 사람은 사상, 사랑, 권력으로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만이 변화시킬 수 있다. [타인의 삶]은 타인의 삶이 나의 삶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으며 나는 얼마만큼의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인간인가를 질문한다. ---「타인의 삶]」중에서

  질투는 자기 증오이며 자기 몰두이자 결국 자기 도취다. 질투와 성찰은 같은 장소에서 출발하지만 방향은 정반대다. …… 성찰은 자기로부터 출발하고 자기로 돌아오는 사유지만, 질투는 질투 대상에 대한 자기 중심적 해석이기 때문에 사고의 중심이 타인에게 있다. 바로 그 의미에서 질투는 자기 중심이 없는 상태다. ---「질투는 나의 힘」중에서

  ‘침묵당함’은 또 다른 폭력이다. 상처를 숨기는 대신, [거북이도 난다]에서처럼 고통에 대한 설명불가능성을 향해 돌진하는 것, 자기 상처를 응시하는 것이 평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이 ‘간헐적’ 폭력이라면, 전쟁과 평화의 분리는 우리 삶을 구성하는 일상적 폭력이다. 영화는 피 흘리는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타인에게 말 걸기를 시도한다. 절박하게. 일상적 폭력을 평화라고 믿는, 침묵하는 모든 이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영화다. ---「거북이도 난다」중에서

  유례없이 참혹한 한국 현대사에서 전쟁과 국가 폭력의 희생자는 극단적으로 성별화된 주체이기도 하다. 역사의 주체이자 행위자로 간주되는 남성은 장기수 ‘선생님’이고, 남성 역사의 부산물로 간주되는 위안부 여성은 비정치적인 존재로서 ‘할머니’다. 좌?우파를 막론하고 남성 담론에서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간 여성은 민족의 수치이며, 국가 간 전쟁이 만들어낸 가장 비참하고 ‘더러운’ 피해자로 여겨진다. ---「송환」중에서

  감독은 남자들의 기대를 저버린다. 그는 이 영화를 보수-진보, 독재-저항, 여야 대립이 아니라, 남성들 간의 싸움을 완전히 상대화하고 남성 문화를 성찰하는 영화로 만들었다. 이 영화에서 남성은 말하는 주체가 아니라 평가 혹은 조롱받는 인식의 대상이다. 감독은 남성 젠더 질서 외부에 서 있다. 그는 기존 남성 정치학의 어느 편에도 동의하지 않는 남성 내부의 ‘배신자’로서, 남자들 간의 분열을 시도한다.

---「그때 그 사람들」중에서

 

 

  한 편의 영화가 내 안에 들어올 때

『혼자서 본 영화』에서 정희진은 페미니스트로서, 여성으로서 자신만의 주관적이고 독자적인 입장에서, 특유의 전복적인 시각으로 영화를 읽고 해석한다. 권력과 젠더에 관한 놀라운 감수성을 바탕에 깔고 외로움, 사랑, 상처, 고통, 구원을 이야기한다.

  ‘나쁜 남자’들을 거치며 삶이 망가져 가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주인공에게서 저자는 ‘혐오’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를 발견한다. 계속 배신을 당하면서도 사람을 믿고 사랑을 하는 마츠코야말로 자신의 주체성을 놓치지 않는 진정으로 강인한 존재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 성폭행 피해자 소녀는 지옥 같은 학교의 가해자들 사이에서 수동적 피해자 되기를 거부하고 타자가 되기를 선택함으로써 현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발견한다. 「가족의 탄생」을 보면서 저자는 ‘정상 가족’이 아닌, 연대와 사랑으로 뭉친 대안적 가족에서 위안을 받는다. “이 영화는 나를 숨 쉬게 한다.” 정희진의 자유로운 느낌과 생각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하나의 이야기에 담긴 다양한 해석을 만나게 되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접하게 된다.

  정희진은 영화를 보는 일을 “내 경험 너머 새로운 앎의 세계”를 만나는 일로 정의한다. “건물 안에서는 건물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위치를 벗어나 새로운 각도에서 이면을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 영화는 ‘렌즈’다. 영화는 현실을 담는다. 영화는 우리 역사의, 인생의 한 부분을 잡아챈다. 위치를 바꾸어 다르게 보는 순간,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변화는 시작된다.

  나는 이제 알기 위해 영화를 본다. ‘지식을 습득한다’와 ‘안다’는 것은 다르다. 안다는 것은 깨닫고, 반성하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고, 세상이 넓음을 알고,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과정을 뜻한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 아닐까. - ‘머리말’에서

  “이 영화는 나를 숨 쉬게 한다.”
- 1장 ‘사랑과 말하기 사이에서’


  1장은 「가족의 탄생」부터 「디 아워스」, 「피아니스트」, 「하얀 궁전」, 「문라이트」에 이르기까지, 정의 내리기가 불가능한 사랑의 여러 모습과, 사랑이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 정치적 문제임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영화들을 모았다. 예를 들어, 이자벨 위페르가 주연을 맡은 「피아니스트」는 스스로 성의 주체가 되려고 하는 여성의 욕망과 쾌락, 자율적 선택으로서 마조히즘을 보여준다. 정희진은 이 영화에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에게만 허용되는 일탈 욕망을 여성이 추구할 때 따르는 처벌을 확인한다. 「디 아워스」에서는 여성을 족쇄에 묶는 배타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의 신화와 그로 인한 고통을 보고, 여성을 유혹하는 ‘남성 요부’가 등장하는 「인 더 컷」에서는 남성이 저지르는 폭력과 파괴를 여성(이른바 ‘팜파탈’)의 탓으로 돌리는 남성 판타지를 뒤집는다.

  가부장제 사회가 남성은 성적 주체로, 여성은 성적 대상으로 만든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 유사 이래 여성은 언제나 성적 주체였다. ‘꽃뱀’의 유혹에 넘어간 남성들의 ‘억울한 호소’, ‘큰 뜻’을 이루려는 남성과 이들을 대변하는 남성 문화는 여성을 ‘남자 신세 망치는 골칫덩이’로 경멸해 왔는데, 그 혐오의 정점이 ‘창녀’였다. 이처럼 여성은 성의 피해자로서 또는 주체로서 남성의 편의에 따라 늘 양립해 왔다. - 「인 더 컷」(48쪽)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다. 문제는 필요한 관계를 얻으려면, 그 관계를 오래 이어 가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를 아는 것이다. …… ‘필요’가 ‘사랑’이 되려면 윤리가 필요하다. …… 사랑 이전에 윤리. 윤리는 정치학이고 사회 정의다. 윤리는 상대를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이렇게 말하면 된다. “당신의 존재,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 「하얀 궁전」(38~39쪽)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살아가야 한다면……”
- 2장 ‘상처가 아무는 시간’


  때로 삶은 보이지 않는 모래늪이 도사린 사막처럼 느껴진다. 고통과 상처가 언제 우리의 발목을 잡아챌지 알 수 없다. 끔찍이 사랑하던 자식을 유괴범의 손에 잃거나(「밀양」), 학교 급우들에게 왕따와 성폭력을 당하는 일(「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더 힘든 시간은 사건 이후가 아닐까. 상처를 끌어안고 어떻게든 다시 살아가야 하므로. 2장에서는 「위플래쉬」,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끔찍하게 정상적인」, 「밀양」까지 주로 고통과 상처를 정면으로 다루는 영화를 만난다.

  ‘우리’는 상처받았음을 강조하는 대신에 저들의 폭력을 폭로해야 한다. ‘우리’의 상처가 크고 작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슈가 되면, 우리는 지배 집단과의 싸움보다 누가 더 큰 상처를 받았는가를 두고 ‘경쟁’하게 된다. 문제는 ‘그들’이 사는 메커니즘 자체이고 그들의 잘못이지 ‘우리의 약함’이 아니다. - 「‘릴리 슈슈의 모든 것」(105~106쪽)

  약자에게 대화는 어려운 일이고, 강자에게는 귀찮은 일이다. 가해자가 대화를 먼저 요구할 때는 자기 필요에 의해서이고, 피해자가 대화를 청할 때는 “나한테 왜 그랬나요?”라고 묻기 위해서이다. 「끔찍하게 정상적인」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대면, 대화를 다루지만, 피해자는 무너지지 않고 가해자의 멱살을 잡는다. 피해자에게 도움까지 주겠다는 가해자의 팽창된 자아는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찌질하고 비겁하면서도 동시에 배려와 시혜의 주체가 되려는 이들. 이들은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자기의 잘못을 알고 있는 타인이 지치기를 바란다. - 「끔찍하게 정상적인」(125쪽)

  “말할 수 없는 것을 향해 돌진하기”
- 3장 ‘젠더, 텍스트, 컨텍스트’


  ‘나’는 누구인가? ‘나’의 정체성은 내가 사는 사회와 내가 속한(속한다고 여겨지는) 집단이라는 맥락을 벗어나서 말할 수 없다. 3장에서는 여성과 남성, 북한과 남한, 전통적 인간과 근대적 인간 같은 주체와 타자의 문제,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 문제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는 영화들을 모았다. 북한 남성 판타지를 잘 보여주는 「강철비」와 「공조」, ‘정치적인’ 남성과 ‘비정치적인’ 여성이라는 관점을 돌아보게 해주는 「송환」, 재일 조선인들의 정체성 문제를 다룬 「우리 학교」와 「피와 뼈」 등이 그러한 영화들이다.

  당대 남한 여성들의 낭만적 사랑의 욕구가 반영된 ‘남북’ 영화는 역설적으로 북한 여성이나 남한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성애 제도에서 보는 사람(관객)이 여성일 때, 대상(화된 인물)은 남성일 수밖에 없다. 한반도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사라졌다. 그래서 이런 영화들을 남북 화해와 흥행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영화라고 평가하는 것은 사실이 아닐뿐더러 위험하다. - 「강철비」, 「의형제」, 「용의자」, 「공조」(185~186쪽)

  인간은 양성(兩性)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사방지와 같이 여성도 남성도 아닌 중성으로 태어나는 이들을 양성구유(兩性具有, hermaphrodite)라고 하는데, 다른 ‘쉬운’ 말로 ‘어지자지’라고 한다. 학교 다닐 때 생물 시간에 배운 ‘자웅동체’, ‘암수한몸’은 열등한 생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등 동물’인 인간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을 남녀로 구별하는 것은,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이 성차별 사회이기 때문이다. 성차별 사회에서만 인간의 성차(性差)가 중요하게 여겨진다. - 「사방지」(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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