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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사랑의 생애/ 이승우

금동원(琴東媛) 2018. 9. 21. 17:34

 

 

사랑의 생애

  이승우 /예담

 

 

  대산문학상·현대문학상·황순원문학상·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프랑스의 세계적 문학상인 페미나상 외국문학 부분의 파이널리스트에 올랐으며, 르 클레지오가 한국 작가 중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작가로 격찬하기도 한 작가, 이승우가 5년 만에 신작 장편소설 『사랑의 생애』를 예담에서 출간했다. 사랑에 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소설은 평범한 사람들이 사랑을 시작하고 엇갈리고 끝내고 다시 시작하는, 어쩌면 더없이 평범해 보이는 과정을 통해 사랑의 근원과 속성, 그리고 그 위대한 위력을 성찰한다.

  이승우는 ‘특별한 사람들의 별스러운 사랑 이야기’보다 “평범한 사람들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경험을 할 때 그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미묘하고 당황스러운 현상을 탐사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 소설은 오랫동안 사랑에 관한 순간의 단상들을 떠오르는 대로 메모해온 작가의 기록들에서 탄생했는데, 그동안 이승우가 신과 인간, 구원과 초월, 원죄와 죄의식, 삶과 욕망과 부조리 등 심오하고 무거운 주제에 천착해왔다면, 이번에는 인간에게 가장 내밀하고도 원초적인, 그러나 또 그만큼 낯설고도 모순적인 사랑이라는 감정에 집중했다. 작가 특유의 문학적 현미경과 철학적 통찰력을 통해 집요하게 관찰되는 사랑 이야기는 ‘사랑’이라는 사건에 어떤 형태로든 관여되어 당혹하고 혼란스러워본 적 있는 독자들에게 사랑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으로 사유하도록 도와준다.

 

 

 

작가 소개

 

  Lee Seung Woo,李承雨 1959년 전남 장흥군 관산읍에서 출생하였으며, 서울신학대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중퇴하였다. 1981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에리직톤의 초상』이 당선되어 등단하였고,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있다. 1991년 『세상 밖으로』로 제15회 이상문학상을, 1993년『생의 이면』으로 제1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고, 2002년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로 제15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하여 형이상학적 탐구의 길을 걸어왔다. 이후 2003년 『심인광고』로 제4회 이효석문학상을, 2007년 『전기수 이야기』로 현대문학상을, 2010년 『칼』로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했다.

『생의 이면』, 『미궁에 대한 추측』 등이 유럽과 미국에 번역, 소개된 바 있고, 특히 그의 작품은 프랑스 문단과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다. 2009년에는 장편 『식물들의 사생활』이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의 폴리오 시리즈 목록에 오르기도 했는데, 폴리오 시리즈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문고본으로 세계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을 엄격한 기준으로 선정해 펴내고 있으며, 한국 소설로는 최초로 그의 작품이 선정되었다.

  소설집으로 『구평목씨의 바퀴벌레』, 『일식에 대하여』, 『미궁에 대한 추측』, 『목련공원』, 『사람들은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 『심인광고』 등이 있고, 장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 『내 안에 또 누가 있다』, 『생의 이면』, 『식물들의 사생활』, 『그곳이 어디든』 등이 있다. 이 외에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을 살다』 등의 산문집이 있다.

        

  ○책 속으로

 

  사랑할 만한 자격을 갖춰서가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올 때 당신은 불가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와서 당신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사랑이 들어오기 전에는 누구나 사랑할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랑했거나 사랑하고 있는 어떤 사람도 사랑할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어서 사랑했거나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은총이나 구원이 그런 것처럼 사랑은 자격의 문제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 p.10~11

  사랑하는 자는 알아가야 하는 숙제를 떠안는 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할 때 그 누군가는 앞으로 알아갈, 모르는 사람이(어야 한)다. 잘 알던(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사랑이 숙주 안에 깃들어 생애를 시작하려고 할 때 일어나는 신비스러운 일이다.
--- p.29~30

  조금 전 그녀에게 전화를 걸 때 그는 분명히 파스타를 먹고 싶어 했다. 그 순간에 그는 강렬한 식욕을 느꼈는데, 그가 먹고 싶은 음식은 구체적으로 파스타였다. 먹고 싶지 않은데도 파스타를 먹고 싶다고 속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파스타에 대한 자신의 그 식욕이 실제로는 구체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는데, 파스타의 어떤 맛이나 모양이나 재료가 떠오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떠올린 것은 어떤 재료로 만들어진 어떤 맛의 파스타가 아니라 그냥 기호로서의 파스타였다. 그리고 그 기호가 가리키는 대상은 그녀였다. 파스타는 그녀를 지시하는 부호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부르기 위해 파스타를 찾아냈다.
--- p.45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 말은 그 말을 듣는 사람만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도 겨냥한다. 더욱 겨냥한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말을 듣기도 하기 때문이다. 듣는 사람은 듣기만 하는 사람이지만 하는 사람은 하면서 듣기도 하는 사람이다. 듣는 사람은 잘못 들을 수도 있지만 하는 사람, 하면서 듣는 사람은 잘못 들을 수도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말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되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는 어렵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해놓고 사랑하지 않기는 더욱 어렵다.
--- p.129

  불안이 연인의 몸을 향해 손을 뻗게 하고, 만져도 닿지 않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 만지는 손길을 거칠어지게 하고, 멈추지 못하게 한다. 아무리 만져도 충분하지 않은 것은 안타까움 때문이고, 그럼에도 만지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중단했을 때 찾아올 존재의 불안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연인은 닿기 위해 만져야 하고, 닿지 않아도 만져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 애무는 이런 것이다. 에로틱한 것들은 실은 에로틱하지 않다. 에로틱하지 않고 안쓰럽다.
--- p.200

 

  잘 보이기 위해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라는 점에서 우정은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맺을 수 있는 가장 편하고 이상적인 관계이다. 보르헤스는, 사랑과는 달리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 우정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이 말속에는 증명해야 할 불편한 의무(우정에는 없는)가 사랑에는 주어져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사랑을 증명할 의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의무를 당연하게 요구하기도 한다. (…) 그러나 긴장이 만든 뜨겁고 황홀한 감정이 불편함보다 크고 우월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못하거나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려고 한다. 긴장으로부터 말미암은 불편함이 부각되거나 그것을 감수하기가 부담스러워지는 순간이 찾아올 때 이 관계는 어떤 전환점에 이르렀다고 보아야 한다.
--- p.210

  질투는 사랑의 크기가 아니라 그가 느끼는 약점의 크기를 나타내 보인다. 사랑해서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약점이 있어서 질투하는 것이다. 맹렬하게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열등감을 느껴서 맹렬하게 질투하는 것이다
 

--- p.226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사랑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 한가하고 부질없는 짓이기 쉽다.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은, 사랑을 겪고 있기 때문에, 사랑이 그의 몸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즉 그가 곧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이 무엇인지 물을 이유가 없다.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사랑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영복을 입고 물속에 들어간 사람은 물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수영을 즐긴다. 즐기는 데만 몰두한다. 물의 성분과 성질을 따지는 사람은 물속이 아니라 물 밖 실험실에 있는 사람이다. ----p284

 

  진정으로 살지 않는 자가 삶이 무엇인지 묻는다.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하고’ 사랑을 하는 것이다.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떻게 해도 정의되지 않는 것이 신이고 삶이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p285

 

 

  ○출판사 리뷰

 

  “사랑이 두 사람 사이로 들어와 자기 생애를 시작한다.
  그 생애가 연애의 기간이다.
  어떤 생애는 짧고 어떤 생애는 길다.
  어떤 생애는 죽음 후에 부활하고, 어떤 생애는 영원하다.”

  평범한 세 남녀의 삼각관계는 세 사람이 얽히고설키는 연애사이기도 하지만, 더 정확하게는 사랑의 한 생애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의 생애』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진짜 주인공은 그들을 사랑하게 하는 사랑 자체이다.

  먼저 사랑한다고 고백해올 때는 거절했던 대학 후배 선희가 이 년 십 개월 만에 뒤늦게 사랑이었다는 걸 깨닫는 형배. 형배에게 상처받은 마음을 겨우 추스르고 감정 정리까지 끝냈는데 이제 와서 제멋대로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형배가 당황스럽기만 한 선희. 공적인 관계였을 뿐인데 우연히 형배 대역으로 선희의 등단 축하 자리에 동석해주고 선희의 주문에 따라 “사랑해요, 나도”라고 말했다가 정말로 선희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영석. 이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 그때 그 순간 하필, 선희가 먼저 형배를 사랑하기 시작하고, 형배가 뒤늦게 선희에 대한 사랑을 자각하지만, 선희는 이제 영석을 사랑하게 됐을까?

  작가는 전부 사랑이 시킨 짓이라고 이야기한다. 사랑은 사랑할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사랑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주체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 사랑이 문득 들어와 자기 생을 시작하면서 그 사람에게 사랑하라는 자격을 부여하면 불가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속수무책으로 사랑을 겪는 것이다. 그 사랑이 사랑의 숙주가 된 우리를 움직여, 연애의 황홀한 기쁨부터 저승처럼 잔혹한 질투를 거쳐 이별의 괴로운 상처에 이르기까지 사랑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기 마련인 사랑의 신비롭고도 역설적인 속성들을 차례로 경험하게 만든다. 사랑의 선택적인, 그러나 무작위적인 개입으로 사랑하게 된 연인의 비논리적인 감정과 심리를 치밀한 논리로 집요하게 파고들어 우리가 왜 사랑하기 전의 자신과 그토록 달라질 수밖에 없는지 증명한다. 그리고 사람이 도저히 사랑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일깨운다.

  “사랑이, 대체 뭐예요?”

  사랑했거나, 사랑하고 있거나, 사랑할 모든 연인을 위해
  가장 통속적인 삼각관계가 보여주는 우리 사랑의 문학적 해부학

  선희를 꼭짓점으로 ‘카프카’처럼 사랑에 대한 갈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지닌 형배와 ‘오셀로’처럼 질투하는 영석이 이루는 삼각관계 외에, 『사랑의 생애』에는 키스하고 싶은 자칭 자유연애주의자, 타칭 바람둥이인 준호와, 결혼을 내세워 키스를 거부하는 ‘『좁은 문』의 알리사’ 같은 민영 커플도 등장한다. 사람의 매력이 다 다르므로 사랑은 유일할 수도 영원할 수도 없다고 믿는 준호는 결혼은 사랑과 무관하게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고안된 영원불변하는 사랑의 신화가 보호하는 제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맞서 민영은 사람의 감정이나 감각도, 거기에 의지하는 남녀의 사랑도 불완전하고 변덕스러우며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완전하게 보장해주는 장치가 필요하고, 그것이 바로 결혼이라는 의지라고 반박한다. 키스를 두고 준호와 민영이 팽팽하게 벌이는 논쟁은 사랑과 결혼, 연애와 키스와 쾌락에 대해 서로 다른 시선에서 생각해볼 기회를 마련해준다.

  사랑의 경험은 사람마다 다 다른 듯하지만 비슷하고, 또 비슷한 듯하지만 다 다르다. 작가가 적절한 배율로 조절한 현미경의 렌즈 속에서 다섯 연인들도 각자 다른 약점과 열등감을 가지고 다른 모습의 사랑을 한다. 그러나 그 배율을 좀 더 높이면 그들의 내부에서 자기 생애를 시작한 사랑 자체가 보이고, 사랑의 이면 때문에 불가항력적으로 휘둘리고 놀라워하고 욕망하고 불안해하는 그들에게 결국 질문 하나가 남는다. “사랑이, 대체 뭐예요?”

  “진정으로 살지 않는 자가 삶이 무엇인지 묻는다.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하고’ 사랑을 하는 것이다.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떻게 해도 정의되지 않는 것이 (…) 삶이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진실은 정황에 대한 이해에 의해 결정된다”

 

 소설가 이승우의 특별한 신작 27편 《만든 눈물 참은 눈물》

  조철 북 컬럼니스트 ㅣ sisa@sisajournal

 

 

  “카프카는 맞설 수 없는 상황에 맞서야 하는 실존의 아이러니를 우화 형식에 담은 짧은 소설을 여러 편 썼고, 톨스토이는 지상에서의 참된 삶에 대한 성찰을 민화 형식에 담은 짧은 소설을 발표했다. 카프카의 짧은 소설은 긴 질문지와 같고 톨스토이의 짧은 소설은 긴 답지와 같이 느껴진다. 내 짧은 소설들이 카프카적 질문과 톨스토이적 대답을 담고 있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그들의 진지한 질문의 방식과 대답을 향한 성실한 탐구의 태도가 나를 매혹했고, 이 글들을 쓸 때 내 가슴속에 있었다는 사실은 말해도 될 것 같다. 혹시 이 책을 읽은 누군가 수수께끼 같은 이 세상에 대한 짧은 질문이나 희미한 대답의 실마리라도 찾아냈으면 참 좋겠다.”

 

  1981년 23세에 등단해 37년 동안 예의 한결같음으로 묵묵히 소설가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이승우 작가가 소설집 《만든 눈물 참은 눈물》을 펴냈다. 소설을 이 지상의 보직이라고 여기는, 잘 쓰는 것보다 ‘끝내 쓰는’ 것으로 복무를 잘하고 싶다고 말하는 그는 최근 10년 동안 쓴 짧은 소설들 중 27편을 골라 완전히 새롭게 구성하고 다듬었다. 그는 대산문학상과 현대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프랑스의 세계적 문학상 페미나상 외국문학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으며, 여러 나라에 번역됨으로써 세계가 함께 읽는 작가다.

 

 

 

 

  삶에 대한 카프카적 질문과 톨스토이적 대답

 

  “요컨대 어느 쪽이든 연기라는 건 분명하다. 안 나오는 것을 ‘일부러’ 나오는 것처럼 하거나 나오는 것을 ‘애써’ 참는 척하거나 하는 연기일 수밖에 없고, 감정을 배반한다는 점에서 이 연기는 자연에 반한다. ‘일부러’든 ‘애써’든 이 연기를 보는 일이 불편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쏟아지려 하는 것은 쏟아지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나오지 않는 것은 내보내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운 모든 것은 비의도적이고(자연에는 의도가 없으니까), 부자연스러운 모든 것은 의도적이다(문명은 의도의 산물이니까). 쏟아지려는 것을 쏟아지지 않게 막거나 나오지 않으려는 것을 나오도록 만드는 것은, 인간이 흔히 하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짓인데, 그것은 인간이 비자연이기 때문이다.”

 

  이번 소설집은 걸작과 우연의 상관관계, 영원히 남는 책과 수정이 거듭되는 책의 독특한 운명, 읽지 않은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한 작가의 억울한 사연 등 ‘쓰는 인간’이 맞닥뜨린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또 공장 기술자에서 공장 소유자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의 당황스러운 죽음,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집을 지으려다 결국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무덤을 갖게 된 이의 이야기, 어느새 슬픔에 중독돼 더 이상 슬픔을 떠날 수 없는 한 남자의 기이한 정황 등 인생의 이면 등 특정할 수 없고 이해 불가한 인간의 여러 모습들 속에서 작가가 포착한 삶의 비의가 선명하게 살아 숨 쉰다. ‘쓰는 인간, 사랑하는 인간, 사는(죽는) 인간’이 처한 진지한 질문과 대답이 아이러니라는 생생한 감각을 입고 독자를 맞는다.

 

  “자기 자신을 위해 세상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고 웅장한 집을 짓기를 원했던 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초라한 곳에서 외롭게 죽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도 없었다. 목수는 반나절 만에 그의 관을 짰다. 사람들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세상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고 웅장한 그의 집 안으로 그의 관을 가지고 갔다. 그가 만들다 만, 세상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고 웅장한 집은 그의 무덤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고 웅장한 무덤이 되었다.”

 

  그간 신과 인간, 구원과 초월, 원죄와 죄의식, 욕망과 부조리 등에 천착하며 다양한 삶의 표정들을 부조해 왔던 작가의 짧은 소설은 ‘아이러니의 연대기’라고 불러도 될 장면들을 독자에게 선물한다. 

 

  “만일 그가 구상 중이거나 쓰고 있는 것과 같은 소설이 누군가에 의해 이미 쓰여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면, 그는 이미 쓰인 걸 확인했으니 쓸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런 소설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쓸 수 없을 것이다.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지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있는 소설들을 모조리 찾아 읽는 방법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평생 읽기만 해도 시간이 모자랄 것이다. 이래저래 그는 소설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작가는 수치심과 연민, 이해 불가한 양가의 감정 등 여러 층위의 섬세한 감각을 호명하는가 하면 납득할 수 없는 인생의 원리를 표본 채집하듯 날카롭게 눈앞에 보여준다. 모순덩어리 인간의 문제 혹은 조건은 그의 짧은 소설 속에 강렬하게 보존된다. 

 

 

  현실의 부조리와 기이함, 아이러니의 연대기 

 

  “‘연인들은 의무감에 사로잡힌 자들’이라는 정의가 틀리지 않다면 이 변명은 받아들여져야 한다. 과장과 입에 발린 수사가 허용되고 장려되는 유일한 영역이 연애이기 때문이다. 연애는 가장 작은 왕국이고, 이 왕국에서 연인들은 서로에게 군주이면서 신민이다. 서로를 통치하면서 동시에 지배받는다.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통치를 하는 것도 받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는 영역이다. 어떻게 해도 자기가 바라는 대로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연인은 늘 불안하고 믿지 못하는 상태 속에 있다. 군주는 신하를 믿지 못하고, 신하는 군주를 믿지 못한다.”

 

  누군가를, 누군가의 인생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그 물음이 가당치 않은 건 우리가 인지하는 것들이란 대개 표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오롯이 이해할 수 없는 한계 속에서 마주하는 현실의 부조리함과 기이함, 아이러니의 단면을 작가는 선명히 불러온다. 이런 삶의 아이러니와 모순을 헤아리고자 하는 작가는 세계의 곳곳에서 출몰하는 ‘알 수 없음’의 조각들을 각자의 방식대로 하나하나 맞춰감으로써 마침내 아주 조금 선명해지는 것들로 풀어낸다. 작가는 기이하고 알 수 없어서 질문할 수 있고 혹은 대답할 수 있고, 그래서 의미를 갖는 소설적 풍경들이 지금 이곳 우리의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할 수 있으리라 믿었을까. 

 

  “진실은 알 수 없는 것이고, 이 경우 해석은 정황, 더 분명하게는 정황에 대한 이해에 의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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