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원 시인의 TISTORY

이 곳은 시인의 집! 문학과 예술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듣고 말합니다

금동원의 우연의 그림 앞에서

나의 소식

이동주 시의 에로티시즘

금동원(琴東媛) 2020. 11. 12. 23:19

이동주 시의 에로티시즘

 

금동원

 

  이동주의 시를 읽는다는 건 나에게 흥미로운 도전이다. 그는 1920년생이다. 올해는 특별히 탄생 100주년을 맞은 작고 문인들에 대한 작품 세계를 새롭게 고찰해보는 연구가 학계와 시단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우리 고유의 정한을 바탕에 둔 새로운 관점의 한국 서정시의 전통을 보다 구체적으로 탐구하고 민족적 가치의 세계관으로 확대해석하려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이동주는 한국적인 전통을 가장 잘 계승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동주의 시를 읽고 해석한 비평가들과 연구자들은 대부분 그의 시에서 ‘한으로 풀어낸 전통 서정시’라는 시적 분위기를 전한다. ‘한을 토대로 신명 나게 놀고, 산조와 율의 언어로 다시 한을 풀어내는 민족 고유의 전통적인 슬픔과 한의 정서를 품격있고 유연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한 해석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나는 조금 다른 관점을 덧붙여 말하고 싶다.

  이동주의 시를 읽으면서 반복적으로 느낀 것은 결핍과 그리움의 서정이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본능적으로 분출되어 나오는 서늘한 감정 역시 한과 신명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시에 스며있는 요란스럽지 않은 에로티시즘이다. 성의 감각적 측면이라는 의미에서 바라볼 때 드러내놓고 감정을 표출하거나 호들갑스럽고 화끈한 시적 표현을 의도적으로 배치한 시와는 차이가 있다. 젊은 나이에 고향을 떠나 물질적 정신적 결핍으로 점철했던 젊고 순수한 그리움의 에로티시즘이 어쩌면 그의 시 본질에 가까운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아버지의 부재와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모성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시의 소재, 그리고 주제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성은 지적이고 고고해야 하며 아름다워야 한다는(어머니에 대한 회상으로 쓴 사모곡 참조) 여성성에 대한 시선이 형성되어있다. 어린 시절 집을 떠난 그에게 어머니는 모성을 품은 여인이자 애인이며 흠모하는 여성의 아련하고 순수한 모습이다. 이런 시각에서 이동주의 시를 몇 가지 관점 아래 살펴보기로 한다.

 

1.

  이동주는 어린 시절 유복했던 할아버지 덕분에 편안한 생활을 누렸지만, 아버지의 일탈과 부재에 가까운 존재감 때문에 더욱 어머니에게 마음이 기운다. 집착까지는 아니라 해도 어머니가 견디며 살아온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늘 마음이 아프다. 그랬기에 역설적으로 그런 풍경과 답답함이 있는 고향을 떠나 멀리 문학을 찾아 나선다. 22살에 혜화전문대학(불교학과)에 입학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는 심정적인 허전함과 여성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짙어간다. 젊은 시인 이동주에게 드러나 있는 여성성과 에로티시즘은 매우 얌전하고 은근하다. 그를 시단에 보내준 스승 서정주가 쓴 관능적이고 탐미적인 시어를 닮지는 않았지만 고요하게 슬며시 숨겨놓은, 때로는 역동적 모습으로 풀어놓은 그만의 품격있는 사랑법과 에로틱한 정한이 시 몇 편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첫 시집의 첫 작품으로 <새댁>을 선택한 것은 어머니의 삶 속에 녹아있는 슬프고 고단한 한국적 여성의 생에 대한 연민과 보답의 시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시에서도 이동주 특유의 단아한 여성성과 고고한 성적 이미지를 발견해 낼 수 있다.

 

  친정에 가서는 자랑이 꽃처럼 피다가도

  돌아오면 입 봉하고 나붓이 절만 하는 호접胡蝶

 

  눈물은 깨물어 옷고름에 접고

  웃음일랑 살몃이 돌아서서 손등에 배앝는 것

 

  (......)

 

  애정은 법으로 묶고

  이내 돌아오지 않는 남편에게

  궁체로 얌전히 상장을 쓰는......

  - <새댁>에서

 

  고이 쓸어 논 뜰 위에

  꽃잎이 떴다

 

  당신의 신발

 

  동정보다 눈이 부신

  미닫이 안에

  나의 반달은 숨어......

 

  이제사 물오른

  버들 같은 가슴으로

 

  나는 달무리 아래 선다

  -<뜰> 전문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의 시집살이와 시누이들의 등쌀에도 묵묵히 남편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한국적인 여인상을 발견한다. 친정에 가면 마음껏 어리광과 발랄함을 보이며 본래 기질의 모습을 드러내다가도 시댁에 오면 남편만을 기다리고 의지하는 전형적 여성으로 변모한다. 결핍과 기다림, 인내의 정한에 숨어있는 억제된 여성성을 읽어낼 수 있다. 지금의 여성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수동적이고 체념적인 삶 속에서도 내면에 감춰진 원초적인 여성성을 이동주만의 시적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육체적이고 애욕으로 들끓는 에로티시즘이 아니라 기다림의 에로티시즘이다. 힘든 살림과 바느질에 시간을 바치며 기다리고 기다리며 얌전하고 단정한 궁체로 상장을 쓰는 길고도 외롭던 그녀, 그 속에 감춰진 여성으로서의 성적 권리와 자유는 아득해 보인다. 이동주의 시에 드러나는 여인들은 다소곳하지만, 지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여성성을 조용하게 드러내고 있다. 내숭스러움과는 다른 기다림과 인내의 정조가 몸에 밴 부끄러운 듯 기품있는 내적 에너지이다.

  이동주가 사랑하는 여인들의 모습에는 언제나 지적 분위기가 들어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문학적 분위기가 풍기는 흠모와 선망이 있다. 시인이 특별히 좋아하는 ’물에 젖은 포도알처럼 서글서글한‘ 커다란 눈망울조차 그리움과 동경이 억압된 삶과 닮아있는 성적 판타지로 환치된다.

 

  금슬琴瑟은 구구 비둘기......

 

  열두 병풍

  첩첩 산곡인데

  칠보 황홀히 오롯한 나의 방석

 

  오오 어느나라 공주오니까

  다소곳 내 앞에 받들었소이다

 

  어른일사 원삼을 입혔는데

  수실 단 부전 향낭이 에릿해라

 

  황촉黃燭 갈고 갈아

  첫닭이 우는데

  깨알 같은 정화情話가 스스로워......

 

  눈으로 당기면 고즈너기 끌려와 혀끝에 떨어지는 이름

  사르르 온몸에 휘감기는 비단이라

  내사 스스로 의의 장검을 찬 왕자

 

  어느새 늙어버린 누님 같은 아내여

  쇠갈퀴 손을 잡고 세월이 원통해 눈을 감으면

  살포시 찾아오는 그대 아직 신부고녀

 

  금슬琴瑟은 구구 비둘기

  -<혼야婚夜> 전문

 

  이동주 자신의 신행 첫날 밤을 그려낸 시다. 원삼 저고리에 족두리를 한 신부를 앉혀놓고 마주 앉은 새신랑의 설렘과 뿌듯함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열두 병풍으로 둘러쳐진 아늑하고 황홀한 공간에서 신랑이 느꼈을 감정은 어떤 마음일까. 마주하고 있는 신부의 모습은 어느 나라 공주인지 아름다움에 취하고, 향낭에서 살살 풍겨 나오는 향기에 취하고, 문밖 댓돌 위에서 문풍지에 침을 바르고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을 주는 풍경이다. 손가락 하나 크기의 동그란 구멍 뚫린 곳에서 바라보는 풍경, 그 자체가 에로틱하다. 카메라 줌을 가까이 대고 신부의 모습을 눈코입 차례로 클로즈업하는 것이 아니라 문풍지를 뚫어 놓은 손가락 하나 정도 크기에서 바라본 신방의 풍경은 몸이 덩달아 달달해지는 아득함과 황홀한 설렘이 있다. 한국적 에로티시즘의 역사를 쓴 서정주의 시처럼 생생하고 관능적인 표현의 시어는 없지만, 이동주 방식의 황홀한 아름다움은 드러나 있다.

  은근하게 보여준다. 읽고 느끼는 이의 상상 속에서 피어나는 에로티시즘이다. 다 들어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숨겨놓은 인고의 세월과 투박한 삶 속에서 느끼는 연민의 감정이 슬픔으로 변신하고, 애정으로 변하고, 그것은 다시 생명력을 얻고 역동적 삶의 모습으로 전환되어 살아가는 힘이 된다. 신혼 첫날밤의 아내가 늙어 누님같이 변한 쇠갈퀴 손을 잡고 세월이 원통해 눈을 감지만 그런 아내의 모습에서도 그리운 신혼 첫날밤의 설렘과 연민을 느낀다.

  사람들은 에로틱하면 관능적인 성적 에너지만 상상하는 경우가 많다, 그건 대부분 사실이지만 에로틱은 인간이 갖는 본연의 생명력이자 삶에 대한 욕구다. 살아있음에 대한 마음의 위로와 정신적 충만함이다. 내면의 격정적 에너지를 표출하기도 하지만 신비감으로 감춰두었던 역동적 생명력을 고요하고 얌전하게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2.

  이동주의 시에 등장하는 여성상은 주로 어머니와 아내다. 간간이 어린 딸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한 많은 어머니와 안쓰러움으로 가득한 아내의 모습이다. 관습에 매인 억압적인 삶에 가슴 아파하는 연민과 안타까움으로 가득하다. <소복>에 드러나 있는 표출되지 않은 여인들의 삶 속에 감춰진 비수처럼 날카롭고 섦은 삶의 애착을 본다. 오월에도 서리가 내리는 한과 슬픔으로 점철한 마을마다 흰옷 입은 여인들의 모습에서 여성으로서 억압되고 견딘 인고의 한 맺힌 삶, 분출되지 못한 여성으로서의 생명력과 서럽고 체념적인 마음이 한 서린 슬픔으로 드러나 있다.

 

  빈방에 백합百合이 쓰러진다

 

  반달 눈썹 물먹은 포도알

  야윈 두 볼에 아롱이 지네

 

  입술을 깨물어 피가 터지고

  슬픈 매무새 고쳐 여미면

  오월에도 내리는 싸늘한 서리

 

  고이 사윈 청춘의 먼 후일에도

  비수匕首 녹슬지 않으리

 

  애닯기사 생대 같은 정절인데

  마을마다 흰옷 입은 여인이여

  -<소복素服> 전문

 

  한편 이동주의 시 속에는 역동적인 여인의 모습이 등장한다. 한과 신명으로 들뜬 여인들의 삶에 활력이 느껴진다. 과거 전통적인 여성상에 나타나는 인내와 수동적 삶의 헌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역동성이 숨어있다. 현대의 여성처럼 개방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삶의 선택과 방식이 없었던 그 시절에도 여성들은 결코 기죽어 있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이동주 시에서 발견되는 여성의 숨겨진 내발적 에너지다. <강강술래>를 통해 나타난 여성의 삶 속에 스민 능동성, 에로틱한 생명력과 자발적이고 건강한 삶의 풍경에 감동한다.

  개인의 삶도 여성이라는 본능도 억압받던 시절, 여성들은 원초적 생명력, 성적 에네르기를 어떻게 풀어내어 정서적 심리적으로 치유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인가. 시대와 풍습과 차별에 막혀 마음에 응어리져 있던 여러 의미로서 억눌렸던 모든 억압과 욕구불만을 어떻게 해소하고 풀어낼 수 있는가. 그것의 한 방법이 춤이고 노래이고 군무이고 타령이다. 단오나 정월 대보름 축제에나 남자를 볼 수 있다는 고전적 사실이 말해주고 있듯이 옛 여인들의 삶은 억압받고 갇혀있는 삶이다. 여성들만의 축제이고 한풀이이고 성적 억압에 대한 해소가 바로 <강강술래>다.

 

  여울에 몰린 은어 떼

 

  뼈비꽃 손들이 둘레를 짜면

  달무리가 비잉, 빙 돈다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얼 래에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백장미白藏薇 밭에

  공작孔雀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강강술래

 

  뇌두리에 테프가 감긴다

  열두 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기폭이 찢어진다

  갈대가 스러진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 <강강술래> 전문

 

  <강강술래>는 몇 번을 읽어도 마음 밑바닥에서 요동치는 감흥을 일으키는 시다. 이 시를 읽으면 마티스의 <춤>이 떠오른다. 벌거벗은 여인들이 손에 손을 잡고 원형의 형태를 유지하며 매우 역동적이고 자유롭게 춤추는 그림이다. 명화의 반열에 올라 마티스를 더욱 잊을 수 없는 화가로 만든 작품 중 하나다. 이 그림에 남성은 등장하지 않는다. 모두 벌거벗은 여성들의 모습이다. 둥그런 원형의 형태를 가진다. 당연히 혼자서는 만들 수 없는 형태이기도 하지만 손에 손을 잡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원형의 형태가 만들어진다. 둥근 원은 원만함이고 물처럼 잘 흘러가는 뭉침이 없는 것이다. 어느 한 곳에 맺혀있거나 각져 모난 곳이 없다. 다시 말하면 본질적이고 원초적 모습의 단면이 된다.

  <강강술래>는 역동적인 폭발력과 내재 된 성적 판타지를 모두 담고 있다. 강강술래는 단체로 추는 군무이다. 군무가 주는 의미는 함께 무언가에 동참함으로써 그것이 갖는 공감과 위로가 있다. 나만 이렇게 외롭고 힘든 것이 아니구나, 동병상련의 아픔과 동지애를 가지며 마음에 응어리졌던 한과 슬픔, 원망과 고단한 삶의 막막함을 극복하고 털어낸다. 마티스의 <춤>이나 이동주의 <강강술래>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거의 여성이다. 껑충거리며 뛰고 손을 잡고 돌고 도는데 남성은 없다. 그 의미를 성찰해야 한다.

  이 시의 미덕은 시어가 갖는 아름다운 미감이다. 한 편의 움직이는 영상을 보는 것 같다. ‘강강술래’의 건조한 리듬이 아니라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얼 래’라는 리듬은 일품이다. 저절로 노래의 흥이 되살아나고 세포 하나하나에 숨어있던 여성적 에너지들이 분출된다. 삶의 역동성이자 여성성의 회복이다. 춤사위에서 느껴지는 것은 단순히 해소나 해결의 차원이 아니라 근원적인 발원지를 찾은 강의 원류 같은 것이다.

  <강강술래>는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에로티시즘의 발견이다. 이동주는 이 작품을 통해 격정적이고 노골적인 시어 없이도 생생한 이미지를 통해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들을 표현한다. 다소 소극적이고 내성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으나 엄청난 에너지로 점점 고조되고 촉발된다고 볼 수도 있다. 무대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폭발적인 끼와 에너지를 발휘하는 배우들이 현실로 돌아오면 놀랄 정도의 내성적 이미지로 돌변하듯 숨겨진 에너지, 즉 숨겨두었다가 한꺼번에 폭발하고 해소하는 변증된 에로티시즘이 삶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절정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 시에 드러난 세부적인 에로티시즘을 읽어보자.

 

  ‘여울에 몰린 은어 떼’

 

  여울이라는 곳은 물이 티 없이 맑은 곳이다. 은어는 물이 맑고 차갑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물고기다. 이동주가 바라보는 여성들은 모두 맑고 깨끗한 물에 사는 청초하고 순수한 그러나 연약한 은어 같은 존재다. 은어는 화려하거나 힘 있는 물고기가 아닌 평범하고 작은 물고기에 불과하다. 맑고 깨끗한 물에 사는 연약하고 힘없는 물고기 즉, 여성인 것이다. 그런 여성들이 삐비꽃처럼 작고 거친 손들을 맞잡으면 달무리가 지듯 둥근 원형이 생긴다. 이미 신명과 들뜸의 에너지가 애무와 성적 전희의 과정처럼 목구멍까지 올라와 차오른다. 다잡아 목구멍으로 한 맺혀 고여있던 서러움의 때를 끌어 올리면 거친 ‘가아으 가아응...’ 소리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서툴고 거친 소리가 나지만 곧 물이 차오르듯 촉촉하고 매끄러운 소리들이 터져 나온다. 두 눈을 감고 잠시 그 장면을 상상해보라. 슬픈 은어 떼와 달무리의 노래와 춤을, 여인들이 함께 노래 부르며 서러움과 슬픔이 휘감긴 아름답지만 처연한 춤사위에서 억압과 인내로 억눌렸던 여성의 본성이 깨어난다.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얼래에...’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마음속에 숨겨둔 감정을 건드리면 걷잡을 수 없는 설움이 올라온다. 목 줄기가 뻐근해지면서 온갖 서러움과 슬픔, 한스러운 감정들이 목구멍을 조이며 붉게 충혈시킨다. 얼마나 응어리지고 서러웠던 시간인가. 한은 그리움과 기다림이 쌓아놓은 감정들이고 일렁임이다. 여성으로 존재하고 여성으로서 사랑받고 싶은 생래적 본능이 ’강강수우얼래......‘ 춤을 추면서 맞잡은 손과 노래는 투박하게 잃어버렸던 여성의 정체성으로 되살아난다. 서러움은 모든 인내와 견딤의 마지막 감정들이다. 남편의 손을 잡고 첫날밤의 신부처럼 사랑받고 살아가고 싶은 한국적 정한 앞에서 이동주가 그려낸 몇 편의 시들은 상당히 페미니즘적 이다.

 

  ’백장미白藏薇 밭에

  공작孔雀이 취했다‘

 

  라는 표현 속에 숨은 남녀상열지사를 끄집어내는 건 너무 과한 시적 상상력인가.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에서 치닫고 있는 성적 격정을 상상하는 건 지나친 오지랖인가.

 

  ‘뇌두리에 테프가 감긴다

  열두 발 상모가 마구돈다.’

 

  에서 절정을 향해 휘몰아치는 폭풍 같은 장단과 춤사위를 성적 에로티시즘과 맞물려놓은 것은 넘침인가. 그러나 춤과 함께 들려오는 꽹과리와 장구 피리 소리와 노랫가락 모두 함께 상상해보라. 한곳을 향해 치닫고 있는 삶의 절정, 그 역동성에서 생명이 분출하고 다시 살아가는 삶의 기운을 회복하는 것이다. 인간은 삶이 성이고 생명력이고 새로운 도약이고 의미가 될 수 있다. 고요함 속에서 점점 촉발되어가는 춤과 어우러진 전통적 한국 여성의 삶이 한 편의 시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동주 시인이 얼마나 여성을 어머니를 아내와 딸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서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무아지경으로 춤추고 있는 이 지점을 절정의 순간이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삶의 절정, 생명력의 절정, 성적 판타지의 절정, 그리하여 드디어

 

  ‘기폭이 찢어진다

  갈대가 스러진다.’

 

  삶이 다시 생명을 얻고 고단함과 서러움과 기다림과 한의 정서가 새롭게 시작된다. 다시 살아가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동주 시에서 발견한 에로티시즘은 이토록 깊고 아득하고 신명이 난다. 야한 시어 한마디 없이 우리를 무아의 지경까지 휘몰아치고 고요하게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게 한다. 한바탕 땀을 흘리고 나면 온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회복되며 다시 의미 있는 삶의 방향을 잡아가기 시작하듯이 말이다.

 

  - 《펜문학》 2020. 9 .10월호(통권 15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