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닦다
김향숙
질문을 손에 쥐고 한참 만지작거린다
이쪽저쪽 섞어가며 갸우뚱거려도
중심이 서지 않는다
눈알을 좌우로 굴려도
자꾸만 넘어지려 한다
질의는 섣부르고 답변은 성급하다
어눌한 부위에서 넘어질 뻔했고
약삭빠른 부위에서는 기어이 넘어졌다
그때마다 일어선 것은 태도가 아니라 마음
다시 질문을 펴보기 위해서였다
돌멩이에 질문을 하면
퐁당 소리를 들려주거나 동그란 파문을 보여 준다
제약 없는 질문의 경우
제한 시간의 독촉이 있다
정답과 오답을 옮겨다니는 설문과 달리
대답의 한 짝은
왼발 오른발처럼 어색하고도 익숙했다
안경알을 닦듯 닦다 보면
초침을 끌고 다니는 질문의 일생이 보였다
의문만 모아 파는 책의 뒷편에는
대답만 모아놓은 별책 부록이 달려 있어
정답을 알게 되는 일은
질문을 통해 대답을 배운다
정답과 오답이 없는 무한한 세계
가장 어려운 질문과 답은
내가 나에게 하는 질문과 대답이다
연필의 국경
힘을 주지 않았는데 연필이 부러졌다면 부러진 것은 연필심이 아니라 작심作心이다 힘을 뺀 손에 힘을 더 빼다보면 뺀다는 의지만으로도 힘이 된다 연필은 속으로 저항한다 악력은 약한 필체를 떨게 한다 부러진다는 건 끝내 타협할 수 없는 결단이다 살을 깎아야 보이는 뼈, 누가 칼을 들었는지 뼈가 검다 그러므로 백지를 가르는 선은 흑심이다 흑심을 품은 행간은 구겨지기 쉽고 백지를 가르는 흑심은 우리가 되기 어렵다 연필은 당연한 것을 흘린다 그것이 닳아 가는 줄도 모르고 몽땅 의식을 긁어낸다 거기에서 태어난 지우개는 지레 울게 마련이다 연필심에 침을 묻히듯 작심이 나를 점찍을 때 연필은 백지로 망명해온다
-질문을 닦다,(2023, 실천문학사)
◎작가소개
2019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명왕성 유일 전파사」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상 시 부문 대상, 황순원 디카 시 대상, 이병주 탄생 100주년 팬픽에서 금상, 호미문학상, 최충문학상 대상 등을 수상한 김향숙 시인이 첫 시집 『질문을 닦다』를 《실천문학사》에서 출간했다. 이 시집에는 시집의 제목 『질문을 닦다』처럼 사물과 인생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사유하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형상화한 4부 49편의 미려하면서도 진지한 시어로 가득한 시들이 실려 있다. 이 시집의 해설자가 ‘최근 필자가 본 시들 가운데 이 시인의 시들처럼 관찰다운 관찰을 보여준 사례를 본 적이 없었다.’는 상찬의 글과 김향숙의 시는 ‘삶의 본질을 관(觀)하면서 통(通)하고 뭉개면서 일으켜 세운다.’거나 ‘사물을 드러내되 그것이 보여주는 일회적 현상에 현혹되지 않고 조금씩 미끄러져 그 궁극의 가치에 도달해 가는 릴케 식 사물시(事物詩, Dinggedicht)에 조응한다’는 두 추천사의 글을 통해서도 시인이 얼마나 놀랍고 특출한 질문자이자 관찰자로서의 눈을 소유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시인의 특출한 질문에 대한 정답은 정해진 뻔한 답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독자들의 제각각의 몫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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