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Tutaj)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다른 곳은 어떤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여기 지구에서는 모든 것이 꽤나 풍요로워.
여기서 사람들은 의자와 슬픔을 제조하지.
가위, 바이올린, 자상함, 트렌지스터,
댐, 농담, 찻잔들을.
어쩌면 다른 곳에서는 모든 게 더욱 풍족할 수도 있어.
단지 어떤 사연에 의해 그림이 부족하고,
브라운관과 피에로기*, 눈물을 닦는 손수건이 부족할 뿐.
여기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장소와 그 주변 지역들이 있어.
그중 어떤 곳은 네가 특별히 좋아해서
거기에 고유한 이름을 붙이고,
위해(危害)로부터 그곳을 지켜내고 있는지도 몰라.
어쩌면 다른 곳에도 여기와 비슷한 장소가 있지 않을까.
단지 거기서는 아무도 그곳을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을 뿐.
어쩌면 다른 어느 곳과도 달리,혹은 거의 대부분의 어느 곳과는 달리
여기서는 네게 자신만의 토르소가 허용되었는지도 몰라.
필요한 부속품을 장착한 채로,
네 아이들을 다른 아이들 무리에 포함시킬 수 있게 말이야.
팔과 다리, 경탄을 금치 못하는 머리는 말할 것도 없고.
여기서 무지(無知)는 과로로 뻗어버렸어,
끊임없이 뭔가를 게산하고, 비교하고, 측정하면서
결론과 근본적 원리를 추출해내느라.
그래, 알고 있어,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기서 지속적인 건 아무것도 없어,
태곳적부터 지금까지 원소들의 지배 아래 있었으니까.
하지만 잘 생각해봐- 원소들은 쉽게 지치거든,
그리고 다시 시동을 걸 때가지
가끔은 한참 동안 쉬어줘야 해.
그래, 알고 있어, 네가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쟁, 전쟁, 전쟁.
하지만 그사이에는 늘 휴지기(休止期)가 있게 마련이지.
주목! - 사람들은 악해.
주목! - 사람들은 선해.
주목하는 동안 황무지가 만들어지고,
쉬는 동안 피땀 흘려 집들이 지어져,
그리고 사람들은 그곳에 재빨리 정착하지.
이 땅 위에서의 삶은 꽤나 저렴해.
예를 들어 넌 꿈을 꾸는 데 한 푼도 지불하지 않지.
환상의 경우는 잃고 난 뒤에야 비로소 대가를 치르고.
육신을 소유하는 건 육신의 노화로 갚아나가고 있어.
그것만으로는 아직도 부족한지
너는 표 값도 지불하지 않고, 행성의 회전목마를 탄 채
빙글빙글 돌고 있어
그리고 회전목마와 더불어 은하계의 눈보라에 무임승차를 해,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여기 지구에서는 그무엇도 작은 흔들림조차 허용되지 않아.
가까이 와서 이것 좀 보라고.
탁자는 본래 있던 그 자리에 정확히 서 있어,
책상 위에는 본래 있던 그대로 종이가 놓여 있고,
반쯤 열린 창으로 한 줌의 공기가 스며들어 오지,
벽에 무시무시한 틈바구니 따위는 없어,
혹시 널 어디론가 날려버릴지도 모를 틈바구니 따위는 말이야.
* pierogi : 만두와 비슷한 폴란드의 전통요리
- 『충분하다』, (문학과 지성사, 2016)-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유고 시집
쉼보르스카의 시에는 서양의 전통적인 사조나 미학이론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우주적 상상력이 투영되어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쉼보르스카의 시는 이질적이면서 독창적이다. 시인의 시집 11권에서 선별하여 엮은 이 시선집은 쉽보르스카 문학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서울=뉴스1) 권영미 기자 | 2016-03-02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AFP=News1 |
"나는 지도가 좋다, 거짓을 말하니까./잔인한 진실과 마주할 기회를 허용치 않으니까. /관대하고, 너그러우니까. /그리고 탁자 위에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또 다른 세상을 내 눈앞에 펼쳐 보이니까."(쉼보르스카가 마지막으로 완성한 시 '지도'의 마지막 부분)
강렬한 상징도, 시적인 기교도 없다. 맑고 투명한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그것을 읊조리듯, 속삭이듯 시에 담는다. 시와 시인, 시와 독자, 시와 세상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막이 사라지고, 무정형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강력한 '진실'을 시 곳곳에 넣어 한순간 독자를 몰입하게 한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2012)의 시다.
사망한 양배추를 곁들인 돼지고기 사체(死體).
모든 메뉴는 일종의 부고(訃告).
(중략)가장 서정적인 시인들조차 그러하다.
가장 엄격한 금욕주의자들도
끊임없이 씹고, 삼킨다.
한때는 성장을 지속했던 어떤 대상을.
나는 이 대목에서 위대한 신들과 화해할 수가 없다.
(중략) 굶주림이 시작되는 곳에서
결백은 종말을 고한다.(시 '강요' 중에서)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폴란드의 '국민시인' 쉼보르스카의 시집 '충분하다'(문학과지성사)가 국내 출간됐다. 생전에 출간한 마지막 시집인 '여기'와 유고시집인 '충분하다'를 묶은 시집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그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며 "모차르트의 음악같이 잘 다듬어진 구조에, 베토벤의 음악처럼 냉철한 사유 속에서 뜨겁게 폭발하는 그 무엇을 겸비했다"고 칭송한 대로 이 책에는 나른함과 긴장, 맑고 시원한 물을 머금은 수맥과 끓고 있는 용암이 공존하는 듯하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전 쉼보르스카는 유언처럼 이런 말을 남긴다. “나는 참으로 길고, 행복하고, 흥미로운 생을 살았습니다.(중략) 운명에 감사하며, 내 삶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에 화해를 청합니다.”
1923년 태어나 격동의 유럽 역사를 살아낸 그의 인생이 행복했을 리만은 없다.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국민의 20% 가까이가 죽었다. 전후에도 독재의 집권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그의 시에는 비명과 고통의 언어 대신 간결하고 신중한 언어와 반어법, 유머가 담겼다. 동료시인 아담 자가예프스키가 말했듯 이런 이유로 쉼보르스카의 시는 ‘위안’을 준다.
2009년 '여기'를 출간한 뒤 86세의 쉼보르스카는 다음 시집 제목을 '충분하다'로 정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시인은 '충분하다'로 묶을 시편을 다 완성하지 못하고 여섯편의 시를 미완성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떴다.
하지만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충분하다'는 제목과 시집 속의 시들은 말 그대로 충분하다. 고통스럽고도 영예로운 인생을 산 시인이 자신에게,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보내는 그만의 작별인사인 이 말은 책을 덮자 더 가슴이 차오르는 듯한 '충분한' 울림을 전해주고 있다.(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최성은 옮김·문학과지성사·1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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