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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詩를 읽다

곡시(哭詩)--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 /문정희

금동원(琴東媛) 2017. 11. 20. 21:33

곡시(哭詩)
   -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

 

 문정희


  한 여자를 죽이는 일은 간단했다.
  유학 중 도쿄에서 고국의 선배를 만나 데이트 중에
  짐승으로 돌변한 남자가
  강제로 성폭행을 한 그날 이후
  여자의 모든 것이 끝이 났다.
  출생부터 더러운 피를 가진 여자! 처녀 아닌 탕녀!
  처절한 낙인이 찍혀 내팽개쳐졌다.
  자신을 깨워, 큰 꿈을 이루려고 떠난 낯선 땅
  내 나라를 식민지로 강점한 타국에서
  그녀는 그때 열아홉 살이었다.
  뭇 남자들이 다투어 그녀를 냉소하고 조롱했다.
  그것도 부족하여 근대 문학의 선봉으로
  새 문예지의 출자자로 기생집을 드나들며
  술과 오입의 물주였던 스타 김동인은
  그녀를 모델로 '문장' 지에
  소설 '김연실전'을 연재했다.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사회적 성폭력,
  비열한 제2의 확인사살이었다.
  이성의 눈을 감은 채, 사내라는 우월감으로
  근대 식민지 문단의 남류(男流)들은 죄의식 없이
  한 여성을 능멸하고 따돌렸다.
  창조, 개벽, 매일신보, 문장, 별건곤, 삼천리, 신여성,
  신태양, 폐허, 조광**의 필진으로
  잔인한 펜을 휘둘러 지면을 채웠다.
  염상섭도, 나카니시 이노스케라는 일본 작가도 합세했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그들은 책마다 교과서마다
  선구와 개척의 자리를 선점했다.
  인간의 시선은커녕 편협의 눈 하나 교정하지 못한 채
  평론가 팔봉 김기진이 되었고
  교과서 편수관, 목사, 소설가 늘봄 전영택이 되었고
  어린이 인권을 앞세운 색동회의 소파 방정환이 되었다.
  김동인은 가장 큰 활자로 문학사 한가운데 앉았다.
  처음 그녀를 불러내어 데이트 강간을 한
  일본 육군 소위 이응준은
  애국지사의 딸과 결혼하여 친일의 흔적까지 무마하고
  대한민국 국방 경비대 창설로, 초대 육군 참모총장으로
  훈장과 함께 지금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탄실 김명순은 피투성이 알몸으로 사라졌다.
  한국 여성 최초의 소설가, 처음으로 시집을 낸 여성 시인,
  평론가, 기자, 5개 국어를 구사한 번역가는
  일본 뒷골목에서 매를 맞으며 땅콩과 치약을 팔아 연명하다
  해방된 조국을 멀리 두고 정신병원에서 홀로 죽었다.
  소설 25편, 시 111편, 수필 20편, 희곡 · 평론 등 170여 편에
  보들레르, 에드거 앨런 포를 처음 이 땅에 번역 소개한
  그녀는 처참히 발가벗겨진 몸으로 매장되었다.
  꿈 많고 재능 많은 그녀의 육체는 성폭행으로
  그녀의 작품은 편견과 모욕의 스캔들로 유폐되었다.
  이제, 이 땅이 모진 식민지를 벗어난 지도 칠십여 년
  아직도 여자라는 식민지에는
  비명과 피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조선아, 이 사나운 곳아, 이담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보아라.
  피로 절규한 그녀의 유언은 오늘도 뉴스에서 튀어나온다.
  탄실 김명순! 그녀 떠난 지 얼마인가.
  이 땅아! 짐승의 폭력, 미개한 편견과 관습 여전한
  이 부끄럽고 사나운 땅아!


  * 김명순(1896~1951)
  호 탄실. 1917년 춘원 이광수에 의해 등단한 소설가. 많은 작품을 썼지만 일본 유학 중 열아홉 살에 고향 선배로부터 데이트 강간을 당한 후 조롱과 따돌림을 당하고, 역시 고향 선배인 김동인의 소설「김연실전」의 실제 인물로 알려져 문단에서 유폐된 한국 여성 최초의 작가.

   ** 김명순을 소재로 냉소와 멸시의 글이 실린 잡지들

 

 -『문예중앙』, 2016. 겨울호

 

 ■192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

  김명순(1896~1951)

  남자들 세상인 문단에 발을 들이다

 

 

  탄실(彈實) 김명순(金明淳, 1896~1951)은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문학 작품집 『생명의 과실』을 펴내며 남자들이 판치던 문단의 빗장을 연다. 이미 소설로 탄탄한 토대를 쌓고 있던 그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문단에 들어서지만, 편협한 남성 우월주의가 팽배해 있던 당시의 문단은 아직 그를 맞아들일 채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각고의 노력 끝에 굳은 땅을 뚫고 나온 한국 여성 문학의 첫 싹은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상처투성이가 되어 문학사의 한구석에서 시들어간다.

  김명순은 1896년 평양에서 소실의 딸로 태어난다. 이런 출생 배경은 그의 삶과 문학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그는 기독교 계통의 평양 사창골학교를 거쳐 서울 진명여학교 보통과에 입학한다. 그런데 1학년 때 어머니를 여의는 바람에 이후 계모 밑에서 여러 이복 형제와 지내는 등 우울한 사춘기 시절을 보낸다. 진명여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1917년 최남선이 주재하던 『청춘』의 현상 문예 공모에 ‘망향초’라는 필명으로 단편 소설 「의심의 소녀」를 응모, 2등으로 입선함으로써 문단에 나온다.

  공모에 입선한 「의심의 소녀」는 심사 위원인 이광수로부터 언문 일치의 문체, 권선 징악의 단순 구도를 탈피한 현실 묘사, 관념적 사고를 배제하고 근대 사상을 반영한 점 등을 높이 평가받는다. 「의심의 소녀」는 일부 다처의 봉건적 가정을 배경으로, 첩에게 남편의 사랑을 빼앗긴 어머니가 자살한 뒤, 계모의 위협 앞에 노출된 소녀를 데리고 할아버지가 정처 없는 길을 떠난다는 줄거리의 작품이다.

  김명순의 이 작품은 1916년에 씌어져 1917년에 현상 공모 입선으로 빛을 보게 된다. 고대 소설에서 겨우 탈피, 기껏해야 이광수의 첫 소설 「소년의 비애」가 나오던 무렵에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가족 제도의 모순에 희생된 여성을 큰 무리 없이 그려낸 점을 감안한다면 이 작품의 문학적 가치를 쉽게 폄하할 수 없을 것이다.

  1919년 김명순은 잠시 김동인 · 전영택 · 김억 · 김찬영 등과 함께 『창조』의 동인으로 활동한다. 그러다가 1920년에 들어 여성이라는 불리한 조건을 떨치고 일본 유학을 감행한다. 동경여전의 문과와 음악학교에서 공부하며 그는 유학생 잡지 『학지광』과 『여자계』 등에 시 · 소설 · 수필 등을 발표한다. 그는 같은 해 『창조』 7호에 ‘망양초’라는 필명으로 삼각 관계로 말미암은 번민과 기다림을 꽃과 나비로 의인화해 표현한 산문시 「조로(朝露)의 화몽(花夢)」을 선보이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한다. 『여자계』에는 이 해에 단편 「영희의 일생」 · 「조모의 묘전에」, 『신여성』에는 「처녀의 가는 길」을 발표한다.

  1921년 『개벽』 12월호에 발표한 자전적 소설 「칠면조」에서는 유학 시절에 겪은 고통과 외로움을 서간체 형식으로 담아낸다. 1922년 그는 『개벽』에 창작시 「동경(憧憬)」을 발표함과 아울러 프란츠 베르펠의 시 「웃음」, 보들레르의 「빈민(貧民)의 사(死)」, 포의 소설 「상봉」 등 표현주의와 상징파, 후기 인상파와 악마파에 걸친 다양한 작품을 번역 소개해 서구 현대 문학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보여준다. 1923년에는 『신여성』에 단편 「선례」와 시 「기도」 · 「꿈」 · 「탄식」 · 「환상」 등을 발표하며, 1924년에는 『폐허 이후』에 시 「위로」, 『신여성』에 수필 「봄 네거리에 서서」, 『조선일보』에 소설 「돌아다 볼 때」 · 「탄실이와 주영이」 등을 발표한다.

 

  소연의 그 얼굴은 해쓱하게 변했다. 그는 입술까지 남빛으로 변했다. 은순은 가만히 앉았다가, 차를 따르려 탁자 앞으로 가서 그 앞에 걸린 거울 속을 들여다 보다가, 자기 눈에 독기가 띄운 것을 못 보고, 효순이가 소연이와 숨결을 어우르듯이 하던 이야기를 끝치고 모든 것이 괴로운 듯이 뜰 앞을 내려다 보는 것을 보았다.

  이때 두 사람은 뒤에서 반사되어 비치는 시선을 깨달으면서 똑같이 뒤를 돌아다 보았다. 이때다, 두 지식미를 가진 얼굴과 다만 무엇을 의심하고 투기하는 듯한 얼굴이 뾰족하게 삼각을 지을 듯이 거울 속에 보였다.

   -김명순, 「돌아다 볼 때」, 『조선일보』 연재(1924)

 

  친구 은순과 그 남편 효순 사이에 낀 소연의 삼각 관계를 그린 소설 「돌아다 볼 때」는 애욕과 질투의 심리를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처럼 자유 연애 사상을 기조로 김명순의 소설 속에 나오는 많은 불륜과 사랑, 그리고 질투는 작가 자신의 실제 삶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여러 남자와 만나 사랑에 빠졌다가 헤어지며 귀국 뒤에는 임장화, 『창조』의 동인이자 화가인 김찬영과도 관계를 맺는다.

이 남자 저 남자를 전전하는 김명순의 파격적인 연애 행각은 김명순을 모델로 한 김동인의 소설 「김연실전」에서 부정적 시각으로 묘사된다. 김동인은 여기서 김명순뿐 아니라 김일엽 · 나혜석 등 당시 문단에서 이런저런 얘기가 나돌던 여성 문인들을 싸잡아 ‘여류 문사’라는 허울 아래 성적인 방종을 일삼는 이들로 비하한다.

  또 김기진도 “그는 평안도 사람의 기질인 굳고도 자가 방호(自家防護)하는 성질이 많은 천성에 여성 특유의 애상주의를 가미해서 그 위에다 연애 문학사류의 펭키칠을 더덕더덕 붙여놓고 의붓자식이라는 환경으로 말미암아 조금은 꾸부정하게 휘어가지고 처녀 때에 강제로 남성에게 정벌을 받았다는 이유가 있기 때문에 더 한층 히스테리가 되어가지고 문학 중독으로 말미암아 방분(放奔)하여졌다.”

  라고 하며 문학 외적인 부분까지 문제 삼는다. 문단이 겉으로 여성 작가를 받드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얼마나 여성을 차별했고, 문학을 한다는 남성의 여성관조차 얼마나 편협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시의 여성 작가들은 작품보다 자유 분방한 사생활로 뭇 사람의 이목을 끌고, 작품에 대한 평가도 이에 따라 이루어지기 일쑤였다.

 

  1925년 김명순은 여자로서는 이각영에 이어 두 번째로 『매일신보』 기자로 입사해 염상섭 · 안석영 등과 함께 일한다. 그러면서 『조선일보』에 시 「단장(斷腸)」 · 「언니 오시는 길에」 · 「무제」 · 「향수」, 『동아일보』에 「외로움의 변조」, 『조선문단』에 「오오 불!」 · 「우리의 이상」, 『신민』에 「추억」 등을 발표한다. 아울러 그 동안 쓴 시와 산문을 묶어 같은 해 4월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생명의 과실』을 펴낸다. 근대 여성 작가로서는 최초로 펴낸 문학 작품집인 『생명의 과실』은 4 · 6 배판 162쪽에 시 24편, 감상문 「대중 없는 이야기」 외 3편, 단편 「돌아다 볼 때」 외 1편을 싣고 있다.

 

  거울 앞에 밤마다 밤마다 / 좌우편에 촛불 밝혀서 / 한없는 무료를 잊고지고 / 달빛같이 파란분 바르고서는 / 어머니의 귀한 품을 꿈꾸려 // 귀한 처녀 귀한 처녀 설운 신세 되어 / 밤마다 밤마다 거울의 앞에

     
  -김명순, 「기도」, 『신여성』(1923. 11.) ― 『생명의 과실』(한성도서주식회사, 1925)에 수록

 

  여성으로서 펴낸 한국 최초의 문학 작품집인 김명순의 〈생명의 과실〉

       
 
『생명의 과실』에 실린 시편들은 동어 반복 같은 전통적 율격을 응용해 개인의 정서를 노래한 것이 대부분이나, 개중에는 서사풍으로 전쟁을 비판한 것도 있어서 이채를 띤다.

 

  늙은 병사가 있어서 / 오래 싸웠는지라 / 왼몸에 상처를 받고는 싸움이 싫어서 / 군기(軍器)를 호미와 괭이로 갈았었다. // 그러나 밭고랑은 거세고 / 지주(地主)는 사나우니 / 씨를 뿌리고 김을 매어도 / 추수는 없었다. // 이에 늙은 병사는 / 답답한 회포에 졸려서 / 날마다 날마다 낮잠을 자드니 / 하루는 총을 쏘는 듯이 가위를 눌렀다. // 아 ― 이상해라. 이 병사는 / 군기를 버리고 가다가 / 꿈가운데서 싸웠든가 / 왼몸에 멍이 들어 죽었다. / 사람들이 머리를 비틀었다. / 자나 깨나 싸움이 있을진대 / 사나 죽으나 똑같을 것이라고 / 사람마다 두 팔에 힘을 내뽑았다.

  
  -김명순, 「싸움」, 『생명의 과실』(1925)

 

  1926년 그는 『조선문단』에 단편 「손님」, 『동아일보』에 「나는 사랑한다」, 『매일신보』에 「일요일」, 『조선일보』에 시 「그러면 가리까」, 『신민』에 논문 「여인 장발에 대하여」를 발표한다. 또 합동 시화집 『조선 시인 선집』에는 시 「추억」 · 「거룩한 노래」 · 「만년청(萬年靑)」 · 「5월의 노래」 · 「언니의 생각」 5편을 수록한다.

 

  1927년부터는 영화 배우로도 활동해 「광랑(狂浪)」 · 「나의 친구여」 등에 출연한다. 그는 같은 해 『현대평론』과 『매일신보』에 각각 시 「희망」과 「두어라」를 발표하며, 1928년 『동아일보』에 수필 「시필(試筆)」과 『새벗』에 시 「수건」 등을 발표한다. 1930년 그는 서른네 살의 나이로 다시 영화 「꽃장사」 등 3편에 주연으로 출연하며, 1931년 『시대공론』에 시 「개척자」, 1933년 『신동아』에 시 「수도원으로 가는 벗에게」와 「고구려성을 찾아서」 등을 발표한다.

 

  1934년에는 『동아일보』에 시 「석공의 노래」, 1936년에는 『신인문학』에 시 「샘물과 같이」를 비롯해 『동아일보』에 시 「빙화」 · 「나하나」, 『매일신보』에 수필 「귀향」과 「생활의 기억」 등을 발표한다. 이어 1937년 『매일신보』에 동화 「복동이와 밀감」, 1938년 『매일신보』에 소년 소설 「고아원」 · 「고아의 결심」 · 「고아원의 동무」 등을 연재하며, 『동아일보』에 시 「두벌꽃」 · 「심야에」 · 「바람과 노래」 등을 발표한다.

 

  그러나 이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이며 봉건 잔재에 얽매인 사회에서 온몸으로 자유를 갈구한 선구적 여성의 정열은 거대한 현실의 벽에 부딪쳐 산산히 깨진다. 김명순은 1939년 8월 『삼천리』에 발표한 시 「그믐밤」을 마지막으로 작품 활동을 접는다. 얼마 뒤 일본으로 건너간 김명순은 광인이 되어 거리를 헤매다가 아오야마정신병원에서 숨을 거둔다. 그는 비극적인 자신의 말로를 이미 오래 전에 예견한 듯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다.

 

  눈을 감으면 /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니고 / 남빛 안개 속에 조약돌 길 위를 / 한 처녀 거지가 무엇을 찾는 듯이 / 앞을 바라보고 뒤를 돌아보고 / 새파랗게 질려서 뵈인다.

 
  -김명순, 「분신(分身)」, 『생명의 과실』(1925)
 

 

  ○글;장석주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고려원’의 편집장을 거쳐 ‘청하’ 출판사를 설립해 13년 동안 편집자 겸 발행인으로 일했다. 그 뒤 동덕여대, 경희사이버대, 명지전문대 등에서 강의하며, 각종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하고 EBS와 국악방송 등에서 ‘문화사랑방’, ‘행복한 문학’ 등의 프로그램 진행자로, KBS 1TV 'TV-책을 말하다‘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출처:            

  『20세기 한국문학의 탐험1 』/저자장석주 | cp명시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