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원 시인의 TISTORY

이 곳은 시인의 집! 문학과 예술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듣고 말합니다

금동원의 우연의 그림 앞에서

시인의 詩를 읽다 253

손발을 씻고/ 김복희

손발을 씻고  김복희  노트 앞 장에 프랑스 광대 사진이 붙어 있다친구는 프랑스 광대의 사진을 가지고 있었다시인이 분장한 사진이라고 했다외줄 타는 남자, 호랑이 옆에 선 여자, 스타킹을 매만지는 무용수들 사진이다 팔리고,남은 것, 아무도 시인을 좋아하지 않았고시인은 혼자서 많이 많은 것을 좋아했다고 들었다친구와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사진을 팔러 먼저 가 있겠다고 했다전염병처럼인간이 옮는 것이다잘 안되는 것이다손발을 씻고 깨끗한 음식을 먹어도노출되는 것이다빛에흰 얼굴이 만져진다  -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 ( 2018, 민음사 )

안개 속에서

안개 속에서 헤르만 헤세 기이하여라,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 모든 나무 덤불과 돌이 외롭다 어떤 나무도 다른 나무를 보지 못한다 누구든 혼자이다. 나의 삶이 아직 환했을 때 내게 세상은 친구들로 가득했다 이제, 안개가 내려, 더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어둠을, 떼어놓을 수 없게 나직하게 모든 것으로부터 그를 갈라놓는 어둠을 모르는 자 정년 그 누구도 현명치 않다. 기이하여라,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 삶은 외로이 있는 것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한다. 누구든 혼자이다 -《헤르만 헤세 대표시선》,( 2007년 민음사)

길어서 길이 된 길/ 방지원

길어서 길이 된 길 방지원 참 오래 걸었다 여럿이서 혼자서 여럿일 땐 길도 얼굴도 여럿이었지만 혼자 걸을 땐 두려워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가끔 신작로에서 신기루를 만나기도 했지만 내려주신 길엔 자주 물이 굽이치고 바람이 불고 전염병이 세상을 휘저었다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도 내 뜻은 아니었다 다 주어도 좋을 사랑을 하고 살이 찢기는 이별을 하고 나중엔 서로의 이름을 놓아버렸다 돌아보니 텅 빈 길에 수북이 남은 마음부스러기들 마음도 마음을 밀어낼 때가 있다 몸 비듬처럼 길은 예전 얼굴이 점점 아니어도 다녀간 발자국들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왼쪽 귀에 바닷소리가 산다》,(2023, 미네르바)

Cold Case/ 허연

Cold Case 허연 한 친구는 부처를 알고 나니까 시 같은 거 안 써도 되겠다며 시를 떠났다. 또 한 친구는 잠들어 있는 딸 아이를 보니까 더 이상 황폐해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시를 떠났다. 부러웠다. 난 적절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별자리 이름을 많이 알았거나 목청이 좋았다면 나는 시를 버렸을 것이다. 파킨슨병에 걸린 초파리를 들여다보며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면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신중한 내연기관이었다면 수다스럽게 시를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또 시를 쓴다. 그게 가끔은 진실이다. 난, 언제나 끝까지 가지 못했다. 부처에게로 떠난 친구나, 딸아이 때문에 시를 버린 친구만이 끝까지 갔다. 미안하다.미안하다. 내 시가 누군가의 입맛을 잃게 해서. 끝까지 가지 못해서. -《..

강/ 황인숙

강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은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골몰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이인성의 소설 제목 "미쳐버리고 싶은,미쳐지지 않는" 에서 차용 -《자명한 산책》, (문학과 지성사, 2003) ◎황인숙은 시인, 에세이스트.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문장의 방문/ 허수경

문장의 방문 허수경 아직 아무도 방문해보지 않은 문장의 방문을 문득 받는 시인은 얼마나 외로울까, 문득 차 안에서 문득 신호등을 건너다가 문득 아침 커피를 마시려 동전을 기계 속으로 밀어넣다가 문장의 방문을 받는 시인은 얼마나 황당할까? 아주 어린 시절 헤어진 연인의 뒷덜미를 짧은 골목에서 본 것처럼 화장하는 법을 잊어버린 가난한 연인이 절임 반찬을 파는 가게 등불 밑에 서서 문득, 그 문장의 방문을 받는 시인은 얼마나 아릴까? 가는 고둥의 살을 빼어 먹다가 텅 빈 고둥 껍질 속에서 기어나오는 철근 마디로만 남은 피난민 거주지 다시 솟아 오르는 폭탄을 보다가 문득, 문장의 방문을 받는 시인은 얼마나 쓰라릴까, 혹은 부드러운 바위를 베고 아이야 잘자라, 라는 노래를 하고 있던 고대 샤먼이 통곡의 거리로 들..

영원 아래서 잠시/ 이기철

영원 아래서 잠시 이기철 모든 명사들은 헛되다 제 이름을 불러도 시간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금세기의 막내딸인 오늘이여 네가 선 자리는 유구와 무한 사이의 어디쯤인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영원은 대답하지 않는다 어제는 늙고 내일은 소년인가 오늘의 낮과 밤은 어디서 헤어지는가 이파리들이 꾸는 꿈은 새파랗고 영원은 제 명찰을 달고 순간이 쌓아 놓은 계단을 건너간다 나날은 누구의 방문도 거절하지 않는다 이 윤슬 햇빛이 늙기 전에 나는 어느 철필도 쓰지 않은 사랑의 문장을 써야 한다 오래 견딘 돌이 체온을 버리는 시간 내가 다독여 주지 못한 찰나들이 발등에 쌓인다 무수한 결별의 오늘이 또 나를 떠난다 나는 여기에 현재의 우편번호를 쓸 수 없다 -《영원 아래서 잠시》,( 2022, 민음사)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 금동원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 금동원 사랑을 잃고 추락하는 너에게 가벼움의 기분을 묻는 건 예의가 아니다 끝내 붙잡지 못하고 손을 놓아버린 마지막 이별의 몸짓은 그런대로 우아하다 위태롭게 매달려있는 탈색된 시간의 슬픈 맨살 한 시절 푸른 욕망으로 뒤덮였던 노래는 땅을 향해 곧두박칠치는 이별의 레퀴엠 쓰디쓴 연민으로 쌓여가는 핏빛 그늘이다 계절을 밟고 지나온 죽음의 씨앗들 다시 꿈꾸는 새로운 사랑을 위하여 낙엽은 죽음보다 깊은 침묵 속으로 잠 못 이루는 생명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가을에서 겨울로 겨울에서 봄으로 풋풋한 초록을 기억하는 얇은 입술마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 *잉게르히트 바흐만의 시 제목에서 차용 -《시 속의 애인》, (2020, 서정시학)

그러니까 시는/ 진은영

그러니까 시는 진은영 우리가 절망의 아교로 밤하늘에 붙인 별 그래, 죽은 아이들 얼굴 우수수 떨어졌다 어머니의 심장에, 단 하나의 검은 섬에 그러니까 시는 제법 볼륨이 있는 분노, 그게 나다! 수백겹의 종이 호랑이가 레몬 한 조각에 젖는다 성냥개비들, 불꽃 한 점에 날뛴다 그러니까 시는 시여 네가 좋다 너와 함께 있으면 나는 나를 안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시는 여기 있다 유리빌딩 그림자와 노란 타워크레인에서 추락하는 그림자 사이에 도서관에 놓인 시들어가는 스킨답서스 잎들 읽다가 덮은 책들 사이에 빛나는 기요틴처럼 닫힌 면접장 문틈에 잘려나간 그림자에 뒤덮여서 돋아나는 버섯의 부드러운 얼굴 그러니까 시는 돌들의 동그란 무릎, 죽어가는 사람 옆에 고요히 모여 앉은 한밤중 쏟아지는 폐병쟁이 별들의 기침 언어..

사랑스러운 추억/ 윤동주

사랑스런 추억 윤동주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트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 동경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1942년 5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