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원 시인의 TISTORY

이 곳은 시인의 집! 문학과 예술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듣고 말합니다

금동원의 우연의 그림 앞에서

시인의 詩를 읽다 253

오어사(悟漁寺)에 가서 원효를 만나다/ 황동규

오어사(悟漁寺)에 가서 원효를 만나다 황동규 1. 오어사에 가려면 포항에서 한참 놀아야 한다. 원효가 친구들과 천렵하며 즐기던 절에 곧장 가다니? 바보같이 녹슨 바다도 보고 화물선들이 자신의 내장을 꺼내는 동안 해물잡탕도 먹어야 한다. 잡탕집 골목 어귀 허름한 술집에 들어가 그곳 특산 정어리과(科) 생선 말린 과매기를 북북 찢어 고추장에 찍어 먹고 금복주로 입 안을 헹궈야 한다. 앞서 한번 멈췄던 곳에 다시 차를 멈추고 물으면 또 다른 방향, 포기할 때쯤 요행 그 집 아는 택시 기사를 만난다. 포항역 근처의 골목 형편은 머리 깎았다 기르고 다음엔 깎지도 기르지도 않은 원효의 생애만큼이나 복잡하고 엉성하다. 2. 허나 헤맴 없는 인간의 길 어디 있는가? 무엇이 밤 두 시에 우리를 깨어 있게 했는가? 무엇이..

듣는 사람/ 이시영

듣는 사람 이시영 좋은 시인이란 어쩌면 듣는 사람인지 모른다 그래야 깊은 산 삭풍에 가지 부러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고 놀라서 달음박질치는 다람쥐의 재재바른 발자국 소리도 조심조심 들을 수 있다 때론 벼락처럼 첨탐 높은 교회당을 때리는 야훼의 노한 음성도 어릴 적 볏짚 담 너머 키 작은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도 함께 들을 수 있다 좋은 시인이란 그러므로 귀가 쫑끗 솟은 사람인지 모른다 그래야 잉크병 얼어붙은 겨울밤 곱은 손 불며 이 모든 소리를 백지 위에 철필로 꾹꾹 눌러쓸 것이다 - 《나비가 돌아왔다》, (2021, 문학과 지성사) ○작가 소개 1949년 전남 구례에서 출생하여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를 수학했다.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월간문학] 제3회 신..

그림 그리기/ 마종기

그림 그리기 마종기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 겨울같이 단순해지기로 했다. 창밖의 나무는 잠들고 形象의 눈은 헤매는 자의 뼈 속에 쌓인다. 항아리를 그리기 시작했다. 빈 들판같이 살기로 했다. 남아 있던 것은 모두 썩어서 목마른 자의 술이 되게 하고 자라지 않는 사랑의 풀을 위해 어둡고 긴 內面의 길을 핥기 시작했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 1980, 문학과 지성사) 馬種基 시의 대상은 대부분 私的이다. 시뿐만 아니라 문학 일반에서 이라는 말은 그리 좋은 말이 못 된다. 문학이 쓰는 사람, 즉 작가의 이야기인 것은 분명하지만 작가 자신만의 이야기, 다시 말해서 사적이어서는 안 된다. (......)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면서도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 그것은 보편성이라는 말로 부른다면 이 보편..

양 떼를 지키는 사람들

양 떼를 지키는 사람들 알베르투 카에이루(페르난두 페소아) 1. 나는 한 번도 양을 쳐 본 적 없지만, 쳐 본 것이나 다름없다. 내 영혼은 목동과도 같아서, 바람과 태양을 알고 계절들과 손잡고 다닌다 따라가고 또 바라보러, 인적없는 자연의 모든 평온함이 내 곁에 다가와 앉는다. 하지만 나는 슬퍼진다 우리 상상 속 저녁노을처럼, 벌판 깊숙이 한기가 퍼질 때 그리고 창문으로 날아드는 나비처럼 밤이 오는 걸 느낄 때. 그러나 내 슬픔은 고요하다 그건 자연스럽고 지당하니까 그건 존재를 자각할 때 영혼에 있어야 하는 거니까 그리고 두 손은 무심코 꽃을 딴다. 굽은 길 저 너머 들려오는 목에 달린 방울 소리처럼, 내 생각들은 기뻐한다. 유일하게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기쁘다는 걸 아는 것. 왜냐하면 몰랐더라면, 기..

그렇게 소중했던가/ 이성복

그렇게 소중했던가 이성복 버스가 지리산 휴게소에서 십 분간 쉴 때, 흘러간 뽕짝 들으며 가판대 도색잡지나 뒤적이다가, 자판기 커피 뽑아 한 모금 마시는데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종이컵 커피가 출렁거려 불에 데인 듯 뜨거워도, 한사코 버스를 세워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가쁜 숨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회청색 여름 양복은 온통 커피 얼룩. 화끈 거리는 손등 손바닥 쓸며, 바닥에 남은 커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했던가.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는 삶은 꿈이다. - 《달의 이마에는 물결 무늬 자국》, (2003, 문학과 지성사) “내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는 삶이 꿈이다.’ 꿈 깨기 전에..

사물들의 경이로운 진실/ 페르난도 페소아

사물들의 경이로운 진실 페르난도 페소아 사물들의 경이로운 진실, 그것이 내가 날마다 발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의 것이다. 이 사실이 나를 얼마나 기쁘게 하는지 누군가에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나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지금까지 나는 적지 않은 시를 썼다. 물론 앞으로도 더 많이 쓸 것이다. 내가 쓴 모든 시가 그 한가지를 말하지만 각각의 시마다 다르다. 존재하는 것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말하기에. 가끔 나는 돌 하나를 바라본다 돌이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하지는 않는다. 돌을 나의 누이라고 부르며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는다. 대신 나는 그것이 하나의 돌로 존재해서 기쁘다. 그것이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서 좋다. 그것이 나와..

百濟寺 비불/ 금동원

백제사 비불 - 금동미륵보살 반가 사유상 금동원 날아라! 수수께끼 같이 엉킨 세상 천년의 빛으로 이미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는 예언 귀하디 귀한몸 불구덩 속에서도 불사조로 날아올라 비와코 호수 속살처럼 맑은 명경수에 비친 네 모습 백제의 미소이니라 날아라! 천지개벽으로 다시 태어나 어제를 버리고 내일의 몸을 받았으니 자비로운 미륵불의 깊은 고뇌와 눈물방울 손바닥 안의 이치로 높고 푸른 하늘을 향해 날아올라 백제사 붉은 단풍에 스민 네 모습 천년의 미소이니라 -《한국현대시문학》- 2010년 봄호, 백제 명시 특집 중에서

가던 길 멈춰 서서 / W.H. 데이비스

가던 길 멈춰 서서 윌리엄 헨리 데이비스 근심에 가득 차, 가던 길 멈춰 서서 잠시 주위를 바라 볼 틈도 없다면 얼마나 슬픈 인생일까? 나무 아래 서 있는 양이나 젖소처럼 한가로이 오랫동안 바라볼 틈도 없다면 숲을 지날 때 다람쥐가 풀 숲에 개암 감추는 것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 햇빛 눈부신 한낮, 밤하늘처럼 별들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 아름다운 여인의 눈길과 발 또 그 발이 춤추는 맵시 바라볼 틈도 없다면 눈가에서 시작한 그녀의 미소가 입술로 번지는 것을 기다릴 틈도 없다면 그런 인생은 불쌍한 인생, 근심으로 가득 차 가던 길 멈춰 서서 잠시 주위를 바라볼 틈도 없다면 ○윌리엄 헨리 데이비스(William Henry Davies, 1871년 7월 3일 - 1940년 9월 26일)는 웨일스의 ..

「마지막/ 시차적응」/ 마종기

마지막/ 시차적응 마종기 하루 종일 비행해서 지구의 반대쪽에 도착하고 두어 달 조용하고 울적하게 기다려준 집 앞에 선다. 도마뱀들이 소리없이 바쁘고 수천 개의 붉은 부겐빌레아 꽃이 초여름 볕에 졸고 있다. 낮은 그렇게 갔다. 밤이 되어도 열세 시간의 시차 사이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를 들었다. 을 연달아 들었지만 잠은 오지 않고 온몸이 그냥 더워왔다. 자라투스트라의 말만 믿고 감동했던 작곡가의 외침은 목이 쉬고 마지막에서야 고백하는 따뜻한 안식의 노래. 안나 네트랩코의 목소리가 피곤한 가구까지 덮어버린다. 안나와 만나는 밤은 깊고도 넓다. 그래서 나는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말해도 변명이라고 비웃겠지만 그 사이로 세월은 흘렀고 나도 흘렀다. 팔순 나이에는 다른 이들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