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원 시인의 TISTORY

이 곳은 시인의 집! 문학과 예술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듣고 말합니다

금동원의 우연의 그림 앞에서

시인의 詩를 읽다 253

시인이 된다는 것/ 밀란 쿤테라

시인이 된다는 것 밀란 쿤데라 시인이 된다는 것은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하지 행동의 끝까지 희망의 끝까지 열정의 끝까지 절망의 끝까지 그 다음 처음으로 셈을 해보는 것, 그 전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 왜냐하면 삶이라는 셈이 그대에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낮게 계산될 수 있기 때문이지 그렇게 어린애처럼 작은 구구단 곱셈 속에서 영원히 머뭇거리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지 시인이 된다는 것은 항상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하지. - 시집 『시인이 된다는 것』(세시,1999)

바다의 미풍/ 말라르메

바다의 미풍 스테판 말라르메 오! 육체는 슬퍼라,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다 읽었다. 떠나 버리자, 저 멀리 떠나 버리자. 느껴진다 새들이 낯선 거품과 하늘 가운데 있음에 취하였구나. 그 무엇도, 두 눈에 어린 오래된 정원들도 바닷물에 적셔지는 이 마음을 잡아두지 못하리, 오, 밤이여! 잡아두지 못하리, 백색이 가로막는 빈 종이 위의 황량한 불빛도, 제 아이 젖 먹이는 젊은 아내도. 나는 떠나리라! 너의 돛을 일렁이는 기선이여 이국의 자연을 향해 닻을 올려라! 잔혹한 희망에 시달리는 어느 권태는 아직도 손수건의 그 지극한 이별을 믿고 있구나! 그런데, 돛대들이 이제 폭풍을 부르니 어쩌면 바람에 기울어 난파하는 돛대들인가 길 잃고 돛도 없이 돛도 없이, 풍요로운 섬도 없이…… 그러나, 오 나의 마음아, 뱃..

이것이 나의 괴로움이다

이것이 나의 괴로움이다 헤르만 헤세/ 전영애 역 이것이 나의 괴로움이다, 내가 너무 많은 가면을 만들어 쓰고 너무 잘 연기하는 것과 또 나와 남들을 너무 잘 기만하는 것을 배웠다는 사실, 그 어떤 작은 움직임도 그안에 유희와 의도가 없는 그어떤 고통도 나를 동요하게 하지 않는다. 나 이제 이걸, 나의 비참이라 일컬어야 하리. 나 자신을 그렇게 속속들이 알기 위하여 모든 맥박을 미리 알아 버려, 이제 어떤 꿈의 무의식의 경고도 어떤 흥취도 어떤 고통의 예감도 더이상 내 영혼을 건드리지 못하리라는 것 늦은 시험 또다시 인생의 광야에서 나를 낚아 채어 운명은 모질게 좁은 곳으로 밀쳐 넣는다 어둠과 혼잡 속에서 내게 시험과 곤궁을 주려 한다 겉보기에는 오래전에 도달한 모든 것 휴식, 지혜, 노년의 평화 후회없는..

내 본질의 어두운 시간을 나는 사랑합니다

내 본질의 어두운 시간을 나는 사랑합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김재혁 옮김 내 본질의 어두운 시간을 나는 사랑합니다, 이 시간이면 나의 감각은 깊어지니까요, 마치 오래된 편지에서 느끼는 것처럼 이때 나는 지나온 나날의 삶의 모습을 저만치 전설처럼 아득하게 바라봅니다. 어두운 시간은 내게 알려줍니다, 또 다른 삶에 이르는 시간을 넘어선 드넓은 공간이 내게 있음을. 그리고 어쩌다 나는 한 그루 나무와 같습니다, 묘지 위에 자라나 바람결에 가지를 흔들며 죽어간 소년이 슬픔과 노래 속에서 잃었던 (그의 주변에는 따스한 나무 뿌리가 얽혀 있습니다) 그 꿈을 이루어 주는 그 나무와 같습니다. -『기도시집 Das Stunden-Buch』- 제 1부 수도사 생활의 서」 에서 -《소유하지 않는 사랑》,(2003, 고려대학..

포도나무를 태우며/ 허수경

포도나무를 태우며 허수경 서는 것과 앉는 것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까 삶과 죽음의 사이는 어떻습니까 어느 해 포도나무는 숨을 멈추었습니다 사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살았습니다 우리는 건강보험도 없이 늙었습니다 너덜너덜 목 없는 빨래처럼 말라갔습니다 알아볼 수 있어 너무나 사무치던 몇몇 얼굴이 우리의 시간이었습니까 내가 당신을 죽였다면 나는 살이있습니까 어느 날 창공을 올려다보면서 터뜨릴 울분이 아직도 있습니까 그림자를 뒤에 두고 상처뿐인 발이 혼자 가고 있는 걸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포도나무의 시간은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습니까 그 시간을 우리는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의 시간이라 부릅니까 지금 타들어가는 포도나무의 시간은 무엇으로 불립니까 정거장에서 이별을 하던 두 별 사이에도 죽음과..

나는 시인이랍니다/ 심보선

나는 시인이랍니다 심보선 오늘은 오랜만에 산책을 했지요. 되도록 많은 것을 생각하면서요. 당신, 그리고 당신 아닌 모든 사람들에 대해. 지난해의 친구들, 그중 제일 조용한 친구에 대해. 내일의 미망으로 쫓겨난 희미한 빛과 가녀린 쥐에 대해. 지워지지 않는 지상의 얼굴 위로. 나는 한껏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갔지요. 중간에 아는 시인을 봤지만 모른 체했어요. 시인끼리는 서로 모른 체 하는게 좋은 일이랍니다. 시인은 항상 좀도둑처럼 긴장하고 있지요. 느릿느릿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들은 가장 사소한 풍경에서 가장 치명적인 색깔을 꺼내 달아나는 중이니까요. 나는 멀어지는 시인의 뒷모습에 대고 속삭였죠. 잘 아시겠지만 우리는 시인이랍니다. 오늘 우리가 응시한 것들 중에 적어도 개와 아이는 움찔했겠지요. ..

동백꽃 유서/ 이애정

사는 법. Ⅺ -동백꽃 유서 이 애정 불꽃처럼 살았으니 죽어진들 또 어떠리 침묵 뿐인 겨울 땅 밑에서 꿈을 키웠던 건 뜨겁고 뜨겁게 살기 위해서였어 모진 해풍에 입춘도 지나 때늦은 눈이 내려도 내가 피어 있음은 진정 꽃답게 죽고 싶었기 때문이지 타오르던 사랑 끝내 지켜주지 못했지만 기억마저 묻히진 않을거야 한껏 피우자 오늘은 열정 없이도 늙음이 삶보다 슬픈 것을. -《이 시대의 사랑법》, ( 2006, 마을)

바람이 불어 / 윤동주

바람이 불어 윤동주 ​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2004, 열린책들)

동행.2 /금동원

《동행.2》 -장애인 안내견 금동원 " 다음에 내리실 역은 급행열차로 갈아타실 수 있는 환승역입니다." 누가 먼저 안내방송을 들었던 것일까 침착하고 차분하게 서로의 손을 잡고 서있는 풍경이 아름답다 스르르 전철 문이 열리자 여섯 개의 발이 동시에 걸어나간다 모두들 넋이 빠져 교차하는 아수라장의 번잡함 속에서 두 주인공만이 정지된 듯 고요하게 아주 우아하고 당당하게 익숙한 리듬으로 슬로우 퀵퀵, 춤을 추듯 네개의 발과 두 개의 발이 서로의 박자에 맞춰 맞은 편 전철 안으로 사라져간다 오랫동안 믿고 교감해온 익숙한 호흡 잠시 꿈 속에 있었던 듯 별빛 밝은 은하수를 따라 어디론가 미끄러져 가고 있는 듯 충만하고 눈부신 청정함으로 지하철 환승역의 탁한 공기를 맑게 순환시켜 놓고 기차는 출발했다 - 《우연의 그림..

이름 부르기/ 마종기

이름 부르기 마종기 우리는 아직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검은 새 한 마리 나뭇가지에 앉아 막막한 소리로 거듭 울어대면 어느 틈에 비슷한 새 한 마리 날아와 시치미 떼고 옆가지에 앉았다. 가까이서 날개로 바람도 만들었다. 아직도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그 새가 언제부턴가 오지 않는다. 아무리 이름 불러도 보이지 않는다. 한적하고 가문 밤에는 잠꼬대 되어 같은 가지에서 자기 새를 찾는 새. 방 안 가득 무거운 편견이 가라앉고 멀리 이끼 낀 기적 소리가 낯설게 밤과 밤 사이를 뚫다가 사라진다. 가로등이 하나씩 꺼지는 게 보인다. 부서진 마음도 보도에 굴러다닌다. 이름까지 감추고 모두 혼자가 되었다. 우리는 아직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2006, 문학과 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