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원 시인의 TISTORY

이 곳은 시인의 집! 문학과 예술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듣고 말합니다

금동원의 우연의 그림 앞에서

시인의 詩를 읽다 253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이원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이원하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에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나에게 바싹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나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내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

스페어/ 안희연

스페어 안희연 진짜라는 말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 같아 단 하나의 무언가를 갈망하는 태도 같은 것 다른 세계로 향하는 계단 같은 건 없다 식탁 위에는 싹이 난 감자 한 봉지가 놓여 있을 뿐 저 감자는 정확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싹이 아니라 독이지만 저것도 성장은 성장이라고, 초록 앞에선 겸허히 두 손을 모으게 된다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을 바라본다 하지만 싹은 쉽게 도려내지는 것 먹구름이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흐린 것은 흐리고 도려낸 자리엔 새살이 돋는 것이 아니라 도려낸 모양 그대로의 감자가 남는다 아직일 수도 결국일 수도 있다 숨겨 놓은 조커일 수도 이미 잊혀진 카드일 수도 있다 나를 도려내고 남은 나로 오늘을 살아간다 여전히 내 안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내가 나머지의 나머지로서의 내가..

나의 새/ 잉게보르크 바흐만

나의 새 잉게보르크 바흐만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짓밟힌 세계는 땅거미 속으로 다시 주저앉고, 숲들은 그 세계를 위해 수면제를 준비할 때, 파수꾼들이 떠나버린 탑으로부터 차분하고 꿋꿋이 부엉이의 눈이 내려다보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너는 너의 시간을 알고 있다. 나의 새여, 나는 너의 너울을 쓰고 안개를 헤치며 나를 향해 날아온다. 우리는 불량배들이 사는 환경 속에서 주시하고 있다. 너는 나의 눈짓을 따라, 박차고 나가 깃털과 가죽을 휘몰아댄다- 나의 백발의 어깨동무여, 나의 무기여, 나의 단 하나뿐인 무기인 그 깃털을 꽂고 있는 벗이여! 나의 단 하나뿐인 장식품: 그것은 네가 준 너울과 깃털뿐 나무 밑 춤추는 침엽들로 나의 살갗이 얼얼하고 허리까지 오는 수풀이 향기로운 잎새들로 나를 유..

예술 /테오필 고티에

예술 테오필 고티에 그렇다, 작품은 더욱 아름답게 나타난다 작업에 저항하는 형식으로부터, 시, 대리석, 줄마노, 칠보, 잘못된 속박일랑 말아라! 오직 똑바로 걷기 위해 신어라, 뮤즈여, 좁은 반장화를. 안이한 리듬을 멸시하라, 너무 큰 구두처럼, 어떤 발이라도 벗고 신을 수 있는 그런 리듬을! 조각가여, 배척하라 엄지손가락으로 이기는 찰흙을 정령이 딴 곳을 헤맬 대. 싸워라, 카라라 대리석으로, 단단하고 귀한 파로스 대리석으로, 순수한 윤곽의 수호자여. 빌려오라, 시러큐스에게서. 자랑스럽고 매력적인 모습이 분명하게 찍혀있는 청동 조각을 섬세한 손으로 추구하라, 마노의 광맥 속에서 아폴로의 옆모습을. 화가여, 수채화법을 피하라. 그리고 색체를 정착시켜라 아주 연한 색체를 칠보공의 가마 속에서. 창조하라, ..

고요 / 서정주

고요 서정주 이 고요 속에 눈물만 가지고 앉았던 이는 이 고요 다 보지 못하였네. 이 고요 속에 이슥한 삼경의 시름 지니고 누었던 이도 이 고요 다 보지는 못하였네. 눈물, 이슥한 삼경의 시름, 그것들은 고요의 그늘에 깔리는 한낱 혼곤한 꿈일 뿐, 이 꿈에서 아조 깨어난 이가 비로소 만길 물 깊이의 벼락의 향기의 꽃새벽의 옹달샘 속 금동아줄을 타고 올라 오면서 임 마중 가는 만세 만세를 침묵으로 부르네. -『미당 시전집』, (1994, 민음사)

뜨거운 돌/ 나희덕

뜨거운 돌 나희덕 움켜쥐고 살아온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놓고 펴 보는 날 있네 지나온 강물처럼 손금을 들여다보는 그런 날 있네 그러면 내 스무살 때 쥐어진 돌 하나 어디로도 굴러가지 못하고 아직 그 안에 남아 있는 걸 보네 가투 장소가 적힌 쪽지를 처음 받아들던 날 그건 종이가 아니라 뜨거운 돌이었네 누구에게도 그 돌 끝내 던지지 못했네 한번도 뜨겁게 끌어안지 못한 이십대 火傷마저 늙어가기 시작한 삼십대 던지지 못한 그 돌 오래된 질문처럼 내 손에 박혀 있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세상과 손잡고 살았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글을 쓰기도 했네 문장은 자꾸 걸려 넘어졌지만 그 뜨거움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쓰던 밤 있었네 만일 그 돌을 던졌다면, 누군가에게, 그랬다면 삶이 좀더 가벼울 수 있었을까 오히려 그 뜨거움..

고대 아폴로의 토르소/ 릴케

고대 아폴로의 토르소* 릴케 우리는 그 속에서 눈망울이 익은 그 미문(未聞)의 머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의 토르소는 촛대처럼 아직도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쳐박혀진 채이지만 그 속엔 그의 응시가 있습니다, 변하지 않고 번쩍입니다. 그렇거나 그 가슴의 굽은 만(灣)은 당신의 눈을 부시게 할 수는 없을 것이며, 엉덩이를 가볍게 뒤틀 때에도 생식의 요람인 저 중심에 한 가닥 미소가 흐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거나 이 돌덩이는 어깨 아래로는 모두 떨어져 투명해진, 일그러진 작은 입신(立身)이겠죠. 맹수의 껍질만큼도 빛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떤 가장자리에서도 마치 별에서와 같은 빛은 없을 것입니다. 당신을 못보는 곳은 거기엔 없습니다. 당신은 생활을 바꿔야 하겠습니다. *토르소: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정현종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정현종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부-- 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

코카인/ 고트프리트 벤

코카인 고트프리트 벤 나를 몰락 시키는 것, 달콤한 것, 간절히 바라던 것 그것을 너는 내게 준다. 벌써 목구멍이 메어온다. 벌써 저 아래쪽에서는 낯선 소리가 내 자아의 말 못할 모습에 부딪친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튀어나와 여기저기 작용하면서 강한 힘을 내는 칼에 이제 그 소리가 부딪치지 않는다. 거의 그 모습이 희미한 형식의 언덕들이 쉬고 있는 벌판에 가라앉네! 그저 밋밋한 것, 작은 어떤 것, 평평한 것---- 이제 올라와 바람의 입김이 되는데 원형, 둥글게 된, 무(無)---- 아주 희미하게 지나가는 뇌경련의 그 떨림 파열된 자아---- 오 흠뻑 마신 종기 흩날려간 열--- 달콤하게 무너진 둑---- 흘러가라, 오 너 흘러가라---- 낳아주라 해체된 형식을, 피묻은 불룩한 배로서 -『올페의 죽음』,..

나에게 던진 질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나에게 던진 질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미소 짓고, 손을 건네는 행위, 그 본질은 무엇일까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홀로 고립되었다고 느낀 적은 없는지?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듯, 첫번째 심문에서 피고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는 엄정한 법정에 끌려나온 듯, 과연 내가 타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책을 펼쳤을 때 활자나 삽화가 아닌 그 내용에 진정 공감하듯이, 과연 내가 사람들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럴듯하게 얼버부리면서 정작 답변은 회피하고, 손해라도 입을까 겁에 질려 솔직한 고백 대신 번지르르 농담이나 늘어놓는 주제에, 참다운 우정이 존재하지 않는 냉혹한 세상을 탓하기만 할 뿐, 우정도 사랑처럼 함께 만들어야 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혹독한 역경 속에서 발맞춰 걷..

헤밍웨이를 꿈꾸며 / 마종기

헤밍웨이를 꿈꾸며 마종기 그랬지. 나는 늘 떠나고 싶었다. 가난도 무질서도 싫었고 무리지어 고함치는 획일성도 싫었다. 떠나고 또 떠나다 보니 여기에 서 있다. 낡고 빈 바닷가, 잡음의 파도 소리를 보내고 산티아고 노인을 기다리고 싶다. 남은 생명을 한 판에 다 걸고 집채만 한 고기를 잡았던 헤밍웨이의 어부를 만나고 싶다. 그 쿠바 나라 노인은 나를 기다리며 감추어둔 회심의 미소를 그때 보여줄 것이다. 해변에 눕는다. 해변이 천천히 그림자를 옮기면서 나를 치며 가라고 할 때까지 계획 없이 떠다니던 내 생을 후회하지 않겠다. 내가 무리를 떠나온 것은 비열해서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 아직도 말할 수 있다. 노을이 키웨스트 해변에 피를 흘리고 흘려 모든 바다가 다시 무서워질 때까지, 그리고 그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