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벽(詩癖)
이규보
나이 이미 칠십을 넘었고
지위 또한 삼공(三公)에 올랐네
이제는 시 짓는 일 벗을 만하건만
어찌해서 그만두지 못하는가.
아침에 귀뚜라미처럼 읊조리고
저녁엔 올빼미인 양 노래하네.
어찌할 수 없는 시마(詩魔)란 놈
아침저녁으로 몰래 따라다니며
한번 붙으면 잠시도 놓아주지 않아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네.
날이면 날마다 심간(心肝)을 깍아
몇 편의 시를 쥐어짜내니
기름기와 진액은 다 빠지고
살도 또한 남아있지 않다오.
뼈만 남아 괴롭게 읊조리니
이 모양 참으로 우습건만
깜짝 놀랄 만한 시를 지어서
천년 뒤에 남길 것도 없다네.
손바닥 부비며 혼자 크게 웃다가
웃음 그치고는 다시 읊조려본다.
살고 죽는 것이 여기에 달렸으니
이 병은 의원도 고치기 어려워라.
年已涉縱心 位亦登台司
始可放雕篆 胡爲不能辭
朝吟類蜻蛚 暮嘯如鳶鴟
無奈有魔者 夙夜潛相隨
一着不暫捨 使我至於斯
日日剝心肝 汁出幾篇詩
滋膏與脂液 不復留膚肌
骨立苦吟哦 此狀良可嗤
亦無驚人語 足爲千載貽
撫掌自大笑 笑罷復吟之
生死必由是 此病醫難醫
이규보(李奎報, 1168~1241) 고려시대의 문신·문인. 명문장가로 그가 지은 시풍(詩風)은 당대를 풍미했다. 몽골군의 침입을 진정표(陳情表)로써 격퇴하기도 하였다. 저서에 《동국이상국집》 《국선생전》 등이 있으며, 작품으로 〈동명왕편(東明王篇)〉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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