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원 시인의 TISTORY

이 곳은 시인의 집! 문학과 예술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듣고 말합니다

금동원의 우연의 그림 앞에서

시인의 詩를 읽다 253

나는 지금 혼자다/ 임영조

나는 지금 혼자다 임영조 우선 빗장을 지른다 커튼을 내리고 전등을 끈다 세상과 내통하던 전화도 불통 누가 와서 찾아도 들키지않게 숨소리도 죽인 채 나를 가둔다 마침내 바깥과 끊겼다는 절박감 절박한 안도감이 나를 사로잡는다 감정을 내쫓고 관념마저 탁탁 턴 나의 대뇌는 이제 멍청하고 가벼운 진공 상태다 느닷없이 혼 나간 백열등처럼 뜨거운 침묵이 지배하는 방이다 자, 그럼 슬슬 시작해볼까 단 한방에 요절낼 고성능 폭탄 얼핏보면 재래식 같은 실은 함부로 다루기 거북한 시 같은 사제폭탄 하나 만드는 거다 왜냐고 묻지는 말라, 하여튼 터지면 좋고 안터져도 그만인 가동 할 핵 하나 만드는 거다 일촉즉발의 뇌관이 장착된 벽시계만 저벅저벅 죽음을 재는 방에 나는 지금 혼자다 화끈한 음모와 불씨를 품고 눈부신 자폭을 꿈꾸..

孤島를 위하여/ 임영조

孤島를 위하여 임영조 면벽 100일! 이제 알겠다, 내가 벽임을 들어올 문 없으니 나갈 문도 없는 벽 기대지 마라! 누구나 돌아서면 등이 벽이니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마음속 집도 절도 버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귀양 떠나듯 그 섬에 닿고 싶다 간 사람이 없으니 올 사람도 없는 섬 뜬구름 밀고 가는 바람이 혹시나 제 이름 부를까 싶어 가슴 늘 두근대는絶海孤島여!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가서 동서남북 십리허에 해골표지 그려진 禁標碑 꽂고 한 십년 나를 씻어 말리고 싶다 옷 벗고 마음 벗고 다시 한 십년 볕으로 소금으로 절이고 나면 나도 사람 냄새 싹 가신 等神 눈으로 말하고 귀로 웃는 달마가 될까? 그뒤 어느 해일 높은 밤 슬쩍 체위 바꾸 듯 그 섬 내쫒고 내가 대신 엎드려 용서를 빌고 나면 나도 세상과..

시와 기어(綺語)/구상

시와 기어(綺語) 구상 시여! 이제 나에게서 너는 떠나다오. 나는 너무나 오래 너에게 붙잡혔었다. 너로 인해 나는 오히려 불순해지고 너로 인해 나는 오히려 허황해지고 거짓 정열과 허식(虛飾)에 빠져 있는 나, 그 불안과 가책에 떨고 있는 나, 너는 이제 나에게서 떠나다오. 그래서 나는 너를 만나기 이전 그 천진 속에 있게 해다오. 그 어떤 생각도 느낌도 신명도 나도 남도 속이지 않고 더럽히지 않는 그런 지어먹지 않는 상태 속에 있게 해다오. 나의 입술에 담는 말이 치장이나 치레가 아니요 진심에서 우러나오게 되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에서 너의 색안경을 벗어 버리고 세상 만물과 그 실상을 보게 해다오. 오오, 시여! 나에게서 떠나다오. 나는 이제 너로 인해 거듭 기어(綺語)의 죄를 짓고 짓다가 무간지옥(無間..

그 소, 애린- 50/ 김지하

그 소, 애린 50 김지하 땅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서 숨거나 바람이거나 구름이거나 귀신이거나 간에 변하지 않고는 도리없는 땅끝에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 내 속에서 점점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리다 이내 작은 한 덩이 검은 돌이 빛나는 한 오리 햇빛 애린 나.

아직 손을 잡지 않았다면/ 이문재

아직 손을 잡지 않았다면 이문재 아직 손을 잡지 않았다면 아직 어린 시절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았다면 그대는 아직 그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대가 싫어하는 음식이 뭔지 모른다면 지금까지 자기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면 그이는 아직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날카로운 첫 키스가 첫 단추가 아니다. 첫 키스는 서툰 기습 같은 것이다. 사랑은 손에서 시작한다. 사랑은 손이 하는 것이다. 손이 손을 잡았다면 손이 손 안에서 편안해했다면 그리하여 손이 손에게 힘을 주었다면 사랑이 두 사람 사이에서 두 사람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두 손은 서로의 기억을 가지려 한다. 열 개의 손톱이 모두 그이의 얼굴로 보일 때 손금에서 꽃 피고 별 뜨고 강물이 흐를 때 그리하여 그대가 알고 있는 그이의 이야기와 그이가..

벽(김지하 시인, 1941~)

벽 김지하 벽 그것 뿐 있는 것은 그것 하나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 벽 그것뿐 내 마음에 내 몸에 몸 둘레에 너와 나 사이 모든 우리들 사이 벽 다시 벽 네 이름을 쓰는 네 그리움을 눌러서 쓰는 벽 붉은 벽 옛날 훗날 꿈길도 헛것도 아닌 바로 지금 여기 내 마음이 네 가슴속에 녜 몸속에 내 살덩이가 파고들어 파고들어 끝없이 파고들어 기어이 본디는 하나임이 화안이 드러나 열리는 자유, 열리는 눈부신 빛무리 속의 아침바다 그것을 손톱으로 쓰는 그것을 흐느낌으로 우리가 쓰는 온몸으로 매일 쓰는 벽 네 이름을 쓰는 내 그리움을 눌러서 쓰는 벽 그것은 이미 우리 앞에 없다 - 『유심』, 2015년 6월호에 수록 (p34~36) --------------------------------------..

내가 돌이 되면/서정주

내가 돌이 되면 서정주 내가 돌이 되면 돌은 연꽃이 되고 연꽃은 호수가 되고 내가 호수가 되면 호수는 연꽃이 되고 연꽃은 돌이 되고 *미당(未堂) 서정주: 1915년 5월 18일 (전북 고창군) ~ 2000년 12월 24일 (향년 85세)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신라초』, 『화사집』, 『질마재신화』 『서정주시선』 등이 있다.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도종환

세 시에서 다섯시 사이 도종환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 사이에서 한 시 사이도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러보내는 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 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

청춘/최문자

청춘 최문자 파랗게 쓰지 못해도 나는 늘 안녕하다 안녕 직전까지 달콤하게 여전히 눈과 귀가 돋아나고 누군 가를 오래오래 사랑한 시인으로 안녕하다 이것저것 다 지나간 재투성이 언어도 안녕하다 삼각지에서 6호선 갈아타고 고대병원 가는 길 옆자리 청년은 보르헤스의 『모래의 책』을 읽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청년이 파랗게 보였다 연두넝쿨처럼 훌쩍 웃자란 청년 우린 나란히 앉았지만 피아노 하얀 건반 두 옥타브나 건너 뛴다 난삽한 청춘의 형식이 싸락눈처럼 펄럭이며 나를 지나가는 중이다 안녕 속은 하얗다 난 가만히 있는데 다들 모르겠지 한부분에 정신없이 늘어나는 눈물 구르지 않고 사는 혀 아무도 엿보지 않는데 그렇게나 많이 나를 증명할 필요가 있나 가방 속에 읽다 만 들뢰즈의 을 꺼내 나도 읽고 싶었지만 그냥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