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원 시인의 TISTORY

이 곳은 시인의 집! 문학과 예술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듣고 말합니다

금동원의 우연의 그림 앞에서

시인의 詩를 읽다 253

목가풍으로 깊어가는 밤/ 심보선

목가풍으로 깊어가는 밤 심보선 처량하고 고요한 이 저녁이 지나면 온갖 경구들을 남발하고 싶어지는 밤이 오리라 오오 그중 단 하나라도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면 궁륭의 암흑을 떠도는 뭇별의 시간을 거슬러 달은 인간의 가슴속에 한 번 더 뚜렷이 떠오른다 영원이란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야금야금 찢어 먹는 죽은 쥐새끼 따위가 아니던가 지금 지상의 밤은 노래와 침묵 사이에서 붕붕거리는 밤벌레들 늙은 개를 집으로 부르는 낮은 휘파람 소리 홀로 죽어가는 촌로의 먹은 귓가에 부딪히며 다만 목가풍으로 깊어가고 있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차례차례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며 곤한 잠에 빠진다 어디서 누군가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는 자다가도 눈을 벌떡 뜰테지만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초』,(2008, 문학..

단지 조금 이상한/ 강성은

단지 조금 이상한 강성은 아직 이름이 없고 증상도 없는 어떤 생각에 빠져 있을 땐 멈춰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다시 생동하는 세계와 같은 단지 조금 이상한 병처럼 단지 조금 이상한 잠처럼 마음속에서 발생하는 계절처럼 슬픔도 없이 사라지는 위에서 아래로 읽는 시절을 지나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읽는 시절을 지나 이제는 어느 쪽으로 읽어도 무관해진 노학자의 안경알처럼 맑아진 일요일의 낮잠처럼 단지 조금 고요한 단지 조금 이상한 『단지 조금 이상한』, (2013, 문학과 지성사)

유리(瑜離), 언어/ 이기철

유리(瑜離), 언어 이기철 한밤내 언어가 기폭처럼 나부끼고 사상이 선박처럼 육체를 출렁일 때 나는 아직도 내 앞에서 노래부를 수 있는 날들이 남아 있음을 찬탄한다 흔들리는 나무는 무언이 그 언어이듯 벌레들과 짐승들은 단음의 울음이 그 언어이듯 침묵의 산, 침묵의 들판은 정적이 그 언어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숲에 들 때 나무의 무언을 듣고 우리가 산에 들 때 그 정적에 귀기울린다 삶을 사랑한 사람들 유리에 닿은 흔적을 일찍 내린 이슬의 투명으로 배울 때 백년 생애를 헝겊처럼 접어 동풍 속에 집어던진 사람의 마음 들을 건너는 바람의 잎새 스치는 소리로 깨닫는다 오늘 저 들판의 꽃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오늘 저 초록들은 얼마나 계절 속으로 깊어졌는지를 이 세상 가장 청정한 언어인 나무들의 무언 아니면 아..

정거장에서의 충고/ 기형도

정거장에서의 충고 기형도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 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

이런 시(詩)/ 이상(李箱)

이런 시(詩) 이상(李箱, 1910~1937) 역사(役事)를 하노라고 땅을 파다가 커다란 돌을 하나 끄집어 내어놓고보니 도무지어디선가 본듯한생각이 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木徒)들이 그것을 매고나가더니 어디다갖다버리고온모양이길래 쫓아나가보니위험하기짝이없는 큰길 가더라. 그날밤에 한소나기하였으니 필시 그들이 깨끗하게씻겼을터인데 그 이튿날가보니 변괴(變怪)로다 간데온데없더라. 어떤돌이와서 그돌을 업어갔을까 난참이런 처량한 생각에서 아래와같은작문을 지었다. "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차례에 못올 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그러면 내내어여쁘소서." 어떤돌이 내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 것만 같아서 이런시는 그만 찢어버리고 싶더라. -『카톨..

연을 띄우며/ 임영조

연을 띄우며 임영조 연을 날린다 눈 오는 설날 아침 바람이 잘드는 언덕에 올라 맑은 꿈을 배접한 연을 띄운다 내 가슴속 얼레에 감긴 오랜 연모의 질긴 실꾸리 하얀 그리움 스스로 풀어 그대 사는 하늘로 연을 날린다 당기면 당길 수록 달아나는 새 끊길 듯 이어지는 정처럼 가는 인연의 실 끝을 물고 하늘 멀리 가물가물 치솟는 새여 내 몸 속 핏줄까지 물고 가다오 서설이 내려도 추운 이를 위하여 진정 외롭고 슬픈 이를 위하여 시린 손 호호 불며 얼레를 풀면 한 마리의 상서로운 학같이 튼실한 현을 차고 뜨는 내 사랑 아직도 소식없는 그대여 내가 띄운 연을 보거든 먼그대 안부 묻는 줄 알라 내 사무치는 그리움 모조리 풀어 그대 사는 하늘로 띄운 줄 알라 -시집 『귀로 웃는 집』,(1997, 창작과 비평사)

박용래 아포리즘

일찌기 베를레느의 싯귀처럼 선택받은 자의 황홀과 불안, 이 두갈래 높은 경지의 긍지를 나는 어느 날에나 가질 것인가. 소월의 4행시, 엄마야 누나야만 보더라도 첫 행의 감동없이는 다음 행인 금모래빛의 영원도 또 다음 행인 갈잎 노래의 노스탈쟈도 전혀 공허하리라. 끝마저 첫 행의 중복으로 장식한 이 시는 영원한 노스탈쟈 이상의 그 뭣인가를 아프게 점철하고 있지만, 막막한 시의 바다에 던져진 수수께끼 같은 시의 제 1행. 결국 내가 쓰는 시의 제 1행은 지우고 지우다 마지막에 남는 것, 까마귀가 내뱉는 떫은 고염알 같은 것, 그것을 구슬인 양 소중히 한다. 곧잘 끝이 시작이 되는 나의 시, 공식이 있을 수 없다. 으레껏 첫 번 탈고에 만족할 수 없어 마감 시간에도 되풀이 되풀이하여 제목까지 지우는 슬픈 습성..